그의 걱정은 다름 아닌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런 불안증세가 있어 몸과 마음이 지쳐 갔는데 최근에는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부인인 제인은 이러다 남편 몸이 크게 상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컴퓨터 앞에서 매일 밤 12시가 넘도록 일만 하고,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항상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일한 덕분에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교수 승진도 누구보다 빨랐지만 일을 멈출 수가 없을뿐더러, 일이 없으면 계속해서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다.

 

밤이 되니 제법 서늘해졌다. 모기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친구는 조용한 첼로 음악을 틀고는 자신은 차 대신 와인을 한잔하겠다며 잔을 채웠다. 오래전 친구는 내게 자신의 유년 시절이 참으로 힘겨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적으로 봤을 땐 성공했지만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 안에서 화와 짜증으로 푸는 아버지 때문에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특히 술을 마실 때면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으로 돌변했고, 가끔씩 손찌검까지 하셨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집을 떠나 있곤 했고,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구는 장남으로서 여러 동생을 돌봐야 했다. 아버지가 언제 또 폭발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친구의 어린 시절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보니 친구의 일중독 현상과 불안증세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일중독이 되는 원인 중 하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준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뭔가를 잘했을 때만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고 느끼며 자랐던 데 있는 것 같아. 자식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칭찬에 아주 인색했던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경우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더군다나 아버지의 주사와 폭력으로 인해 어린 네 마음은 항상 불안했을 것이고, 너를 보호해야 할 엄마마저 집에 없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아마도 아버지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린 네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잘 들어주는 일이었을 거야. 그렇게 자라 성년이 된 지금은 아버지 대신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있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내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수 있을 거야."

 

친구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느끼는 불안함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듯했다.

 

"그런데 너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거야. 세상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을 잘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너는 소중한 존재야.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는 네 안의 내면 아이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고 그 아이를 사랑해줘. 엄마도 없이 동생들을 위해 혼자 아버지의 화를 감당해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구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친구는 눈물로 가득한 눈을 한참 동안 감고 있다 차분히 말했다.

 

"그렇구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랑받지 못한 꼬마아이가 내 안에 있었구나. 그 아이는 어른인 나에게 자기를 버려둔 채 일만 하지 말고 자기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아.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봤지 내 안에서 떨고 있는 내면 아이에게는 너무도 무심했구나."

 

며칠 후 그 집을 떠나면서 친구를 위해 작은 메모를 남겨놓았다.

 

"넌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여러 번의 힘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준 큰형 같은 존재야. 너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의지가 되고 고마웠는지 몰라. 그러니 제발 꼭 기억해줘. 네가 큰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나에겐 너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_ 혜민스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9. 3. 09:49

 

돈 없어도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에 따르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의 차이는 밥상머리 횟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비록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책을 많이 읽지 못했더라도, 밥상에서 가족과 식사 시간을 많이 보낸 아이들은 언어 능력이 뛰어났다. 혼자서 식사한 아이들에 비해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한 아이는 학습 능력에서 차이가 많았다. 밥상머리에서 나눈 대화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 나타나는 대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어휘를 사용한 반면에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같은 또래와 나누는 대화에는 어휘가 극히 제한적이다. 단어나 어휘의 발전 없이 같은 단어에서 머무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차원이 높은 단어들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고차원적인 언어 공부가 이루어짐으로써 소통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부모가 책을 읽어줄 때 나온 어휘는 140여개 불과했다면 가족 식사 중에 나온 단어의 숫자는 무려 1000개였다. 이것은 기존에 책을 많이 읽고 또 읽어주는 독서에 집중한 공부법보다 8배정도 높다. 혼자서 책을 읽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어휘력이 높다는 점은 밥상머리가 미치는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가족이나 머리가 좋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함께 정기적으로 밥상머리에 모여 대화를 나눈다면 그 자체로 놀라운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비싼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가족밥상머리만 지속적으로 실천한다면 충분히 학습 능력과 언어력을 키울 수 있다. 얼마나 희망적인가? 돈 없이도 자기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길이 밥상머리에 있다.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가정에서 밥상머리 시간만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언어 능력을 키우는 방법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다. 언어가 곧 그 사람이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언어만 되면 공부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공부의 기초는 언어다. 그런데 언어는 읽기와 쓰기보다 말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는 언어력을 키우기 위해서 쓰기와 읽기를 어릴 때부터 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언어는 직접 이야기하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은 글을 몰라도, 읽고 쓸 줄 몰라도 말은 할 수 있다. 1살 때부터 아이들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시기 밥상머리에서 가족이 모여 함께 대화하는 자리에 아이를 참여시키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말하는 것을 통해 아이는 언어를 습득하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스스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이렇게 언어를 배우면 언어를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모국어나 외국어에도 동일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생활 속에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2~3시간 가족이 모여 식사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와 대화 및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 자리는 최고의 언어 학교다. 공부의 기초 실력을 다지는 시간이다. 모든 가정이 이런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진다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독일의 평범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보통 아이보다 미숙하므로 이웃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고 모든 것이 느리고 미숙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는 주로 부모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부모가 언어력을 키워 주었다. 5~6세 때 그가 구사한 어휘의 숫자는 3만 단어가 되었다. 이런 풍부한 언어 덕택으로 프랑스어를 1년 만에, 이탈리어를 6개월에, 라틴어는 3개월에 마스터했다. 그뿐 아니라 영어와 그리스어까지 배워 8세가 되는 해에는 어른도 읽기 어려운 호머와 키케로, 실러 등 어른도 어려워하는 고전과 철학책을 혼자서 독파했다. 그런 책들을 동화책 읽듯이 즐겁게 읽었다. 그 결과 13세 때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16세 때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았다. 바로 그 사람이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의 원조로 알려진 칼 비테 이다.

 

이는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터득한 언어가 얼마나 공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취지로 조사를 한 자료가 있다. 100개의 중, 고등학교 전교 1등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주중에 10회 이상 가족밥상머리를 한 사람이 40%였다. 밥상머리와 공부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명한 학교나 학원을 다니지 않더라도 누구나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밥상머리는 언어력을 높여주는 가장 좋은 장소다. 처음에는 긴 시간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30분 정도 대화 시간을 꾸준히 가진다면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때 나누는 대화는 평생을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고, 앞으로 학습 능력을 키우는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녀와 가족의 미래가 여기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서열풍이 불어서 가정마다, 학교마다 독서를 강조한다. 독서도 좋지만 언어를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은 밥상머리만큼 좋은 곳도 없다. 언어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밥상머리 대화를 시작하면 누구나 언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혹시 경제적 문제로, 혹은 여러 가지 환경적 제약으로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낙심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도 가족과 같이 밥상머리를 시작해 보자. 이런 저런 탓을 하지 말고 하늘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주신 언어적인 능력을 밥상머리를 통해 스스로 발휘해 보자.

 

유대인의 밥상머리 자녀교육법_ 이대희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7. 9. 10:38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복잡미묘한 문제들을 바둑판 위의 일로 대입해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좀 어렵긴 해도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지 않을까.

 

바둑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대국을 벌이게 되면 먼저 머릿속으로 판을 그려야 하고 이기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바둑은 절대로 처음 생각했던 대로 풀리지 않는다. 상대방 역시 이기기 위해 똑같이 치밀하게 판을 그리고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둑판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태클을 당한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해서 궁지에 몰리기도 하고, 살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 한 수 한 수마다 목숨이 걸린 문제가 발생하는 곳, 바로 바둑판 위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프로 기사들은 늘 구사일생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 해결의 고수들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난제들에 부딪치며 살아왔고, 결국에는 그들이 해결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스로 풀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그 문제를 풀고야 만다. 그러니 세상사를 바둑판이라고 생각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 해결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근성만 있으면 된다.

 

그 근성이란, 바로 생각이다.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성.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 그리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상식, 체계적인 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을 나는 '생각'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둑적 사고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바둑 기사의 마인드야말로 이러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사가 바둑판과 같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당장은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악화될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를 갖고 바라본다면 해결책은 반드시 있다. 물론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일 수는 없다. 최상이 아니라면 최선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혹은 양보와 타협을 하거나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목표로 옮겨가는 것 역시 일종의 해결책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날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그것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회피하고 외면한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먼저 지쳐버려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한다. 바둑으로 치자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돌을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둑 기사들은 절대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초읽기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집요하게 다음 수를 고민한다. 설사 끝이 보이는 바둑이라 하더라도 돌을 던지기 전까지는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 한다. 호수가 아니라면 묘수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악수나 과수라도, 치열하게 고민하여 스스로 선택한다.

 

바둑에는 뜻하는 목표가 있고, 논리가 있고, 게임의 법칙이 있다. 바둑 기사의 마인드는 일종의 지략가다. 전략과 전술을 세워 포석을 하고 끊임없이 판세를 읽으며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돌을 놓는다.

 

바둑은 승부가 걸린 게임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해결하기 위해 갖은 수를 생각해내야 한다. 때로는 벼랑 끝으로 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때로는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목표는 바뀌지 않는다. 즉 이기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생존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만의 바둑을 두고 있다. 하루에 한 점씩 바둑을 두었다면 지금 나의 바둑은 어디까지 진행된 것일까? 아직 포석 단계일까? 혹은 이미 절반쯤 진행되었을까? 벌써 마지막 승부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 있든 스스로 돌을 던지지 않는 한, 혹은 판을 모두 채우지 않는 한, 인생이라는 바둑은 끝나지 않는다. 현재 어떤 위기에 있더라도 아직 살아날 희망이 있다. 바둑이 내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집중하여 생각하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 심지어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조차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의외의 답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바둑에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실수도 기회도 모두 내가 만든다. 그만큼 승리는 짜릿하고 패배는 아프다. 하지만 그만큼 더 성장한다.

 

삶은 그 자체로 시련이다. 오로지 생각하는 힘만이 그 시련을 의미있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그 과정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7. 10:33

 

부모들은 고민에 빠진다.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학습지도 풀게 하고, 인터넷 강의도 듣게 했건만, 성적은 갈수록 더 떨어질 뿐, 자녀가 공부를 할 만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부모 입장에서는 무척 당혹스럽다. 필자의 한 지인은 "우리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와서 걱정이다"는 말을 5년째 되풀이 하고 있다. 그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중1 아들은 고2가 되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길래 성적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것일까? 지인에게 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지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학원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 열두 시간 다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 집에 와서도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는 지인의 아들처럼 오랜 시간을 공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은 학교에 와서도 학원숙제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늦은 저녁까지 학원수업을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늦게까지 학원숙제에 매달렸다. 아이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성적은 언제나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왜 성적이 부진했던 것일까?

 

나는 명문대 합격생과 학습법에 대한 연구를 수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명문대생의 합격수기서와 학습법 관련 책을 백 권 넘게 읽었고, 지금도 매달 신간을 구입해서 읽고 있다. 자녀교육서나 합격수기서를 읽어본 적 있는 부모라면 책에 소개된 방법들을 내 아이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책에는 그럴듯한 공부법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자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일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쓴 책들도 적용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자에게 최적화된 공부법을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똑같이 적용시킨다는 것도 무리였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특급 영재에 속했던 저자들 간의 차이가 너무 컸다. 명문대생들과 제자들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종국에는 참새와 독소리의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시도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약간 과장하면 명문대생들과 내 제자들의 공통점은 학생이라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한편 저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사교육이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방해가 되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설명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노트필기는 되도록 자제했다'는 이들도 있었다. '오답노트를 만들라'는 이들이 있었고, '시간낭비일 뿐이다'라는 이들도 있었다. '문제집을 백 권 넘게 풀었다'는 이들이 있었고, '두세 권만 풀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상반된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혼란스러웠다. 특히 일부 학생들이 합격 비결로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거론할 때면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혼란과 당혹감은 명문대생들의 합격수기서와 학습법 관련 책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해소되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각양각색의 공부법을 관통하는 공부의 '제1원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1원칙은 자녀교육의 제1원칙으로 삼아도 손색없을 만큼 절대적인 법칙이다. 제1원칙은 자녀를 키우면서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제1원칙은 풍문에 현혹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소신 있게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1원칙은 자녀교육의 실패확률을 대폭 낮춰줌과 동시에 성공 확률을 대폭 높여준다. 대체, 그 원칙이 무엇이냐고? 제1원칙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도착한 곳은 몇 년 후 미래. 어느 여름날. 당신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현재 시각은 밤 11시.

겨우(?) 밤 11시인데, 애가 벌써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당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숨을 고른 후, 운을 떼었다.

"얘야, 너도 내년이면 고3인데, 너무 일찍 자는 거 아니니? 공부 좀 더 하고 자거라."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난 하루에 4시간만 공부하는 거 몰라?"

 

4시간만 일(공부)하고 퇴근(?)하겠다는 미래의 아들(딸)에 대한 당신의 대처가 궁금하다. 그냥 자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공부를 좀더 하는게 어떻겠냐고 회유하겠는가? 당신이 4당 5락을 입시의 진리로 받들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4시간 공부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고등학생에게 하루 4시간 공부가 과도한 학습량은 아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일일 학습시간은 4시간이 훌쩍 넘는다. 이는 하루 4시간 공부로는 명문대 합격은커녕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4시간만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녀 때문에 근심에 잠긴 당신에게, L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 또한 고교시절 내내 하루 4시간만 공부했기 때문이다. 공부한 시간만 놓고 판단했을 때, 당신 아이나 L군이 명문대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필자도 고3, 재수생, 삼수생, 장수생으로 기나긴 세월을 입시 공부에 매달려 봐서 잘 안다. 하루 4시간 공부로는 서울 소재 대학은커녕 지방 국립대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에 4시간만 공부하고 책을 덮어 버린 배짱 두둑한 L군, 그는 과연 어느 대학의 배지를 달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입학했다. '설마, 서울대?'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최고 학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최고 학부라 함은?' 의대 말이다. '하루 4시간 공부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혹시 재수라도 한 건 아닐까?' 그렇진 않다. 그는 스무 살 현역으로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L군이 명문대에 들어갔다면 다른 수많은 학생들 또한 명문대에 들어갔어야 함이 마땅하다. 4시간 이상 공부하는 고등학생은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L군처럼 탁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L군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하루 4시간 공부로 어떻게 최고 대학의 최고 학부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효율성에 있었다. 즉, 그는 최소의 학습시간을 투입해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는 효율적인 공부를 했던 것이다. 수업시간을 쉬는 시간처럼 보내는 대다수 학생들과 달리, 그는 수업시간에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었다. 그는 수업시간을, 기본개념을 다지고 내신시험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적극 활용했다. '고액 과외나 족집게 강의를 들었던 것 아닐까? 놀랍게 또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L군은 고교시절 내내 사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어떻게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사교육을 받지 않느 것이 공부에 훨씬 더 유리하다. 왜 그렇냐고?

 

배운 것을 가능한 많이, 오래 기억할수록 공부의 효율성은 높아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할까? 쉼 없이 새로운 내용을 배워야 할까, 배운 내용을 수시로 익혀야 할까? 알다시피 사람의 기억력이란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바로 앞쪽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려보라. 불과 일분 전에 읽은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않은가. 당신의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원래 인간의 뇌가 망각에 취약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깜빡깜빡 잘 잊어버려서 때때로 불편하고 낭패를 볼 때도 있지만, 망각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평생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면 우리는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망각 덕분에 과거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에서 망각은 때때로 유익하지만, 공부에서 망각은 치명적이다. 망각은 선별과 자비를 모른다.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까지도 망각의 강 저편으로 끌어가 버린다. 책장을 넘기고 있는 아이는 지식의 조각들을 매순간 망각의 강에 흩뿌리고 있다. 망각의 강을 타고 떠내려가는 지식 조각들은, 즉각 건져내지 않으면 망망대해 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결국,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 지식을 주워 담았던 아이의 머릿속에는 한 조각의 기억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한 남자가 수백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날. 소파에 앉아 지친 심신을 달래며 여행의 추억에 젖어들려는 찰나, 남자는 자신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행히 지갑에는 비행기 왕복 티켓이 남아 있었고, 두 장의 티켓을 통해서 자신이 15박 16일 동안 유럽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무지한 남자, 여행을 다녀온 것이 맞을까?

 

뜬금없이 남자를 등장시킨 까닭은 당신 아이가, 여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처럼, 무의미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갈하기 위함이다. 나는, 어리석은 남자처럼 어리석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매일매일 목격한다. 아이들은 학교, 학원, 집을 순회하며 하루 종일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어제 배운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잊어버릴 거라면 실컷 놀고 푹 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이들을 놀리자는 말은 아니다. 망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대처일 것이다. 다행히 망각을 극복할 비법이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라서 비법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좀 민망한데, 비법은 복습이다. '에잇, 비법이 고작 복습이야? 참 시시하네.'

 

이런 식으로 복습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자녀의 기억력을 과신해선지, 어린 자녀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부모들은 복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녀가 끊임없이 배우기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학원에서 배우고, 과외로 배우고, 인터넷으로 배우고, 학습지로 배우고, 하루 종일 배우기만 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언가를 또 배우는 아이에게 복습이 가능할까? 복습을 안 하면 오늘 배운 지식들은 망각의 강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학생이라면 누구나 사교육과 자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둘 다 하면 안 되나?' '하루가 48시간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자습과 사교육을 양손에 거머쥐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봄 초록의 싱그러움과 가을 낙엽의 정취를 동시에 만끽할 순 없는 법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L군 또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고, 자습을 선택했다. 사교육을 완전히 배제한 그는 모든 공부시간을 자습으로 채워 넣었고, 자습시간 동안 심화학습과 수능공부에 주력했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4시간만 공부했기 때문에 잠도 충분히 잘 수 있었다. 하루에 7시간씩 수면을 취했고, 저녁 식사 전후로 한 시간씩 쪽잠도 잤다. 충분한 수면 덕분에 그는 깨어있는 동안 공부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었다. L군은 자신의 공부 방식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공부시간이 적었지만 실제로 공부한 양은 다른 학생들의 두세 배에 달했다."

 

명문대 합격생들은 자신만의 공부 노하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공부 비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효율적으로 공부하라!'

 

이 문장이 바로, 공부의 제1원칙이다. 그리고 자녀교육의 절대 법칙이다.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혹독하게 공부한다고 해서 우등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4시간을 공부하지만, 어떤 학생은 유명대학에 가고, 어떤 학생은 무명대학에 간다.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열심히는 기본이고, 제대로 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도 학습량과 실력은 쌓이지 않는다.

 

당신 아이가 학창 시절 내내 비효율적인 공부를 한다면 당신이 자녀교육에 쏟은 열정과 헌신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자녀교육에 실패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더구나 자녀교육의 실패는 부모의 실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녀교육의 성패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모로서 성공하고 싶다면, 당신 아이가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공부의 제1원칙을 자녀교육의 제1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자녀교육을 함에 있어서 모든 선택과 판단의 기준을 '효율성'에 두어야 한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4:03

 

'꿈꾸는 다락방'으로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지성, 그는 전주교대를 졸업한 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그에게 왠지 모를 친근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가 전주에서 교육대학교를 다녔던 시기에 나 또한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가 초등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나 또한 초등 교사였고, 그는 작가로서 나의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인생아, 고맙다'는 이지성이 겪은 이십대 시절의 방황과 아픔을 상세히 기록한 자전적 에세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한다.

 

"세상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작가의 길을 가겠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겠다, 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이지성은 저서에서, "내 젊은 날은 방황과 고독,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암흑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당시의 착잡한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4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화사하고 멋진 정장을 입고 교생실습을 나갔다. 친구들이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일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작가도 되지 못하고 교사도 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는 건가.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인가. 학교에만 가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열아홉 살에 대학을 갔다고 하니,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일이다. 잠시, 우리의 스물두 살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스물두 살 때 무얼 하고 지냈는가? 평범하게 살았다면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었거나, 군대에 가 있었거나, 직장을 다녔거나,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지성처럼 존재에 대한 회의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지성의 글을 읽으면서 젊은 날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시련과 아픔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시련과 아픔이 부러웠다. 뭐 그런 걸 다 부러워하냐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놓고 따졌을 때, 스물둘 전위성은 스물둘 이지성보다 남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신 7등급이라는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포자기의 나날을 보내던 내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시기가 고2겨울 즈음이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셈이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법,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고, 나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재수를 했다. 원서를 한 군데도 넣지 못할 만큼 참패했다. 삼수를 했다. 원서를 넣은 세군데 대학에 모조리 낙방했다. 삼수를 실패한 것도 암울한데, 한 달 뒤에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몰랐다. 최종 학력이 고졸인 스물두 살 남자는 군대에 강제 징집된다는 사실을. 끌려가듯 훈련소에 입소했다.

 

스물셋 이지성은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교대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만, 스물셋 전위성은 삼수를 실패한, 고졸 학력이 전부인 군인이었다. 부끄럽다, 초라하다, 비참하다, 죽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적도 없다. 그건 내가 긍정적 사고방식을 소유한 낙관주의자라서가 아니었다. 인생과 앞날을 걱정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개념으로 살았기 때문에 삼수를 실패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군대에 끌려갔어도 슬프지 않았고, 고졸 학력이 전부였어도 절망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나에게는 아품마저도 사치였다. 아픔을 느낄 수 없는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희망도, 절망도,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정신적 뇌사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것이 방황, 고독, 상처, 결핍, 좌절로 점철된 스물둘 이지성을 내가 부러워하는 이유다. 지금 내 신세를 한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당신 아이가 나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왜 이십대 중반까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해야 했을까? 성공한 이들은 나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그들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최적의 환경,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우월한 조건을 갖췄던 것일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희귀병을 앓고 있는 1급 지체장애인, 뺑소니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된 청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된 군인,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다섯 살에 고아가 된 아이, 16개월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 고교자퇴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는 고졸청년, 15년째 출판 거절을 당하고 있는 무명작가. 이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을까, 실패할 확률이 높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들이 성공은커녕 밥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들 거라고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나는 최고다 될 것이다",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외쳤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네 분수를 알아라.", "너 미쳤냐?"라고 비아냥거렸다.

 

여기, 주제 파악 못하는 젊은이가 또 한 명 있다. 학창 시절, 그의 번호는 언제나 1번 아니면 2번이었다. 키가 158.7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젊은이는 예술대학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는 단돈 30만 원을 들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시장골목 한 구석에 있는, 보증금 없는 월 12만 원짜리 방을 구했고, 3개월 과정의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그는 밤마다 소리를 지르며 발성 연습을 했다. 지독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공연에서 남자주인공으로 열연하게 되었고,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연기상도 받았다. 연기학원을 수료하던 날, 학원장은 면담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넌 키가 유난히 작아서 연기 활동하는 데 장애가 많을 거다. 아마 방송 출연은 어려울 거야. 방송 관련된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

 

이것은 작은 시련에 불과했다. 그의 삶은 탈락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MBC 공채시험에 4번, KBS 공채시험에 3번 떨어졌고, 수년 동안 원서를 넣은 대학에 모조리 낙방했다. 연이은 실패에 좌절한 그는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 40알을 모았고, 옥상 난간에 서보기도 했다.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운 없는 놈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다."

 

좌절은 했어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있었고, 희극배우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옥탑방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방송국을 보면서 다짐했다.

 

"난 저기 꼭 들어간다. 방송국아, 기다려라. 지금은 내가 여기서 너를 보지만, 언젠가는 방송국에서 여기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KBS 공채시험에 합격한다. 현재 그는 영화, 연극, 드라마,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꿈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성공을 일궈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능인 김병만이다.

 

그들은 성공은커녕 실패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스무 살에 가장이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타고난 재능도 없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그로 인해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악조건에 굴하지 않았고, 암울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실패에 무릎 꿇지 않았다. 끈질기게 도전했고, 무소의 뿔처럼 전진했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들이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꿈과 목표에 있었다. 그들에겐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간절한 꿈이 있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뤄내고 싶은 비장한 목표가 있었다.

 

흔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을 꼽는다.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생뚱맞다. 부모가 자녀의 학업성취에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 요인에 재력, 무관심, 정보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성적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는 학생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다. 그 의지와 노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꿈과 목표다. 실제로 명문대 합격생들은 확고한 꿈과 명확한 목표를 갖고 공부에 임했다. 그들은 원하는 대학, 가고 싶은 학과, 장래희망을 학창 시절에 이미 확고히 정해 놓았다. 여기서 잠깐, 서울대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공부를 했지만, 크면서 서울대에 진학하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에 참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때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교 1등은 해야 된다는 말을 줄곧 들어왔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교 1등을 꼭 해야 한다는 목표를 확실하게 세웠다. 이것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1등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다. 그 후 나는 정말로 1등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반문하는 부모들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서울대는커녕 반에서 중간도 못가는 실력이다. 공부에 특출난 재능을 갖춘 명문대생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아이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들이 서울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꿈이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갈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꿈과 목표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품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명문대에 들어갈 만큼, 공부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학생들도 이루고 싶은 간절히 꿈과 목표가 있는데, 재능도 실력도 노력도 부족한 당신 아이에게 꿈과 목표마저 없다면, 대체 무슨 수로 그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는 당신 아이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숨걸고 공부하는 그들을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어린 자녀에게 기권과 포기부터 가르칠 셈인가"

 

때때로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잠기곤 한다. '나느 왜 스물넷까지 고졸백수로 살아야만 했던가.' '수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순리대로 흘러간 것이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남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출중한 실력도 없었다. 환경도 상당히 열악했다. 무엇보다도 꿈과 목표가 없었다. 눈물날 만큼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비장한 목표가 없었다. 꿈 없는 내 청춘은 신경세포가 괴멸된 듯 무감각했다. 목표 없는 내 젊음은 뇌세포가 마비된 듯 무기력했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스물넷의 8월 1일을. 그날은 내 생일도 아니었고, 어떤 기념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새롭게 태어난 역사적인 날이었다. 재능도 없었고 환경도 열악했지만, 간절한 꿈과 비장한 목표를 갖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훌륭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교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듬해 나는 고졸백수를 탈출했고, 4년 뒤 초등 교사가 되었다.

 

당신 아이에겐 꿈이 있는가? 목표가 있는가? 공부를 안 한다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당신이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은, 꿈 없는 당신 아이가 고통도, 좌절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인간처럼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목표 없는 당신아이가 이십대 중반까지 고졸백수로 살면서 아무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봤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 아이에게 꿈과 목표가 없다면 성적이 떨어지는 것보다, 재수 삼수를 하는 것보다, 청년 백수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암울한 일이다.

 

재능이나 환경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성공의 조건은 노력이다. 99%의 노력이 천재를 만들고, 많이 아는 사람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재능과 실력도 노력을 했을 때만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당신 아이가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공부든 다른 무엇이든 쉼 없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그 쉼 없는 노력은 꿈과 목표로부터 나온다.

 

일등, 백점, 우등생, 명문대, 성공은 꿈과 목표라는 씨앗을 뿌렸을 때 비로소 거둘 수 있는 열매들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열매만 수확하려 든다. 자녀에게 목표를 세워보라고 조언하지 않고, 날을 세워서라도 백점을 받아오라고 종용한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하지 않고, 학원을 가라는 말만 한다.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백점 맞아라, 학원가라를 외치는 부모인가? 꿈이 무엇이냐, 무슨 목표를 세웠냐고 묻는 부모인가?

 

꿈과 목표는 인생이라는 배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꿈과 목표없이 사는 인생은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 꿈 없는 인생의 끝은 좌초요. 목표 없는 인생의 결말은 난파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꼭 꿈과 목표가 있어야만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꿈과 목표가 없어도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꿈과 목표가 있다면 끊임없이 노력할 확률은 높다. 꿈과 목표가 별로 생각나지도 않는데, 억지로 꿈과 목표를 세울 순 없다, 그래도 어쨌든 참고가 될 만한 글이기에 올려본다.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3:08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부모의 말 한마디에 자녀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자신감입니다. 자녀를 우등생으로 키워내고 싶은가요? 오늘부터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아, 넌 할 수 있어!"

"딸아, 네겐 그것을 해낼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

 

어떻게 하면 이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먼저 자신감을 심어주는 부모의 말이 자녀교육에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겠지? 논문을 검색해볼까? 성공한 부모들과 명문대생들의 예화를 찾아볼까?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싣지 않기로 했다. 자신감이라는 정서적 요소를 무미건조한 통계 수치로 치환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성공한 부모들의 사례나 명문대생들의 일화는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논문이나 성공담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메시지 전달에 흡입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호소력 짙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저자나 독자 모두 논문의 숫자놀음은 따분하고 머리 아플 테고, 일면식도 없는 성공자들의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저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이 독자들의 가슴에 더 와 닿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나는 비관과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자포자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일곱 꽃 같은 나이에 인생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다. 포기와 나태의 대가를 치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학하고 두 달 만에 중간고사를 치렀고, 며칠 뒤에 성적표가 나왔다. 48명 중 10등이었다. '10등이면 잘한 것 아닌가?' 벌써 잊었는가? 뒤에서 10등이었다. 내 앞에 38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밀려드는 좌절감, 한국말로 진행되는 수업을 알아듣지 못하는 당혹감, 해답지를 봐도 뭔 소린지 몰라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참담함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간혹 어떤 책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과대 포장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지금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고교시절의 방황 때문에 나는 스물네 살까지 고졸백수로 살아야 했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로 그랬다. 당시에는 '짜증난다, 재수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겨우 열일곱 나이에 비관과 염세의 늪에 빠져 인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절망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자녀교육 문제로 고민이 많은 부모라면 여기서부터 좀 더 진지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밑바닥을 모르고 끝없이 침전하던 나를 건져 올려 준 사람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내 인생의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은인이 내게 공부를 가르쳐 주거나 장학금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준 선물은 바로 이것이었다.

 

"넌 할 수 있어!"

 

고작 다섯 글자였지만, 내겐 천금보다 값진 말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린 줄 알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은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게 편지로, 전화로, 만날 때마다 쉼 없이 외쳐댔다.

 

"넌 할 수 있어!"

"네겐 무한한 능력이 있어!"

"넌 무조건 잘 될 거야!"

 

자폐적 삶을 살아가던 내 처지에선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아는가? 아무리 무능하고 비관적이고 무기력한 사람일지라도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들으면 두뇌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2년이 흘렀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아무런 변화도, 성과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은인은 여전히 외쳐댔다.

 

"넌 할 수 있어!"

 

그 쉼 없는 외침에 나를 감금했던 절망의 벽이 조금씩 금갔고,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온 빛줄기들이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되는대로 살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라는 비관에 빠져 있던 나에게 희망의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아!',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몰라!','사람답게 살고 싶다!'

태양이 지평선까지 내려앉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아침을 소생시키듯,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비관과 절망에 빠진 나를 소생시키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내게도 그 능력이란 게 있을지도 몰라.'

그와 동시에 나를 끝까지 믿어준 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날 믿어주는데, 그 믿음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절망의 벽을 깨부수고, 빛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절망의 동굴을 벗어나 희망의 광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만일 내게 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절망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거라고, 밑바닥 삶에서 희망을 꿈꿀 수 없었을 거라고,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은인을 생각할 때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감사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흐른다.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서 밝힌다. 은인은, 나의 친누나였다.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자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한 적이 있는가? 자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적이 있는가?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눈에서 감사의 눈물 대신 원망의 눈물을 쏟게 만들고 있다. 자신감은 불어넣지 않고, 잔소리만 불어넣고 있다.

 

당신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사람이 있는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희망의 밧줄을 던져줄 사람이 있는가? 수년 동안 변화와 진전이 없어도 끝까지 믿어 주고 격려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안타깝지만, 당신 아이에게는 그런 은인이 없을 것 같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우리 아이에게 그런 사람이 왜 없나? 엄마인 내가 있는데! 아빠인 내가 있는데!'

 

그렇다. 당신 아이에게 은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당신이다. 오직 당신 밖에 없다. 그 어떤 사람도 당신 아이에게 '넌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라. 당신이 수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를. 당신 아이도 똑같은 처지다. 부모인 당신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신 아이 또한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평생 듣지 못할 것이다.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자녀교육의 진리다. 특히,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잘 새겨듣기 바란다. 이제 당신이 자녀의 공부에 도움으 줄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 밖에 없다. 물론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많은 부모들이 '공부하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 한다. 반면 '할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부모는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라. 자녀에게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준 적이 언제였던가.

 

당신이 자녀에게 불어넣어 주어야 할 것은 잔소리가 아니다. 자신감이다. 오늘부터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대신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외치는 부모가 되라. 오늘 당신이 외친 이 말 한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킨다. 자신감, 당신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이자,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2:11

 

비용 대비 최고의 효과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로 이어진다. 본래 철학은 '앎에 대한 학문'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이처럼 '앎' 전반에 걸쳐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내가 수많은 글로벌 인재들을 만나서 인상적으로 느낀 점 중 하나도 이 '안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놀라운 탐욕이다. 그냥 '안다'고 하면 추상적인 표현이 돼버리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안다 = 지식 x 철학적 사고

 

철학적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2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독서'와 '경험'이다.

우선 '독서', 즉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만난 글로벌 인재들을 보면 대부분 엄청난 독서가들이다. 특히 고전문학과 철학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의 토대가 굉장히 견고하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토대가 없으면 비록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도 독서를 무척 좋아해서 바쁜 와중에도 1년에 100권 이상은 읽고 있다. 애써 짬을 내서 서점에 들러 책 표지를 훑어보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 내용 확인도 없이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이라도 흥미롭다고 느껴지면 일단 사고 본다.

 

책과의 만남도 하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에 대한 투자는 아까지 않고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비용을 적게 들여 스스로를 성장시켜주는 것들 중 책 만큼 비용 대비 효과가 큰 것은 세상에 없다고 믿는다.

 

세계 1%의 철학수업_ 후쿠하라 마사히로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9. 12:06

 

손을 드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손을 들어라! Raise your hands!

나는 수업 시간에 캠페인처럼 학생들에게 손 들기를 강조한다. 나의 수업은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에 팀을 구성하는데 팀장을 뽑으려고 손을 들라고 하면 학생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다. 손을 드는 학생들은 거의 미국, 프랑스, 독일, 스폐인 등 외국 학생들이다. 보다 못한 내가 한국 학생들을 지목하면 그제야 슬며시 손을 든다.

 

손을 들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이건 명명백백하다. 기회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나를 반겨 주지 않는다. 기회로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손을 들고 그것을 잡아야 그다음 순서로 나아갈 수 있다. 손을 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손을 드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자신이 나를 위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호이다.

 

수업을 예로 들면 손을 들어 팀장이 되는 학생들은 그 직책을 맡아야만 느낄 수 있는 조직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 구성원 간의 역학 관계, 개별 구성원의 특징 파악 등에 관한 것들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발표의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손을 들지 않고 그저 묻혀 있듯 지내다 보면 스쳐 지나가 기억에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학생들은 손을 들어 주목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주목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어쩌나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실수를 한다 해도, 그래서 친구에게 창피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인생에서 그렇게 의미 있을 큰 일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경험,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에 비하면 순간의 두려움은 먼지처럼 가볍고 보잘것없다.

 

자신을 드러내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알게 된다. 타인의 시선은 두 번째이다. 손을 들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무리 속의 한 명, 드러날 것도 주목받을 것도 없는 사람,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말 뿐이다.

 

내가 대학 강의를 통해 손 들기 운동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는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패배한 적 없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변명이다. 시도하면 실패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돌려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손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젊음을 보낸 이들은 거개가 실패한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실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실패가 기다리고 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나는 실패한 적은 없어. 왜? 손을 들지 않았으니까' 하는 자기변명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청춘이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부단히 손을 들며 도전을 했던 기억은 가슴 뻐근한 성취의 쾌감만이 아니라, 때로는 참담한 실패의 기억까지도 머지않은 미래의 비옥한 자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나를 진화하게 하는 동력이다.

 

손을 들어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 몰랐던 것을 알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역시 손을 들어야 알 수 있다. 손을 들어 기회를 잡았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못하는 일이라는 것도 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빨리 알 수 있다. 손을 드는 일은 그 순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원하는 방향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음 순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바로 손 들기이다. 그것으로 많은 일이 연결될 수 있다.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 내가 한번 이뤄 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성과가 있다. 자신이 맺은 유무형의 네트워크는 한 단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2014년 1월 17일, 북경 시내 캠핀스키 호텔에서 자그마한 행사가 열렸다. 쓰촨성 야안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의 청소년들이 선플 본부 홈페이지에 올린 1만여 개의 추모의 글이 담긴 추모집과 선플 음악회를 통해 마련한 2만 달러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행사가 끝난 후, 나는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공익 프로그램과 <나는 가수다>를 만든 MBC TV 김영희 국장이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이 20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한,중 양국의 네티즌이 상대 국가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동영상을 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옳다고 판단되면 실행에 바로 옮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추진하겠습니다"라고 선포했다. 만일 제작된다면 한,중 양국에서 최초로 이루어지는 일로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했던 영상물 제작자 심영인 사장에게 촬영을 의뢰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북경 천안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국 시민들을 만나 촬영을 했다. 심영인 사장은 영상 제작의 귀재이다. 그가 촬영하는 비디오는 모두 풍부한 감성이 담긴 뛰어난 예술적 영상으로 태어났다.

 

심 대표와 나는 귀국하자마자 광화문 광장에 나가 한국 시민들이 중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영상을 촬영했다. 나중에 이 영상은 한중 네티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영상으로 태어났다. 내가 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쉽게 할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두드려야만 이루어진다.

 

내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이 손 들기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생각을 다 알아주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한 뒤에 나를 그 자리에 앉히는 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어떤 사람이 평생 동안 기다렸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말하면 열어 드리려고 이곳에 줄곧 있었습니다."

 

문지기에게 열어 달라고 했으면 벌써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터인데, 단 한 번도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이다.

 

기회는 내가 만들어야 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면 내가 먼저 손짓을 해야 기회가 비로소 내게 미소를 보낸다.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맨 처음 시작은 바로 손 들기이다. 정말 쉬운 방법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_ 민병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3. 31. 08:52

 

지금 시작하십시오

내 뜰에 꽃을 피우고 싶으면

지금 뜰로 나가 나무를 심으십시오

내 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상

당신은 언제나 꽃을 바라보는 사람일 뿐

꽃을 피우는 사람은 될 수 없으니까요

 

지금 시작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시작하십시오

지금 그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은 당신으로부터 날마다 멀어져

아무리 애써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지금 뿌리십시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지금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마음밭에 뿌리십시오

지금 뿌리지 않으면 내 마음밭에는 나쁜 생각의 잡초가 자라

나중에는 애써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려도 싹조차 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나의 전공은 성공입니다_ 이창형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2. 9. 19:25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 번째 나무가 자랑한다. "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 두 번째 나무는 "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며 으쓱한다. 세 번째 나무가 이에 질세라 뽐낸다. "나는 아주 향기로운 예쁜 꽃들을 많이 맺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한 그 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물'.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가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이때 성경책 북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그 접착제를 쓰겠다며 찾아온다. 자신이 개발 중인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강해 한 번 책장에 붙이면 뗄 때마다 종이가 찢어져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와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물병은 물을 충분히 담을 수 있고 또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꼭 맞는 조롱박만을 골라 물병을 만들었다. 어느 해, 엄청나게 큰 조롱박만 주렁주렁 열리자 고민에 빠진다.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조롱박을 잘라도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조롱박을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자 가게 밖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쓸어 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그 큰 조롱박 둘레에 그물을 씌운 다음, 그것을 허리에 동여매고 물에 띄었다. 조롱박이 커서 공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기에 둥둥 잘 떴다. 조롱박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바깥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의 또 다른 사례다.

 

장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물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과 입시생들의 면접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부모와 싸우고 온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순간 전쟁 시작이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너 그럼 굶어 죽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 공부해서 뭐 하려고 그래." 1973년에 연세대 철학과 원서를 쓸 때의 나도 그랬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인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쓸모없는 철학으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철학, 인문학의 그 쓸모없음에 쓸모 있음이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 철학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바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철학을 만나시길. 인문학을 만나시길. 그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철학의 힘_ 김형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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