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가 안 되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의 훈육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아이들은 어린 시절 자주 심하게 벌을 받았다. 심지어는 사소한 실수에도 부모로부터 뺨을 맞고, 주먹으로 맞고, 발로 채이고, 두들겨 맞고, 회초리로 맞았다. 그런데 이러한 훈육은 의미가 없다. 절제되지 않은 훈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훈육이 무의미한 이유는 부모 자신들이 자제가 안 돼 있어서 아이들에게 그런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하지 마라"고 하는 부모다. 그들은 아이들 앞에서 자주 술 취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위엄도 조심성도 분별도 없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되는 대로 살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할 것이다. 부모의 삶이 무질서하고 정신없으면서 자녀들에게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주기적으로 때리는 가정에서, 여동생을 때렸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아이를 때리면 아이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에게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 아이는 그 말이 이해가 될까? 어릴 때는 비교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린 눈에 비친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부모가 하루하루 자제하고 조심스럽고 품위 있게 행동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사는 방식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매일을 무질제하게 제멋대로 사는 부모를 보아도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때로 무질서하고 정신 사나운 가정에도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정에서는 절제할 줄 아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다. 의사, 변호사, 여성 사업가, 자선 사업가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절도 있고 단정하게 생활하는 부모이기 쉽다. 그러나 만약 사랑이 부족한 경우 그런 부모들은, 가난하고 무질서한 가정에서 자란 여느 아이들처럼 무절제하고 파괴적이고 정리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길러낸다.

 

결국 사랑이 전부다. 사랑의 신비함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책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위해 이 시점에서 사랑과 훈육과의 관계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간략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자동차와 사랑에 빠진 십대를 유심히 보라. 아이는 그 자동차를 홀린 듯 바라보고 광을 내고 수리하고 튜닝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혹은 사랑하는 장미 정원에 있는 노인을 보라. 그는 정원에서 가지를 쳐내고 뿌리를 다독여주고 거름을 주고 정원을 자상하게 살피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녀를 사랑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아이들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돌보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자녀에게 줄 시간이 없거나 시간을 들일 마음이 없으면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훈육의 필요성이 은근히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고 만다. 훈육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때도,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더 편하다는 생각에 이를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저 오늘은 아이들을 돌볼 에너지가 없을 뿐이야."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침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 짜증을 돋우면 어쩔 수 없이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 때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 문제에는 어떤 훈육이 가장 좋을지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도 않고, 교육적 의도에서라기보다는 화가 나서 가혹하게 훈육을 하게 된다.

 

아이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부모는 아이가 확실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를 훈육해야 할 미묘한 순간도 알아차리고 애정과 배려로 부드럽게 타이르거나 야단치거나 방법을 알려주거나 칭찬을 한다. 그러한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케이크를 먹고, 어떻게 공부를 하고, 어느 때 살짝 거짓말을 하는지, 어느 때 문제에 부딪치기보다는 문제에서 도망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답하고, 이럴 때는 약간 조이고, 저럴 때는 약간 풀어주고, 조금 가르치기도 하고, 이야기도 좀 들려주고, 살짝 안아서 뽀뽀도 해주고, 훈계도 좀 하고, 살짝 등을 두드리면서 시간을 들여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고쳐주고 바로잡아준다.

 

그러므로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훈육 방식은 사랑 없는 부모의 그것보다 질적으로 월등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는 아이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결정을 내릴 때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아이와 고통을 함께한다. 아이들은 맹인이 아니다. 부모가 자기와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당장 고마움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이들 역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받고 있으니 고통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거야. 나도 기꺼이 괴로움을 견뎌야지" 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자기 절제의 시작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는 부모는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서 아이에게 자주 사랑을 고백하고, 정말 친밀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한다. 아이들은 결코 이러한 공허한 말에 속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면서 의식적으로 그 말에 집착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부모의 말이 행동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와 반대로, 진정으로 사랑받는 아이들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무시당했다 주장하고 억지를 부릴지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러한 인식은 황금보다도 가치가 있다. 자신이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 다시 말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느낀다면,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이며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 그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믿음은 어린 시절에 획득해야만 한다. 성인이 돼서 그것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역으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어른이 되어 시련을 겪더라도 그러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 느낌은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돌보게 된다. 자기 절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계획을 세우고 일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을 이야기해왔으니 시간의 문제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만약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면 시간을 소중하게 느끼게 되고 시간이 소중하게 생각되면 시간을 잘 이용하고 싶어진다. 앞서 소개한, 일을 미루기 일쑤였던 재무분석가는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중하게 생각했더라면 하루의 대부분을 그렇게 비생산적이고 불행하게 보내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원했다면 완벽할 정도로 잘 돌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돈을 받고 아이를 돌보는 집으로 그녀를 보내버렸다.

 

부모는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하찮은 존재이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며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절제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지적이고 유능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절제에 관한 한 가장 기초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자기 가치와 자기 시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면, 시간을 절약하고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변함없는 사랑과 돌봄을 받은 운 좋은 아이들은 자기 가치를 마음속 깊이 인식할 뿐만 아니라 깊이 안정감을 느끼면서 성인으로 자란다. 모든 아이들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생후 6개월에 접어들 무렵, 즉 자신이 부모와는 분리된 개별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은 아주 무력하다는 것, 즉 모든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한 온갖 것들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것이 모두 부모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은 죽음과 같다. 아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 때는 상대적으로 무심하거나 냉담한 부모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는 본능적으로 민감하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해서 확신을 시켜준다.

 

"엄마 아빠가 너 혼자 내버려두고 가지 않는다는 것 알지?"

"당연히 엄마 아빠가 너를 데리러 올 거야."
"엄마 아빠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이러한 말들이 행동과 일치하면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될 때쯤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세상은 안전한 곳이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보호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언제나 안전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유롭게 이런 저런 즐거움을 뒤로 미룰 줄 알고, 즐거움을 위한 기회는 집과 부모처럼 언제나 거기에 있으며 필요하면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부모가 죽고 없거나 버림받거나 순전히 방치되거나 재무분석가의 경우처럼 단지 사랑이 결핍되거나 해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아이들은 실제로 상당히 많다. 그런데 사실 버림받지 않는 아이들도 부모에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은 받지 못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부모는 가능한 쉽고 빠르게 훈육하고 싶어서 노골적으로든 은근하게든 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부모가 아이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얼 말하는지 알겠지?"

 

물론 그것은 버림받음이고 죽음이다. 이러한 부모는 아이를 조정하고 지배할 필요 때문에 사랑을 희생한다. 그 대가로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버림받은 채, 세상은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뿌리 깊은 의식 없이 성인에 이른다. 그들은 반대로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으로 인식하고 미래에 더 큰 즐거움이나 안전을 보장받는다 해도 현재의 어떤 즐거움이나 안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참으로 미심쩍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 훈육할 줄 아는 역할 모델과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하고 존재의 안전함을 신뢰해야 한다. 이러한 '자산들'은 부모의 자기 절제와 순수하고 일관된 보살핌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부모에게서 이러한 선물을 받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획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획득 과정은 힘든 투쟁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평생 걸릴 수도 있고 그나마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0. 1. 20:06

 

그저께는 정원을 다듬고 난 뒤에 남은 돌을 그냥 두기가 아까워서 산신각 뒤에 야트막하게 축대를 쌓았다. 덕분에 어지럽던 뒤쪽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는데, 이 일은 석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깨너머 배웠던 내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들쑥날쑥하고 울퉁불통 한 돌을 앞줄 아귀를 맞추어서 놓으니까 반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아주 못생긴 모양이라서 석공 손에서 천대받았던 돌이 나를 만나서 비로소 쓰임새가 있게 된 셈이다.

 

네모진 돌이든 세모진 돌이든 저마다 앉을 자리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을 하면서 담장을 쌓는 데는 크고 작은 돌과 모나고 둥근 돌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떤 생김새든 저마다의 쓰임이 따로 있는 것. 여기에 조화와 균형의 비밀이 숨어 있다.

 

스님의 일기장, 현진스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31. 19:41

 

전 아직 제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주변 사람들이 꿈이나 장래희망을 물어볼 때마다 솔직히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아요.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그저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길 바라세요. 그래서 장래희망을 적을 때마다 요즘 많이들 하고 싶어 하는 공무원을 써서 내곤 해요. 남들이 보면 저는 꿈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전 꿈이 없어요.

 

나는 변호사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고시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검사와 소장, 교수라는 직업으로 수십 년을 살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60년이 넘게 살아온 시점에서 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나는 공부를 좋아하던 학생이 아니었다. 공부보단 글쓰기를 좋아하고, 말하기와 연설에 더 소질이 있었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곧잘 눈물을 흘렸을 만큼 감수성도 풍부했다. 방송반 활동도 열심히 하고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적성에 맞추지 않고 성적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고 보니 검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게 된것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사로 일하면서 우연히 비행 청소년의 눈물을 봤다. 그 눈물이 나를 운명처럼 청소년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진정한 '나의 길'을 찾았다. 지금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신기루를 쫓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적성을 발견하여, 하고 싶은 일 중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진정 좋아하는 목적을 이루며 사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적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 이 두 가지가 맞아떨어진 적성을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타고난 적성 찾기 국민실천본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적성을 찾다 보면 경제적인 문제가 걱정되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 생활고를 겪어서 먹고살기가 힘들 수도 있다. 경제적 자립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성을 찾게 되면 경제적인 걱정을 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적성을 찾으면 심리적으로 행복해지고, 돈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진다. 더 나아가 적성을 찾아서 행복하게 일하게 되면 먹고살 길이 열릴 가능성도 굉장히 높아진다.

 

영광삼촌 : "서울대 졸업, 사법고시 수석합격, 검사와 변호사."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이야기 같지? 하지만 실제 이 삶의 주인공인 강지원 변호사라는 분은 본인의 삶을 후회한다고 했어. 왜냐하면 타고난 적성과 맞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삼촌은 네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꿈에 대한 조급함, 꿈에 대한 강박관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길 바라.

 

많은 선생님과 책들이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이야기해. 중요한 이야기지. 마치 젊어서 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식이야. 그런데 강지원 변호사를 봐. 정말 그런지. 급하게 떠밀리듯 발견한 꿈이나 직업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큰 후회로 남기 마련이라고 그 분은 고백하지. 혹시나 지금 우리는 꿈이나 성공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직업을 갖고 사는지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질문이 있지 않을까? 삼촌은 이 이야기를 네게 해 주고 싶어.

 

돌잔치에서 하는 돌잡이서부터 어른들은 '직업'을 이야기해. 유치원때부터 지금까지 어른들이 꿈을 물으면 우린 직업을 대답해야 했어.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들을 말이야. 나는 정말 내 적성이 뭔지,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충분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 누구도 그럴 기회조차 준 적이 없는데 말이지. 청소년은 꿈을 가져야 한다는 어른들의 암묵적인 압력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꿈을 '정해 버리는' 실수를 하게 하는 건 아닐까?

 

청소년이 선호하는 직업을 조사한 결과를 보자. 의사, 공무원, 교사, 연예인이 언제나 맨 앞에 자리하고 있어. 그런데 정말로 원해서 이 꿈을 희망하게 된 걸까? 이 꿈들이 정말 청소년들이 좋아하고,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꿈일까? 여기서 재미있는 건 청소년들의 선호직업 순위와 학부모들의 선호직업 순위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야. 부모님이 청소년의 꿈을 따르게 된 걸까, 아니면 반대로 청소년이 부모의 꿈을 대신 꾸고 있는 걸까?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달라. 진달래처럼 봄에 피는 꽃이 있고, 봉숭아처럼 여름에 피는 꽃도 있고, 국화처럼 가을에 피는 꽃도 있어. 심지어 동백꽃처럼 겨울에 피는 꽃들도 있어. 다 꽃피는 자기만의 때가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자기 꿈을 빨리 찾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60이 넘은 뒤늦은 나이에 찾기도 하지. 기억할 건 꿈을 빨리 찾는다고 해서 꿈을 빨리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늦게 찾는다고 해서 늦게 이루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꿈을 결정하는 시기가 아니라, 그 꿈이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내 적성에 맞는 꿈이냐 하는 것이지.

 

그러니 지금, 꿈이 없어도 괜찮아. 조금 늦더라도 정말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네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 많은 꿈을 탐색할 기회와 시간이 아직 많아. 오히려 부족한 경험과 좁은 시야로 아주 뚜렷한 꿈이나 희망 직업을 정하는 게, 너무 이르고 이상하고 억울한 선택일 수 있어. 이런 경우 부모님이나 주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꿈들이 많거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꿈을 붙들고 평생을 달렸는데 나이가 들어 그게 내가 정말 원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생각해 보자는 말이야.

 

지금, 꿈이 없어도 괜찮아 / 박승오, 김영광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17. 12:12

 

"나라에 태평한 세월이 계속되면 병사들은 모두 나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때에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몇 해가 지나면 우리 병사들도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_ 서애 유성룡

 

이 책 [징비록]은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우리의 고전이다. 하지만 슬프고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필자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세 번  이상 정독을 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비록 적은 다른 형태, 다른 모습으로, 다른 형식으로 우리 민족을 괴롭히겠지만 그러한 환란에 대처하는 우리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정신과 자세는 임진왜란 때의 그 때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세 번 이상 정독하게 되면 최소한 국민들의 마음 자세가 달라질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준비 부족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요인은 당장 눈앞에 적이 나타났을 때, 담대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도망치고, 혼비백산했다는 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모두가 겁쟁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력이 분산되고 흩어지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준비가 부족했더라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온 국민과 관리와 병사들이 왜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적의 창칼에, 그리고 굶주림에, 그리고 같은 나라 사람들의 칼에 허망하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서라도 간접적으로라도, 아무리 부끄럽고 답답한 역사라도 체험을 하고, 부끄러워하고, 반성을 하게 된다면, 나중에 어떤 위기가 닥친다고 해도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고, 반성도 하지 않은 국민들보다는 훨씬 더 잘 대처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만든 어떤 전쟁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영화에서 우리가 겪은 이런 답답함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지레 겁을 먹은 중국군은 대항을 포기하고 항복해 버린다. 수천 명의 중국군은 총 한 번 쏘지 않고 그냥 그 도시를 일본군들에게 내 주었다. 수천 명이 넘는 중국군, 정확히 수만 명이 될 지도 모르는 끝이 없는 중국군 포로들은 무기를 그대로 압수당한 후 몰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은 비겁함이라고,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자고, 가장 큰 비겁함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적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거나 도망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전쟁을 하게 되면, 절대로 항복하거나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의 선조들 중 많은 이들이 거의 대부분 도망을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신 위대한 선조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훨씬 더 비겁했고, 나약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서애 선생은 [시경]에 나오는 이 말인,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의 뜻과 같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매우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왜적이 매우 지략이 뛰어나고 간교한 자들이었다는 것과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빠져 옥에 갇히게 된 것도 역시 이들의 계략에 우리가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었다. 정말 귀신같았고, 지략이 뛰어났고, 누구보다 용감하고 담대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를 위해서 하늘이 내려준 귀인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끝마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수군 10만 명을 막아 준 한산도해전의 승첩이었다.

 

"왜적들은 싸움을 시작한 이래 오직 수군에게만 패하였는데, 이를 분하게 여긴 도요토미는 고니시에게 어떻게 해서든 조선의 수군을 무찌르라고 명령을 내렸다. 정면으로 붙어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고니시는 계략을 꾸몄다. 김응서에게 호감을 사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이용해 이순신이 모함에 빠지도록 술수를 부렸고, 그런 후에는 원균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해 습격한 것이다. 그의 간교한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_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징비록], 195쪽

 

이 책의 중반까지는 답답함과 억울함과 부끄러움만이 존재 했었다. 하지만 후반부터 이순신 장군, 의병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천 년 동안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 그 후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와 정황, 스토리도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임진왜란의 생생한 실상과  국내외적인 정세, 전쟁 이후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이며 구체적인 전개와  서술은 이 책의 저자인 서애 선생의 능력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은 매우 가치가 높은 책이다. 책으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서애 선생은 작품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문학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책에 속한다. 즉 이 책은 역사적, 문학적으로 최고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책을 12년 동안의 혹독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한국 학생들이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은 정말 한국의 교육의 맹점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왜적이 시작한 것이지만, 우리 백성과 군사들을 죽이고 굶주림에 죽어가게 했던 것은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관리들이었다.

 

우리 군사들은 왜적에 의해서도 많이 죽었지만, 우리의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관리들에 의해서도 많이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이 책에는 가감 없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은 마침 고을 군사들을 거느리고 병영을 향하고 있었다. 영천에 이르러 길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하양의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방어사에 귀속되어 가던 군사들이었다. 말을 탄 채 지나가는 군사를 본 우복룡은 그들을 붙잡았다. 그러곤 큰 소리로 질책했다.

 

'너희 태도를 보니 반란을 일으키려는 군사들이 틀림없구나.'

 

깜짝 놀란 군사들은 병사의 공문을 내보이며 변명했다. 그러나 복룡은 듣지 않았다. 그러곤 자신의 병사들을 시켜 그들 모두를 죽이도록 명했다. 결국 온 들은 시체로 가득 찼다. 이 소식을 들은 순찰사 김수는 우복룡의 행동이야말로 공을 세운 것이라고 임금께 보고했다. 급기야 우복룡은 통정대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정희적 대신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후 하양 군사의 가족들은 조정의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을 가로막고 그들의 원통한 사정을 울음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이름이 높았던 우복룡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_ 유성룡, 김흥식 옮김, [징비록], 49~50쪽

 

임진왜란 중에는 이렇게 무고한 백성들이, 병사들이 어리석고 무능한 관리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 신각은 관리의 무고를 받아 결국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몽매한 그리고 악한 관리 때문에 억울한 참형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각은 김명원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한강 싸움에서 패하자 김명원을 따라 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 그곳에 온 함경우도 병사 이혼과 함께 서울로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던 적을 격퇴시켰다. 이야말로 왜적이 우리나라에 침략한 후 처음으로 승리한 싸움이었으므로 백성들은 감격해 모두 나와 환호했다. 그럼에도 김명원은 임진강에서 올린 장계에 이렇게 썼다.

 

'신각이 제 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는 등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우의정 유흥은 글을 읽은 대로 임금께 보고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하였는데, 마침 그때 신각의 승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사람을 뒤쫓도록 했으나 이미 선전관의 손에 신각이 죽은 후였다."

 

_ 유성룡, 김흥식 옮김, [징비록], 79쪽

 

임진왜란 때 우리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적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위기 대처 능력 부재에 있었던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임금부터 조정의 신하들과 전국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왜적을 막는 데 집중했더라면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왜적을 막는 데 집중함으로써 피해와 손실을 극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신각은 용맹하고 청렴한 무관이었고, 여러 가지 공도 세운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아무 죄도 없이 무능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관리의 무고를 받아 죽었던 것이다.

 

이렇게 왜적을 막아내는 데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에 분산이 되자 국력은 더 약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100년에 걸친 태평성대가 우리 백성들과 관리들로 하여금 전쟁을 잊게 했고,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게 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니, 모두 우왕좌왕하다가 혼비백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일 위층인 임금부터 아래층 백성까지 확고한 원칙과 신념과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나약했고, 무지했고, 어리석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나약하지 않았고, 무지하지 않았고, 어리석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역시 남달랐다. 이순신 장군의 남다름과 비범함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던 대목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3. 10:35

 

평균수명 8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평생 적어도 40년은 일을 해야 한다. 대개 20대 중후반에서 60대 후반까지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셈이다. 그래도 남은 노년이 20년 이상이나 된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를 살게 될 우리 자녀들은 과연 평생 몇 년이나 일을 해야 노후를 무사히 보내게 될까? 아마 부모 세대보다도 최소한 10년은 더 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적어도 50년간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자녀가 직업(진로)을 선택하는 일은 그 자녀의 인생의 절반, 황금기의 전체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인식도 없이 오로지 당장 레벨이 좀 더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데만 목을 매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른바 남들이 알아주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의 보람과 자랑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방치하거나 깨닫지도 못한 채로.

 

인생의 목적이 대학일 수는 없다. 남들이 알아주는 일시적인 과시일 수도 없다. 어떤 직장이나 직업 자체일 수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이자 과정일 뿐이다. 인생의 목적이 서야 비로소 그 적절한 수단들을 조합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네 부모들은 대부분 자녀들의 인생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수단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선후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버릇이나 예의가 없어도 괘념치 않고, 오로지 부와 명성만을 거머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 뿐이다.

 

인생의 목표 또는 목적이 먼저 서야 평생 후회하지 않고 종사할 직업을 찾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다. 의사나 변호사가 안정된 직업에다 명예도 높고 돈을 많이 번다니까 다들 법대나 의대를 보내느라 난리다. 재벌 대기업에 취직하기 유리한 명문 경상대학에 보내느라 혈안이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시나 변호사에 관심은 있는지, 조직생활에 맞기는 한지, 다른 더 특출한 재능은 있는지 하는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나 딱 맞는 일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일단 되어 놓고 거기에 맞춰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한다. 너도 사회에 나가 철이 들면 부모 말이 옳다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열변한다.

 

그러나 진정 당신의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은 잠시 멈추고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우리 부모들에게 혜민 스님이 전하는 말 한마디만 음미해보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노후에 고생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직 오래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노후 30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 같다. 그러니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보며 아이의 장래를 결정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당장 중간고사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몇 백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_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나라 학사체계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과/문과로 구분해 진로의 큰 줄기가 갈라진다. 대다수가 대학 전공도 자신의 적성을 모른 채 결정하는 현실에서 고등학교 2학년부터 진로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과/문과의 구분 자체가 학문적으로 모호하다는 점은 놔두고라도 불합리한 일이다. 자신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대학 진학에 이과가 유리한지 문과가 유리한지를 따져서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자신의 적성과 진로가 아니라 대입에의 유리/불리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이과/문과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교육현장에서의 실태가 이러한데도 이 오래 묵은 '고2 문과/이과 선택'제도는 여전히 건재하고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이 제도 앞에서 막막했다. 이때 나는 누구에게서도 이과와 문과의 명확한 차이를 듣지 못했다. 더욱이 내가 어떤 부분에 재능이 있는지,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진로에 대한 어떤 방향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이과를 선택했다. 왜 이과를 선택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이과를 선택했으니 대학 전공 역시 자연계열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수능을 보고 점수에 맞는 학과를 고르다 보니 생물학과를 선택했다. 생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관련 분야에 취업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취업준비도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먼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생활하며 느낀 것이지만 필자는 자연계열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이다. 생물학자가 되지 않는 한 생물학이 내 사회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생물학을 전공했다고 하니까 여자친구가 툭 하면 "자기야, 저 꽃 이름이 뭐야?" "저 나무 이름은 뭐야?" 하며 물어대는 통에 진땀만 빼야 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그랬다. '너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알겠니?'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다시 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내가 어떤 것에 재능이 있고, 호기심이 깊고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도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그 배움의 황금기를 내게 맞는, 그러니까 내 꿈(인생의 목표)과 직결된 분야를 공부하며 보냈다면 지금의 나의 삶이 훨씬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나는 내 아이들만큼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이들이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중학교 1학년생이 고교생이 되는 2018년부터 고교에서 문과/이과 계열 구분이 사라지는 등 교육과정이 개편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정권교체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 교육부장관이 바뀌면 또 바뀐다. "교육 백년대계"는 말뿐으로, 현실은 오년대계도 못된다. 이것이 교육을 망치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공계 출신의 취업이 힘들어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이미 수년 전부터 상황이 역전되었다. 취업시장에서 이공계 출신이 각광받는 가운데 인문계 출신은 갈 데가 없어진 것이다. 대학에서는 인문 관련 강의가 속속 폐강되고 있고, 관련 학과마저 정원이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폐지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인문 관련 출판시장도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이는 산업지도의 변화에서 비롯한 지각변동이다. 먼저 새로운 일자리 자체가 이공계 분야를 중심으로 파생, 확산되고 있는 반면 인문계 분야의 일자리는 빠르게 축소되고 있는 추세다. 또 주로 인문계 전공자들의 일자리였던 기획, 관리, 마케팅 분야가 고도로 자동화됨으로써 채용 인원 또한 대폭 줄어들며 이공계 출신들도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장 인문계 자원은 남아서 넘쳐나는 가운데 이공계 자원은 없어서 못 뽑는다고 기업들이 아우성이니, 앞으로 이공계 쏠림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문학의 융성 없이는 과학의 발전도 한계에 직면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인류문명 발달의 원천은 인문학에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바다. 그래서 걱정이다.

 

취업 포털사이트 인크루트는 대학 4학년 졸업예정자 3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6명이 여전히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중 절반이 진로를 정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진로를 정한 4명은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서 진로를 정했을까? 그중 절반 이상이 적성과 흥미에 상관없이(혹은 모른 채로) 진로를 정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을 앞둔 청년들 절반 이상이 그때껏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교생으로 내려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도 모른 채 학과를 선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더구나 일단 좀 더 레벨이 높은 대학에 들어가고 보자는 식의 입시경쟁이 만연한 가운데 설령 자신의 적성과 소질이 뭔지를 안다 한들 그런 것이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현실이니, 이래저래 우리의 교육은 아이들의 적성이나 소질과는 거의 무관하게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타고 갈 인생 버스의 종점을 SKY로 생각한 부모들의 욕심과 착각이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대학입시에서 전공학과보다는 대학의 레벨을 우선해온 관행은 역사가 깊다. 우리 사회의 보여주기식 성과주의의 폐해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한 선배는 지방 명문고 출신인데, 어느 술자리에서 고3 때 대학입시에 얽힌 비극을 전했다. 그때도 학교의 평판이나 교사의 능력이 서울대를 비롯한 SKY에 몇 명 보내느냐로 가름되었는데 특히 학력고사 300점 이상 몇 몇, 서울대 진학 몇 몇은 전국 고등학교 랭킹을 매기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담임선생님들이 '서울대 많이 보내기'를 진학지도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원래 의대에 뜻이 있어 점수에 맞춰 Y대 의대에 가려는 학생을 강압하여 서울대 수의과대로 보내고, K대 경영대학에 가려는 학생을 강압하여 서울대 농대에 보내는 식으로 서울대 진학률을 2퍼센트나 더 올린 결과 그해 전국 톱을 차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강압에 의해 서울대에 간 그 학생들 대부분이 결국 휴학이나 자퇴를 하고 다시 대입을 치러 이듬해 자신이 원하는 학과를 찾아 갔다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요즘에는 이런 식의 강압은 없을지 모르지만 대학의 레벨에 우선순위를 두고 점수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는 짜 맞추기는 여전하다. 자신의 적성이나 소질에 따른 인생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입이 끝나면 많은 학생들이 노량진 고시학원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전공은 전공일 뿐 자신의 진로와 무관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고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전공을 전혀 살리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기업에서도 신입사원을 뽑으면서 무슨 전공을 했으니 업무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대학은 소질을 계발하고 전공을 연마하는 장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위한 간판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연고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좀처런 개선되기 힘들 것이다.

 

전국 초중고 교장, 교감의 97%가 '학교현장에서 노동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교육은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행위 또는 그 과정" 이라 정의된다.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주는 것이다.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의 활용을 통한 사회적 기여다.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교육은 장기간 이루어지고 있지만, 익힌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장에 대한 교육은 전무한 실정이다.

 

성년인 대학생들조차 대부분 직업의식과 직업관이 바로 서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취업한 뒤에 대부분 새롭게 가르쳐야 한다. 김정일 교수(한국노동교육원)의 조사에 따르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야 할 노동교육으로 직업의식과 직업관(39.7%)이 꼽혔고 노동의 가치관과 윤리(35.7%), 노동문제의 이해와 해결(9.0%), 노사관계의 특징과 본질(7.9%)이 뒤를 이었다.

 

필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 싶다. 적잖은 이들이 직업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정보 없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야 다급한 마음에 직장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희망하는 직업을 선정해 놓고 그 직업에 필요한 계발을 꾸준히 실행하여 그 직업을 실현할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아니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먼저 직업을 정하고 그에 맞춰 직장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직업 선택 기준은 사회 통념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의 규모, 연봉과 복지, 안정성 등 몇몇 통념이 대다수에게 기준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제각기 기질과 역량(소질)이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통념만으로 개개인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장 큰 모순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고 일할 장소를 선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업관을 갖고 일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무리다.

 

미국과 덴마크의 경우,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 내 진로지도 프로그램을 통해 직업 탐색, 진로 계획에 대한 교육을 하고, 개인별 진로계획 기록부를 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학생의 진로 선택을 위한 정보를 제공, 판단, 권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 많은 선진국들이 중등기간 중 직업현장 체험을 의무화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04년 9월부터 14~16세 모든 학생들이 '일 관련학습'을 경험해야 하는 것을 법률상 필수요건으로 규정했다. '일 관련학습'은 일에 관한 체험을 통한 학습, 일 또는 직업 활동에 관한 학습, 일에 필요한 스킬의 학습 등 일과 일에 유용한 지식, 스킬, 이해를 개발하기 위해 일과 관련된 상황을 이용하는 계획된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들이 일을 통해 배우고, 일에 관해 배우며, 일을 위해 배울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핀란드는 '직업생활 소개기간 TET'을 교육과정 일부로 두어 8~9학년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실제 작업현장에서의 직업생활에 관한 경험을 갖게 하고 있다.

 

프랑스는 교과과정을 통해 '발견 과정', '직업세계 발견'과 같은 교과목을 학습하고, 비 교과과정을 통해 '기업체 견학활동'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 독일은 지역고용안정센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학생들에게 진로상담을 제공하거나, 현장실습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고, 덴마크는 7~9학년 학생에게 의무교육 기간 이외 1~2주 가량의 직업체험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 비전진로교육 연구소 김희수,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로정보센터 진미석 선임연구위원, 인용 및 재조합)

 

우리나라도 최소한 초등학교에서 이런 직업교육과 경제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공부만 하라고 하는 방식으로는 창의적인 인재, 주체적인 인간을 육성할 수 없다. 이론적인 지식과 실용적인 지식을 병행할 때 비로소 교육의 본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우리 아이 진로 찾아주기, 오평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21:19

 

기록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독서 고수인 율곡 이이는 다독보다는 숙독을 강조했다. 그가 남긴 [격몽요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한 가지 책을 습득하여 그 뜻을 모두 알아서 완전히 통달하고 의문이 없게 된 다음에야 다른 책을 읽을 것이요, 많은 책을 읽어서 많이 얻기를 탐내어 부산하게 이것저것 읽지 말아야 한다." _ 이이, [격몽요결] 중에서

 

하지만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와 현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독서법도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목적에 따라, 심지어 책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조선 시대에 대부분의 선비들이 선호한 독서법은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책을 읽어 뜻을 완전하게 통달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독서백편의자현'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 번 읽으면 뜻을 자연히 알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하루에도 한국에서만 200여 권의 책이 출간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200여 권의 책은 과거에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의식과 패러다임과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는 책들이라는 점이다.

 

조선 시대에는 책이 많이 있지 않았고, 한 권의 책을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고가였다.

 

우리의 선조 중에 가장 많은 책을 집필한 혜강 최한기 선생은 매우 부자였지만, 책을 너무 좋아해서 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책은 모두 구입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 부자였던 최한기 선생은 가난해졌다고 한다. 그 정도로 책이 고가였던 것이다.

 

현대는 인쇄술과 기술이 발달해서 한 권의 책값이 영화 한 편 보는 것보다 약간 비싼 정도이다. 책을 아무리 많이 구입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부자가 가난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또 조선 시대에는 지식의 폭발 정도가 매우 느렸다. 하지만 요즘은 몇 년만 지나면 인류의 지식과 정보의 총합을 두세 배 이상 뛰어넘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한마디로 지식과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조선 선비들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 중에서도 중국에서 나온 책만 읽으면 되었다고 말한다면, 지금 우리들은 과거의 고전 중에서도 서양에서 나온 고전, 미국에서 생겨난 고전, 그리고 현대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검증이 안 되었지만 고전의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명저들 까지 읽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와 시대적 변화 때문에 다양한 책들을 읽는 것, 즉 다독하는 것을 필자는 추천하고 있다.

 

창조성이란 결국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고 엮고 조합하는 것에서 발휘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질적인 생각과 의식에 접해야 한다.

 

발전과 성장을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수용과 모방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양의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질적 전환이 일어나 새로운 이론과 견해, 가설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인류의 모든 학문과 사상은 발전을 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사항은 다양하고 풍부한 양적 수용과 모방인 것이다. 에디슨이 최고의 발명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전쟁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것이고,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아기 이전에 문신으로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도 위대한 혁신가임에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스티브 잡스보다도 세종대왕이 더 위대한 혁신가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에 수천 명의 위대한 학자들이 평생을 투자해도 새로운 글자를 하나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세계의 모든 언어학자들이 찬양하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인 한글을 창조했다.

 

이것만큼 더 큰 혁신은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독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그 당시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부자였고, 최고의 정상에서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과거 시험을 쳐야 하는 선비들보다 더 열심히 더 지독하게 책을 읽고 또 읽었던 위인인 것이다.

 

세종대왕의 모든 창조성과 유연성과 리더십과 백성 사랑은 바로 책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20:11

 

조선조 최고의 학자, 한국 최대의 실학자,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던 다산 정약용은 필자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다. 책을 통해 필자는 그에게서 배우고 또 배웠다. 평생 배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 독서법이다.

 

오래 전 위인들의 삶을 책을 통해 접하고, 책을 통해 매일 배우고, 가르침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 독서법은 학생이 스승에게 매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그 배움대로 집에 와서 실천하고, 사회에 나가서 행동하고, 직장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은 고전 독서법이 어디 있을까?

 

바로 이런 고전 독서법이 결국 조선조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이 실천한 실학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고전은 실학자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방대한 글을 남긴 조선조 최고의 학자이며, 삶과 학문이 나누어지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그래서 필자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그 당시 정약용을 억압하고, 유배를 보낸 세도가들은 이름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자손손 오래도록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다산은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마흔의 나이에 정계에서 쫓겨나게 되고,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말이 유배 생활이지 가난과 결핍으로 점철된 혹독한 세월이다. 물리적인 환경보다 더 혹독한 것은 정신적인 환경일 것이다.

 

시쳇말로 잘 나가다가 그만 망하게 되고, 주 활동무대인 세상에서 쫓겨나 시골로 귀양을 가게 되면, 더 이상 삶의 희망도, 미련도, 열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3년 안에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하던 사람들이 정년 퇴직을 하게 되면, 갑자기 병이 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다. 매일 출근해서 갈 곳이 있고, 자신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해 주고, 강하게 해 주지만, 정년 퇴직을 하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나이도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

유배지로 귀양을 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건강만 챙겨도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다산 선생은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마치 유배 생활을 40세부터 18년 동안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할 정도로 유배 생활이 그의 인생의 최고의 전성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 관리와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다산 정약용 선생을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토록 가난하고 결핍되고 혹독한 세월을 그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로 반전시킬 수 있었던 힘은 결국 붓과 책이었다.

 

그가 독서와 집필을 통해 귀양을 오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책을 읽고, 방대한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배 생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1년 365일 그에게 허락된 것은 유배지에서의 기거일 뿐이다. 여행도, 휴가도, 취미 생활도, 친구나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다산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다산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그의 놀라운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고전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다산처럼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산이 강조한 독서법은 먼저 바탕을 세우는 독서법이다.

 

"독서에는 반드시 바탕을 먼저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두려면 반드시 바탕을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효도와 공경이 바로 그것이다. 모름지기 효도와 공경에 먼저 힘써 바탕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몸에 베게 된다. 학문이 몸에 배면 독서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효도와 공경이라는 바탕을 세우면, 학문이 몸에 배게 되고, 독서는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효도와 공경은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마음이다. 즉, 독서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필자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3년 동안 다양한 독서법으로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하면서 처음 6개월 동안은 정말 바탕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 낭비식의 독서를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렇다. 6개월 동안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지만, 그것은 모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독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점차 독서라는 것이 제대로 되기 시작했고, 점차 독서력의 엄청난 도약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6개월 전과 후의 차이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바탕이다.

그 당시의 6개월 전에는 그저 마음 관리 없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6개월 이후부터 마음 관리를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6개월 후 부터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수한 열정, 순전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공경하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비우고, 낮추는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서의 기술도 달라졌다. 하지만 독서의 기술, 독서의 방법이 달라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독서를 하는 필자의 마음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산의 말처럼, 바탕을 세우자, 마음이 달라졌고, 마음이 달라지자, 독서의 방법과 기술도 달라졌다. 그러자 알게 모르게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과 점차 닮아졌고, 학문하는 이유와 세상에 대한 세계관과 철학관이 다산을 닮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다산처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500권을 집필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필자도 다산처럼 닮아지게 되자, 2년 동안 45권의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집필하는 것은 출간하는 것보다 쉽다. 출간을 하기 위해서는 집필된 원고를 다듬고, 편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추 다산 선생의 집필 양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다산 선생의 독서력이 필자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그의 다른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보통 그는 백 권의 책을 열흘 만에 독파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필자는 보통 하루에 열 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읽는다기 보다는 독파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산처럼 읽고, 쓰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런데 평범했던 필자가 위대한 조선조 최고의 학자와 비슷하게 닮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전 독서의 위력이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고전 독서의 힘인 것이다.

 

자기계발서만 읽었다면, 벤츠를 사고, 부자가 되고, 성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산물이 아닐까?

 

인문 고전을 읽었기 때문에 필자는 다산 정약용, 세종대왕처럼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 분들의 발꿈치도 쫓아가지 못했지만, 평생 노력하고 독서에 매진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산이 쓴 많은 책들 중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책들도 있다. [소학주관]이라는 책이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을 보면, 독서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지금 내가 슬슬주 1만 섬을 얻었다 하더라도 꿰미로 꿰지 않으면 어디 간들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요즘 학문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구경과 구류 백가에 나오는 수많은 책의 이름과 항목들이 모두 슬슬주다. 이것을 꿰미로 꿰지 않는다면 이 또한 얻는대로 곧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정약용 선생은 독서를 해도, 반드시 정리하고 요약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야 자신의 것으로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필자가 쓴 독서법 책인 초의식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서 독서법과 의식 독서법을 합하여 초의식 독서법이라고 필자는 명명한 바 있다. 여기서 초서 독서법은 책을 눈으로만 보면 읽는 대로 곧 잃어버리게 되는 문제점을 개선한 독서법이다.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 새롭게 생긴 생각들과 주견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필기하고, 요약하면서 책을 읽는 방법이 바로 초서 독서법이다. 여기에 의식 독서법은 책을 읽을 때 마음을 먼저 집중하고, 마음을 관리하면서 책을 읽는 독서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탕을 먼저 세우고 독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필자가 쓴 세 번째 독서법 책인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독서법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고, 그것을 현대식으로 바꾸어, 현대의 독자들이 자신의 독서력이 초급이든, 중급이든, 고급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준에 맞게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제 사례를 들어 풀어 써 준 현대식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눈으로만 읽으려고 하는 것은 자만이다. 왜냐하면 눈으로만 읽어서는 절대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의 말대로 얻는 대로 곧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반드시 꿰어야만 가치 있는 보석이 되는 법이다. 고전 독서도 바로 이와 같다. 한두 번 눈으로만 읽고 그 책의 진짜 가치를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그래서 고전 독서법으로 지금까지 그나마 유행했던 것이 토론 독서법인 것이다. 하지만 토론 독서법을 하기 위해서는 함께 토론해 줄 친구들, 사람들이 필요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양의 고전 독서를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 독서법보다는 초서 독서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이다. 필자가 토론 독서법보다 초서 독서법을 추천하는 이유는 또 있다.

 

토론 독서법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활 방식이 다른 것이 너무 많다. 생활 방식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연히 지역적인 환경과 생활환경의 차이로 사고 방식도 다르다. 그런 것들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영향을 주어, 결국 DNA가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세계 그 어떤 나라 백성들보다 음주가무에 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K-POP이 전 세계를 사로잡는 이유가 한국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DNA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인과 서양인들의 가장 큰 차이는 사고 방식과 사고 프레임의 차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문과 책들을 통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차이점 중의 하나가 서양인들은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할 때 사고력이 향상된다는 것과 이와 반대로, 동양인들은 혼자서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글씨를 쓸 때 사고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식 수업, 토론식 독서법은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에게 최적화된 독서법이고 수업이다.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는 동양인들에게 맞는 독서법을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필자가 교육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필자는 교육학 학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방대한 책을 통한 지식과 이론적 근거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로 독서력의 도약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초서 독서법을 통해 가장 큰 도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필자가 혼자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토론 독서법보다 초서 독서법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종대왕, 모택동, 다산 선생, 정조, 박지원 등 많은 위인들이 초서를 통해, 즉 붓을 들고 쓰는 독서법을 통해 위대한 도약을 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모택동이 위대한 중국 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남다른 독서법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위대한 말을 보면 곧 알게 된다.

 

"붓을 들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모택동은 누구보다도 더 붓을 들고 쓰면서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은 또 어떤가? 백 번 읽고 백 번 쓰는 독서법인 백독백습을 실천했고, 항상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고전은 다산처럼 읽어라는 것이다. 다산은 초서 독서법으로 고전을 구슬처럼 꿰었다. 그래서 고전의 가치를 극대화 시킬 줄 알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18:58

 

독서의 참된 정의는 읽기가 아니라 생각하기이다.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하기가 결여된 빨리 읽기 방법인 속독법을 독서법이 아니라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독서는 사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독서의 정의다. 마음속에 반드시 새겨야 할 것 같다. 독서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면 독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은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다. 바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칸트는 [프롤레고메나]에서 형이상학은 이성을 위한 하나의 도야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도야된 인간의 이성은 인류 공동체에게 훌륭한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가 독서 혁명 프로젝트를 할 때 참여하신 분들에게 4주 동안 전수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독서에 대한 의식 변화다.

 

이번에는 숭실대학교와 문학동네 아템포가 후원을 아낌없이 해 주어, 멋진 숭실대학교에서 4주 동안 '독서 혁명 프로젝트2기' 과정이 열렸다. 부산, 여수, 울산, 대구, 대전 할 것 없이 매주 토요일 마다 숭실대학교 캠퍼스는 전국에서 독서 혁명 프로젝트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독서 혁명 프로젝트 라는 독서법 수업에 왜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멀리서 비싼 수강료를 내고, 그것도 매주 적지 않은 차비와 시간을 투자해서 오는 것일까?

 

멀리서 오는 사람 중에는 여수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지금까지 4천 권의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이렇게 독서에 대해 많은 경험과 독서력도 상당한 수준의 사람이 왜 독서 혁명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일까?

 

물론 많은 참여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가장 큰 목적은 '4주 만에 독서 천재로 도약'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4주 만에 독서 천재로 도약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한 페이지가 통으로 읽히게 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 번에 다섯 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라. 하루 열 시간 독서를 꼬박 해도 한 권도 다 읽지 못했던 사람들이 4주 동안의 독서 혁명 프로젝트에서 실시하는 독서 스킬 향상 프로그램을 통해 하루 열 시간 독서를 하면 최소한 다섯 권에서 열 권 이상의 책을 독파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단 기간에 도약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 가서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세계 최강의 독서 스킬 향상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독서 혁명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이렇게 속독하고 통독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성과는 독서를 통해 '깊은 생각, 넓은 생각, 높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의식을 완전하게 바꾸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한 옛 선인들의 말이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고, 지식만 주입하면 독서는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 그것도 타인에게, 세상에게 큰 해를 끼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지식이 없는 착한 사람은 타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지식이 있는 악한 사람은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지식도 있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간 독서를 했다면 최소한 십분의 일은 생각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고 비판하고 취사선택하고 융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나가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가서 많이 생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는 그런 책이 좋은 책임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작가나 영웅이나 박사라고 해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자만이다. 어떤 위대한 작가도 정답을 알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답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답이 있는 그런 책은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고전의 위대함은 정답이 없고, 위대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어라는 것이다. 고전은 기본적으로 많이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고전을 가까이 하는 자는 조급하거나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진 상태에서 벗어나 느긋해 질 수 있고, 많은 위기 상황에서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고전의 위력인 것이다. 고전을 가까이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위기 상황 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인 것이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17:59

 

나이가 들어가면서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실험 결과를 보면 창의성을 기른다는 말은 모순인 것 같다. 오히려 창의성을 유지하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와 토론, 프로젝트 수업, 체험활동, 그리고 진로와 관련된 경험 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본질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능력은 창의성의 기초가 되는 비판적 사고로부터 출발하며 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얻어진다.

 

독서의 목표 또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서 비판적 사고를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교육은 창의성을 기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동서고금의 명저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게 되고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보다 성숙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명저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비판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과정을 겪으면서 성숙한 지성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 특히 인쇄술의 발전 이후 정보나 지식의 전달이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정보를 유통하고 지식을 재생산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매체가 존재하니 독서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매체가 다양한 정보를 쏟아냄에 따라 오히려 제대로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보유통의 걸림돌이 생기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이런 신매체들은 즉각적이고 쉽게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파급력과 영향력이 매우 크므로 이런 매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모티머 J. 애들러, <독서의 기술>, 범우사, 2011)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 등을 통해 사람들은 교묘한 설득에서부터 신중하게 선별된 정보와 통계에 이르기까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자료들을 제공받는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찌나 효과적으로 포장되어 있는지 시청자나 독자들은 그 의견을 그대로 자신의 사고 속에 주입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즉각 그대로 재생시킨다는 게 문제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게 위험하다. 생각이 없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로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이 전달하는 정보나 지식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떠한 매체에서 얻은 정보든 그것을 제대로 읽고 재해석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독서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요즘 제대로 된 독서를 위해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독서토론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독서는 자신과 저자와의 대화이다. 책을 읽는 것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저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자신의 주체적 사고로 재정리하는 것이다. 이때 독서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데 독서란 혼자서 하는 행위라 주관적인 지식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다양한 주장을 담은 책들을 고루 읽음으로써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거나 오류에 빠지는 것을 최소화할 수는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독서는 토론과 함께해야 온전해진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생각을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아집에 갇히는 것을 피할 수 있고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함께 의미를 탐구하면서 책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토론이 중요한 이유는 좋은 토론을 통해서 소통과 협력, 다른 것을 인정하는 자세 등 민주시민적 가치까지 습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에서 토론을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전 세계 인구의 0.25%도 안 되는 유대인이 전 세계 노벨상 수상자를 20% 이상 배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유를 그들의 독특한 교육법인 하브루타에서 찾고 있는데, 이 교육의 핵심은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를 읽고 정답이 없는 문제로 토론하는 것이다.

 

독서, 하면 역시나 유태인 출신인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수학때문에 낙제를 한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인문고전 독서광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서 특허청 말단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매일 저녁 인문고전독서클럽을 운영하였다. 수학을 못하면서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직관력을 가졌던 그의 힘은 바로 독서와 토론으로 부터 나왔음을 스스로도 강조하였다. 또 한 사람의 과학자 레더포드도 독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독서와 더불어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생각 없이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 외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훌륭한 인문고전 독서가였다는 사실은 독서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독서가 좋다고 해도 잘못 읽으면 독이 된다. 그래서 독서교육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겉핥기식의 독서이다. 한 권을 읽더라도 깊게 제대로 읽어야 한다. 독서는 여행과 같다. 해외여행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에는 한 번 해외에 나가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그래서 한 번 나간 김에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찍고 오기'라고 불리는 이런 여행에서는 갔다 왔다는 자랑거리 외에는 별로 얻는 것이 없다. 여행을 하는 진짜 목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아침독서나 독서록 같은 것에 찬성하기가 어렵다. 독서프로그램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많이 이루어지는데 대게 다독을 강조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이렇게 다독으로 아이들을 경쟁시키다 보니 한 아이가 6년 동안 수천 권의 책을 읽는 일이 벌어진다. 대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용의 이해보다는 빨리 읽는 것에만 매달리게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책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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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독서교육의 사례를 한 번 생각해보자.

EBS 다큐프라임에 소개된 경기도의 모 초등학교의 사례인데 딱 한 권의 책으로 5학년 국어수업을 일 년간 진행한 사례가 있다. 이런 수업이 나오게 된 것은 아마도 경기도교육청에서 명저를 수업에 직접 활용하는 교육을 강조한 것이 배경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 권의 책을 정해서 그것을 일 년 수업의 교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책이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이 수업에서는 책을 천천히 다 같이 읽으면서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내용을 파악하다 보니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어휘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정확히 뜻을 이해한 후 넘어간다. 국어교과의 목표인 어휘습득, 내용파악 등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책 한 권만으로 수업을 하면 교육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까 우려하는 교사나 학부모들에게 충분한 답이 될 듯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책에 나오는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토론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나와 다른 다양한 생각을 접하게 되어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이 수업은 책에 나오는 나무를 학교 주변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책에 기술된 생활이나 문화와 자신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다른 과목의 교육목표까지 포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통합교과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을 아이들이 문단을 나누어서 글과 삽화로 표현하는 과정도 있는데, 이렇게 삽화로 표현하려면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므로 아이들은 내용을 깊게 생각하게 되고 창의성을 키우게 된다. 책 한 권으로 국어수업을 진행하지만 과학, 음악, 미술, 사회, 역사까지 섭렵하면서 아이들은 분리된 지식의 벽을 넘어 통합적 사고가 가능해지고 통찰력이 생긴다. 이런 사례를 보고 국어교과서라서 책 한 권으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상력의 문제이다. 다른 과목도 책을 활용해서 수업이 가능하다. 같은 어학과목인 영어는 물론이고 사회, 역사 등의 과목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과학과목의 경우도 일부 단원의 경우 시도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수업은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생긴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스스로 알아가는 즐거움을 얻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수업이 가능하려면 교사들의 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교과서를 이용하면 지도서에 따라서 단계별로 진행하면 되지만 이런 수업에서는 교사가 새롭게 모든 것을 기획해야 하며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사는 몇 번씩 책을 읽고 다양한 방법으로 학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목표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교사의 이런 노력은 아이들에게 다른 수업에서 기대할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신안산대학교 부교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4. 21:04

 

국가적으로도 창조경제를 외치고 창의융합이니 창의인성이니 하면서 입만 열면 창의성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창의성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창의성이란 것이 창의성을 기르는 훈련을 하면 생겨나는 것인지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간단하게 '창의적인 생각이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다른 생각은 어떻게 나오게 될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열심히 잘 듣고 암기하려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머리에서 나올까? 일 년 내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적막이 감도는 엄숙한 교실에서 나올까?

 

다른 생각은 다르게 보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외국의 한 학교 - 아마 발도로프 계열의 학교일 것이다. - 에서는 예술 수업을 강조하는데 특히 미술 수업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교의 미술시간은 여러 가지 재미있고 특이한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물을 관찰하고 그리는 수업 장면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사물을 한 가운데에 두고 아이들이 뺑 둘러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었다. 그게 뭐 그리 특별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특별한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은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사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그리는 아이들의 그림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의 모습만을 그리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아이들이 보는 모습을 그릴 수 없다.

 

이런 수업이 왜 중요할까? 이 수업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전체로 투영되어서 모든 사물과 현상에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며 다른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각이 도움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 반드시 다른 시각이 있어야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수업이 놀라운 수업이라는 것이다. 교사는 미술 수업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라든지 협력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배우고 협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백 번의 말보다 교과서에 담긴 어떤 내용보다도 이런 자연스러운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이 더욱 강하게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창의적인 생각을 기르기 위해 다른 시각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당연한 것에도 의문을 갖는 것이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상식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전문가가 이미 결론을 내놓은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말이다.

 

우리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업적은 바로 이런 의문을 갖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면서도 실제로 자기 스스로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가? 무거운 것과 물은 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 지금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사실들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의심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해치는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우리의 학교에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고 독특한 호기심을 발하는 아이들이 문제아 취급을 받는 것처럼, 뛰어난 인물들도 그 시대에는 고난을 당하기도 했으니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이렇게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과 질문을 던지는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나온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학습방법으로는 길러지기 힘든 배움의 자세이다. 지식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일 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출발은 비판적인 사고에서 시작된다. 그럼 비판적 사고는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북돋아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는 세상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나온다. 부모나 선생님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 중에 하나가 "원래 그래." 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는 듯하다.

 

인간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햇빛이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에 흥분하지 않을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래." 라는 한 마디로 아이들의 사고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지적 폭력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아이들은 마침내 깨닫게 된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것을. 몇 번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 날아오는 것은 짜증 섞인 어른들의 반응뿐이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돌아오는 것은 문제아라는 낙인뿐이다. 이런 문화가 우리 아이들을 교실에서 질문이 없는 아이들로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만이 정답인 학교에서 다른 생각은 불이익을 가져올 뿐이다. 정작 교과서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사고의 단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사실 교과서란 모든 지식을 해체해서 뼈대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국가가 아이들을 교육할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만든 후 거기에 필요한 지식들을 제시하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교과서이다. 따라서 이것이 절대화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교과서 시대를 너무 오래 거친 탓에 교과서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교과서에 기초한다는 말이 교과서만 들입다 외우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식이란 교과서이든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것이든 그것을 기초로 다양한 자료와 내용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대단히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많아서 그것 자체가 진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에서조차 기존의 주장이 뒤집히는 기막힌 일들이 생기지 않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우롱해왔던 천동설이었고, 최근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심각한 도전에 빠지기도 했었다. 물론 오류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아인슈타인이라는 대물리학자의 권위에 의문을 갖고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그 탐구정신이 어쩌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를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지식과 업적에까지 도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온 것이다. 하물며 다양한 주장과 불완전한 사실을 다루는 교실이라면 더 많은 도전이 있어야 할 일이다. 더 많은 의문을 갖도록 부추기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제대로 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지식의 불완전성과 객관이라는 가치의 허약한 실체를 제대로 이해시킬 때 사물이나 현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양한 가치와 다른 시각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도, 지식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사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교실에서 멍하게 공상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깐족거리면서 "왜요?"를 반복하는 아이들에게 꿀밤과 고함을 안기기보다는 그 아이가 정말 훌륭한 아이가 될 것이라는 기대의 눈빛을 보내라고 이야기한다.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말썽피우지 않는 아이가 편하고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 따르는 아이가 예뻐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열망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일 수 있다. 주어진 질서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 일반적으로 사회와 학교 시스템이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아이들이 바로 이런 부류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다루기 힘들고 때로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자기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고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의문이 자신의 자제력을 이겨버리는 그런 아이들이 종종 더 대단한 성취를 거두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사례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으로 꼽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인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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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으로 유명한 케네디 가에서 촉망받던 아이는 전쟁 중 전사한 케네디의 맏형인 조셉이었다. 형 조셉과 함께 사립명문학교인 초트스쿨을 다녔지만 늘 말썽만 일삼던 케네디는 경쟁상대로 생각했던 형이 졸업하자마자 전혀 다른 학생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트스쿨 교장이 케네디의 아버지에게 보낸 다음 편지글은 케네디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잭(케네디 대통령의 애칭)은 명민하고 개성이 뚜렷한 개인주의 성향의 소유자입니다. 형인 조와 달리 마구를 채우기 힘든 야생마 같은 심성이 있습니다. 잭에게는 천부적으로 독자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또 기지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는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잭 같은 학생에게는 적응과 조정과 성장의 기간을 참작해야 합니다. 평범한 모범생의 심성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교사나 부모들의 골치를 썩이는 경우가 훨씬 적습니다만, 결국에는 잭 같은 아이가 더 흥미 있고 더 보람찬 성과를 얻게 되기 마련입니다."(최효찬, <세계명문가의 독서교육>)

 

꼴통 같은 녀석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겠지만 한 호흡만 가다듬고 그 내면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그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길 만한 엄청난 일들을 해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으로 파고들다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큰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행복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런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행복한 일이라면 그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하게 되고 그럴 때 놀라운 성과를 만들게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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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비유의 하나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페르마의 정리는 수백 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혀온 난제 중의 난제였다. 수많은 천재수학자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문제이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던진 페르마는 전문 수학자가 아니라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의원이자 지방 판사였다. 수백 년간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이 문제에 도전한 많은 수학자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학적 진전이 있었고 이것은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인류는 한 발씩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일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 위대한 수학자도 페르마가 남긴 세기의 난제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의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오일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낸 수많은 수학적 업적은 우리 인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수학자들의 도전에 발판이 되었고, 마침내 페르마의 정리는 임자를 만나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문제의 도전자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푼다고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느라 수년에서 수십 년을 바치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매달리게 했을까? 그것은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런 보상이나 대가가 없을 때 새로운 생각이나 진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류가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 교훈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그런 교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자신을 평가하는 척도로 생각한다. 그 평가라는 것이 자동차, 집, 연봉등으로 정의되는 능력인데, 이것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정작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가치 없는 일을 좇느라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 기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더 이상 돈이나 지위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게 된다. 돈이나 지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나 지위를 갖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위한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 돈과 자동차, 승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주는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는 것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충만한 에너지가 새로운 생각,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

 

세상과 사물의 한 면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새로운 생각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대가나 보상과 상관없이 집요하게 지식의 본질을 추구하고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 세가지 요소들이 바로 우리 아이들을 창의적인 인간으로 길러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신안산대학교 부교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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