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분명 동양과 비교했을 때 사고 체계가 본질적으로 외향적이다. 자기 표현이 중요하고 언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 발표가 생활화되어 있다. 교실을 벗어난 과목이 더 많고, 활발한 교외 활동을 한 학생에게 높은 성적을 준다. 내향적이고 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설 곳이 많지 않은 생태계다.

 

주목받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곳에서 나는 거침없이 주장하고 표현하는 법을 익혔다. 벼랑 끝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나를 홍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향적 기질을 온 몸에 두른 탓에 주목받고 표현하고, 설득하고 비판하는 것에 온통 길들여진 상태로 고요한 한국의 교실로 돌아왔다. 한국에 오니 친구들은 내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했다. 나의 직설적이고 강한 어투에 상처받았다고 토로했다. 주장이 너무 강해서 다가가기 힘들고 말 붙이기가 무섭다고, 친해지기 힘든 성격이라고 말했다.

 

내향적인 본질을 무시한 채 표면적인 외향적 기질만을 뒤쫓기 바빴던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이도 저도 아닌 성격이 되어 있었다. 나는 국제학교를 다니며 익혀온 나의 습성을 원망했다.

 

서구의 교육 방식이 이상적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계급 사회에 기반한 철저한 능력주의, 그것이 서구식 교육 방식이다. 다르고 독특하면 매도하고 고립시키는 것이 한국의 방식이라면, 비슷하고 특징이 없으면 재능없다고 무시하는 것이 서구의 방식이다. 내향적인 성격은 소수 집단이다. 극히 적은 내향인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아이들은 너드(괴짜, 찌질이)가 될 뿐이다.

 

동양은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한다고 비난받지만, 서양은 다름을 우상 숭배한다. 이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폭력적이다. 개성 강하고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이 강해야 유능한 사람이라는 강박이 학교 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말 없고 홀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강점은 쉽게 주목받지 못했다. 외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위협적인 무기가 있어야 했다 .눈에 드러나는 장기가 있어야 했다.

 

어릴 적 나는 배려하고 공감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신중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어에 '착하다' 라는 말은 없다. '착함'은 능력도 칭찬도 될 수 없다. 착했던 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착함을 지우고 능력과 재능을 택했고, 경청을 없애고 자기 주장을 선택했다. 내향성을 부정하고 외향성을 덕지덕지 붙였다. 경청과 자기 주장을 동시에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향적인 사람들이라고 다 자기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경청하고 존중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외향인의 전형적인 기질을 닮기 위해 나는 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어린 내게 점진적으로 성격을 바꿔갈 여유는 없었다. 배려하면서 동시에 확고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기질적으로 외향인과 내향인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학습법, 인간 관계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다. 정해진 학습법, 문제 해결법은 없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람마다 효율이 극대화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무작정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한다고 훌륭한 교육이 아니다. 책을 읽고 조용히 사유하며 지식을 흡수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공부법을 따라야 한다.

 

질문하지 않는 교실은 답이 없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G20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에 왔을 때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구했다. 개최국인 우리나라에 심심한 감사의 말과 함께 질문의 기회를 선물한다고 했다.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중국 출신 기자가 끼어들었다. 한 다큐멘터리는 이 장면을 전면으로 내세워 질문하지 않는 한국 교육을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과 어색하게 감도는 정적을 화면에 가득 담으며 질문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꼬집었다. 나는 이 장면이 상당히 불쾌했고 수치스러웠다. 질문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도와 개성은 무시한 채 오직 '질문'에만 목을 맨다. 다큐멘터리의 취지와 관계없이 내가 불편함을 느낀 이유는 '질문'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질문을 못하는 환경은 문제가 있지만, 질문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거다. 주변을 의식해 눈치를 보며 질문을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질문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스트레스를 느껴서도 안 된다. 질문을 강요하는 것 또한 질문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폭력이자 차별이 될 수도 있다. 의견을 교환하고 다수가 동의하는 현명한 답을 찾는데 분명 상호 작용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질문의 과정을 통해 정답을 구하는 사람이 있듯, 반대편에는 곰곰히 홀로 생각하며 가만히 스스로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주입식 교육은 비판하면서 서양식 교육 방식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주입식 태도는 왜 방조하는가. 서구식 교육 방식을 맹목적으로 쫓으면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조앤 롤링이 나올까. 학생의 기질과 성향은 외면한 채 우선적으로 서구식 교육 모델부터 주입하며 위인을 기대하는 발상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기업 업무 환경에서도 오픈 스페이스를 앞세워 사무실 칸막이를 없애거나 수직적 상하 관계를 완화한다며 개인 사무실을 지양하는 추세다. 왔다갔다 이동하는 동료들의 발소리, 오며 가며 건네는 잡담 소리, 회의실에서 스며나오는 각종 잡음... 자극을 처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는 내향인들은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다. 자극이 최소화된 공간이야말로 내향인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조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인데 말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적 교실 책상은 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서 얼마든지 골똘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서양은 다르다. 교실 규모가 작아 주목이 불가피하고 책상은 동그랗게 배치해 서로를 마주보게 한다. 끊임없이 상호 교류를 독려한다. 대화와 의견을 주고받고 질문과 공유에 대한 압박을 가한다.

 

나 또한 과거에 질문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토론과 논쟁에 취약한 자신을 꾸짖고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토론의 학업적 성과가 매우 약한 사람도 있다. 발표가 학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사람 또한 분명 있다.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타인의 방식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만큼 자신의 재능을 망치는 건 없다. 사회적으로는 폭력이고 개인적으로는 재능 낭비다.

 

서양의 기준을 정답이라 여겨 그들의 기준에 따라 공부했으나, 무엇을 배우든 공부는 괴로웠다.  공부가 즐거움인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배움을 싫어했다. 내게 맞는 학습법을 찾아 실천하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은 커졌고 공부가 점점 좋아졌다. 무엇보다 학습이 뚜렷한 성과로 이어졌다. 가시적인 결과물의 성취도 또한 질부터 달랐다. 배우는 속도, 지식의 양, 사유의 깊이, 모두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내가 의욕 넘치게 학문에 애착을 가지게 된 이유는 공부하는 시간이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책을 수차계 반복해서 읽고 듣고 필사한다. 또 곱씹어 읽고, 신중하게 사유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로 쓰면서 어느 때보다 많이 배우고 성장했으며 성취했다. 내게는 논쟁보다 독립적 사유 방식이 더 어울리는 학습법이었다. 스펀지처럼 모든 지식을 놀라운 속도로 흡수했고, 성장을 발판으로 공부는 즐거움이 되었다.

 

남다른 패션 스타일을 지니고 독특한 식습관이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학업적 성과를 이룬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정답이 없듯, 학습법도 저마다 다르다. 결과로 증명하면 되고, 성과로 승부하면 된다. 서양의 방식을 쫓기보다, 우리에게 최적화된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을 우직하게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내향인입니다_ 진민영

by 미스터신 2021. 4. 6. 14:38

"항상 감사하라"

이 말씀은 인생을 행복으로 완벽하게 채우는 최고의 명언이다.

승민이는 항상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행복은 마음에 달려 있고, 감정도 선택이 가능하다. 감사의 감정은 매사에 행복을 선택하게 한다.

또한 타인이 승민이에게 감사하게 하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개나 소나 돼지처럼 자신만을 위해 잘 먹고 잘살다가 갈 것인가?

테레사 수녀, 나이팅게일, 슈바이처 박사 등의 인생은 최고로 행복한 인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인류가 인정하고 있는 바다. 봉사, 기부 등은 이타적인 삶으로 높이 평가받기 이전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경험자들이 이야기한다. 타인을 위하는 일, 봉사 등은 해보지 않고는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고.

두 가지 팁을 주겠다.

첫 번째 팁 - 타인을 도울 때, 자산을 뿌리째 뽑아 나누지 말고 열매를 나누면 좋겠다.

물론 이것은 성인군자의 말씀은 아니다. 평범한 인간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뿐이다.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지만, 아버지 마음은 그렇다.

아버지가 존경하는 세계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국제적십자 창시자인 앙리 뒤낭은 모든 자산을 타인에게 나누어준 뒤 파산했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1895년 한 신문기자가 하이덴에서 그를 다시 발견했다. 나중에 노벨 평화상 상금도 모두 기부하였다.

승민이가 앙리 뒤낭이라 가정할 때, 1867년부터 1895년까지 노숙자 정도로 위축되었던, 나누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승민이가 어떤 자산을 소유하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매월의 금액을 가지고 나눔을 베푼다면 나누는 일을 지속할 수 있지만, 자산을 뿌리째 나누어준다면 승민이는 곧바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승민이를 믿고 의지하는 처자식은 무슨 죄란 말인가.

아버지도 한 해 동안 무조건 나누다가 큰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막상 위기에 처하면 세상에서 1원이라도 도움을 받기가 어렵더구나. 그래서 나누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책임 있는 가장이 되기를 바란다. 승민이가 너무 어려서 혹시 혼동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이야기 한다.

일시적으로 나누다가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자산을 뿌리째 뽑아 나누어주면 안 된다. 뿌리는 놔두고 그 열매를 지속적으로 나누길 바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너의 가정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팁 - 사람의 본성은 감사 표현을 하기 힘들게 만들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베푼다면, 절대로 기대하지 말고 베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엄청난 상처를 받을 것이다.

방송인 뽀빠이 이상용 씨는 34년간 567명의 어린이에게 무료로 심장병 수술을 해주었는데, 받을 때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세 사람한테서만 감사 전화를 받았다고 TV에서 인터뷰하였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환자를 고쳐주었지만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유명 형사사건 변호사였던 사무엘 라이 보위츠는 78명의 피고를 사형으로부터 구해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그에게 감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전적인 부분이 관계되면 더더욱 그렇다. 감사해하기보다는 불편해할 가능성이 더 크다.

아버지의 경험상, 베푼 것에 대해 감사의 표현을 받으려 하면 자존심 상해하거나 힘들어할 뿐이더라.

베푸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베풀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시기가 오기도 전에 베풀었다가 많은 충격을 받았다. 승민이는 혹시 그런 경험을 하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속에 산다. 아버지도 많은 사람을 상담해주다 보니 비슷한 경험들을 자주 듣게 된다. 대부분 조카에게 이렇게 베풀었는데, 형제나 친구에게 이렇게 베풀었는데 지금은 이렇다 식의 한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항상 세상과 타인에게 감사하되, 베풀 때는 바라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다.

마흔살 행복한 부자아빠의 특별한 편지_ 아파테이아

by 미스터신 2017. 6. 23. 21:03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렴. 이 편지를 덮고 잠시 생각해봐.

승민이가 지금 생각한 것들은 아마도 다 순위 안에 있을 것 같다.

'가족과 좀더 시간을 보낼것', '일 좀 덜 할걸' 등 많은 게 있지만, 그중에서도 1위는 '내 뜻대로 살걸'이야.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이 부분을 후회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내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승민이도 감지했겠지.

이것은 용기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야. 카렌 와이어트 라는 사람은 수십 년간 환자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관찰했는데, 그가 지켜본 사람들은 임종 때 경이로울 정도로 맑은 정신을 갖고 있었고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해.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놀랍게도 후회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다 하고.

그들이 마지막에 보여준 회한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하는 것이었어.

사람들 대부분 내 뜻대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이야. 내 뜻이 아니라 어머니의 뜻, 아버지의 뜻, 아내의 뜻, 선생님의 뜻, 친구의 뜻, 사회의 뜻, 전통적 편견의 뜻, 선입견의 뜻 등, '다른 사람의 뜻'과 '다른 사람의 기대'로 살아가고, 그러다 죽기 전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내 뜻인지 다른 사람 기대인지 정말 멈춰서 곰곰이 오랜 시간 생각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쉽단다.

정말 내 뜻대로 살려면 20대 때 정체성이 완벽히 확립되어야 하고, 경제적 자유가 뒷받침되거나,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과 행복이 겹쳐지거나 해야 하고, 이런 것을 떠나서 스스로에게 진실한지 통찰 후에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해.

그냥 살면, 승민이는 나중에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할 거야.

"내 뜻대로 살걸......"

아버지의 후배가 아버지에게 상담을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데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고,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담했는데 결론을 못 내리겠다고.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줬다.

"네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후회가 없다. 비록 잘못되더라도 너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지. 지금 이런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고 상담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한 정보는 네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가장 많이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사람들에게 상담할 때는 비디오로 다 찍어서 모든 부분을 순간순간 느끼게 하고 설명해준 후 너처럼 오래 생각해보게 한 다음 상담을 해달라고 해야 정확한 결정이 나온다. 고작 잠깐 네 얘기 듣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코치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네 인생을 맡길 것인가? 그냥 네 뜻대로 결정해라."

인생은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내 뜻'이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후배에게 대답해준 말을 승민이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어머니는 '내 뜻'대로 사신 지 몇 년 안 되셨단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교직을 그만두라고 몇 년 동안 설득했어.

교직이 어머님이 시작하던 시절과 달리 매우 안 좋은 시스템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어. 예전 자라는 동안 나쁜 교사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감이 언론 등 사회 전반에서 표출되어 어설픈 제도개혁이 있을 시점이었지. 열정적인 교사들이 견디기 힘들 때였어. 미국의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미국의 학생 제어 시스템도 같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고,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개선되겠지만, 야학 등 다른 방법으로도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권유했지.

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최종 결심을 했지. 근무를 계속 하기로 했고, 학교는 자연스럽게 놀이터가 되고 행복을 주는 곳이 되어버렸지. 그전에는 개학이 다가오면 무척 괴로워하셨는데, 멈추어 생각한 후 개학을 기다리는 선생님이 되셨다. 그리고 1원의 봉급을 안 주더라도 정년퇴임하기로 선언하셨어. 그리고 엄청나게 노력하셔.

일이 행복과 열정과 가치와 의미가 겹쳐야 되는데, 이것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이야기 해줄게.

네가 자라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중요하고, 이것이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일 중에 일부분이기도 하지.

정체성이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명확한 앎'이라고 아버지는 규정짓고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로조차 타인의 기대에 의해 결정해버리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하도록 하자.

마흔살 행복한 부자아빠의 특별한 편지_ 아파테이아

by 미스터신 2017. 6. 23. 20:45

 

바둑에는 '류'라는 것이 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나의 바둑은 제비처럼 빠르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모험을 무릅쓰는 격렬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창호는 무디고 평범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상대의 도발에도 무한정 인내하면 묵묵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봉수는 진흙탕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바둑으로 '잡초'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창혁은 두텁고 화려한 공격으로 '일지매'라 불린다. 이처럼 튼튼한 바둑 세계를 구축한 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류'가 있다. 이러한 '류'는 절대적으로 강한 것이 없다. 서로 맞서 싸웠을 때 어느 류에는 강하게 작용하고 어느 류에는 약하게 작용하는 면이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류가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보완하고 발전하면서 끝없이 진화한다.

 

바둑 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 바둑에서 새로운 류를 발견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신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보면, 참 잘 두긴 한다. 그런데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바둑이다. 누군가의 기보, 누군가가 창안한 정석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쯤 해서 창의적인 수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빤한 수만 나온다. 요즘 바둑이 왜 이렇게 재미없냐는 애호가들의 불평이 쏟아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바둑 교육은 학원식이다. 학원식은 선생이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빠른 결과를 내어 학생과 부모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상상의 자유를 주기보다는 공식을 외우게 한다. 생각하면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식대로 두도록 가르친다. 그 결과 아이들의 바둑 시합은 생각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정보를 넣어두었나를 겨루는 시험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식의 바둑 교육으로는 자기만의 '류'가 나올 수가 없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가 교과서 밖의 지식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틀에 박힌 교육은 틀에 박힌 사고, 그리고 틀에 박힌 자아를 만든다. 생각이 한정되면 자아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은 나의 자아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준 좋은 스승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는 우리나라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선생님은 평생 딱 세 명의 제자만 받으셨다. 세계 바둑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우칭위안과 관서기원의 창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다. 우칭위안은 1930~1950년대 일본 정상급 바둑 기사들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조리 상대의 치수를 고쳐 '기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고, 하시모토는 1940~1970년대에 걸쳐 본인방전, 왕좌전, 십단전, 기성전을 무려 아홉 번이나 우승한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세계 최초의 바둑 올림픽인 잉창지배에서 우승하여 챔피언이 되었으니 선생님은 제자 세 명을 모두 세계 1인자로 길러내신 셈이다.

 

나는 열한 살 때 선생님의 생애 마지막 내제자가 되어 9년을 함께 살았다. 아담한 크기의 일본식 목조주택에 여든이 넘은 선생님과 열살배기 나, 그리고 선생님의 며느님인 마마짱과 나중에 같이 살게 된 아키다 강아지 벵케이, 이렇게 넷이 살았다. 그런데 그 9년 동안 선생님에게 바둑을 배운 적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선생님은 지도 대국에 인색하셨다. 아주 가끔 복기를 해보라고 하는 것 외에는 거의 말씀도 잘 안 하셨다.

 

어린 마음에 서운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연세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어두워진 건 아닐까, 나를 왜 불러들였는지 잊으신 게 아닐까 걱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흐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 식사때 선생님이 내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보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답이 없는 게 바둑인데 어떻게 너에게 답을 주겠느냐. 그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

 

정말로 9년 동안 함께 살면서 세고에 선생님은 나에게 바둑을 어떻게 두라든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두라는 식의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구와 어떤 바둑을 두고 돌아다니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야말로 아무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바둑을 배웠다.

 

선생이 헤매는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건 아주 쉬운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학생은 그 답을 받아먹을 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고에 선생님은 바둑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스승은 그저 방향만 제시할 뿐, 혼자 공부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올바른 바둑 교육이었다. 선생님의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에 나는 단 하나의 묘수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끙끙거리며 황금 같은 10대를 보낼 수 있었다.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바둑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나는 언제나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바둑을 두었다. 그것이 나중에 나만의 공격형 바둑으로 자라서 '제비행마', '마술사', '화염방사기'라는 독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생각의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개성이 강해지고 자아가 단단해진다. 인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갈 자신감과 확실한 인성이 형성될 수 있다.

 

생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 답을 알려주는 도구다.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일상의 작은 선택마저도 남들의 생각을 물으며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래야 할 지, 저래야 할 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도움을 구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고민을 상담해주는 인생 멘토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혼자 힘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는 그만큼 불안한 자아를 가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사람들은 행복이 돈이나 명예, 성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진짜 행복은 단단한 자아에서 온다고 믿는다. 자아는 자존감이다. 자아가 단단하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한다.

 

물론 이러한 자아는 거저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과 자기 성찰,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디 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고 신념대로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6. 13:28

 

언젠가 대안교육 전문지 '민들레'에서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바로 이거다!"라고 느낀 적이 있고, 내가 쓴 책 '나부터 교육혁명'에도 그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옆집 아줌마'의 위력은 너무나 크다.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우선, 내가 여기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아줌마 또는 어머니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건 아니다. '옆집 아줌마' 이야기의 본질은, 아빠는 돈벌이 기계로 전락하고 동시에 엄마는 아이의 성적 관리자가 되어버린, 우리 모두의 뒤틀린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람직한 모습은, 엄마나 아빠가 일정한 사회경제적 활동을 하되 하루 중에 한 나절만 일하고 그 외 시간의 많은 부분을 자녀 교육이나 자녀와 함께 활동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지금처럼 엄마 아빠의 일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상태로, 그리하여 엄마가 아이 교육,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의 점수 올리기나 일류대 입시 준비를 전적으로 담당하다 보니 사실상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중노동을 수행한다. 잔업, 철야, 특근도 마다않고, 또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먹으며 자존감이 상하는 일도 겪어가며 돈 벌어다 주는 아빠나, 아이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엄마나 삶의 스트레스는 극한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시급히 바꿔야 할 현실이다.

 

이런 잘못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한 위에서 이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다시 보자.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자녀 교육에 관한 좋은 강의를 듣고 아무리 좋은 교육 서적을 읽은 뒤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막상 다음 날 '옆집 아줌마'만 만나고 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옆집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는가?

 

옆집 아줌마가 먼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인성교육이고 자연교육이고 대안교육이고 말은 참 좋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앞으로 더 살벌해질 세상에서 과연 아이가 먹고살 수나 있을까?"

 

그렇다. 역시 생계 문제다. 생각해보니 지금 아빠도 바로 그 생계 전선에서 매일 힘겹게 살고 있지 않은가? 경쟁은 치열하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다리 질서에서 높은 등급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이도 나처럼 '뺑이치고' 살게 될 것 같다. 심하면 서울역 같은 데서 보는 노숙자처럼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돈다.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결론은 "그래, 사실 그 말도 맞네. 아이고, 이를 어쩌나? 혹시 좋은 학원이나 과외 선생 아는 데 있어요?" 로 끝난다.

 

이제 이 부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받는 가운데 과연 부모인 나는 행복하게 자라왔던가? 우리 스스로의 경험을 반추해보자는 얘기다. 만약 중3이나 고3을 다시 한 번 해보라 하면 기꺼이 할 것인가?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가? 만일 본인도 행복했고 아이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느낀다면 그렇게 계속 가면 된다. 사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도 '모두 행복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아이나 어른이나 지금의 모습이 행복하다면, 더욱 치열하게 경쟁적으로 공부하도록 하면 된다. 그것이 참 행복의 길로 느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 교실 붕괴를 촉진하는 아이들, 탈학교를 결심하는 아이들을 곰곰 생각해보면 결론은, 이 모든 일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들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너도 나도 자기 자식을 전쟁과 같은 입시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다른 말로, 보다 슬기로운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계속한 것이 지난 50년 정도의 대한민국 교육이었다. 대학 입시, 나아가 일류대 합격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고교로부터 중학을 거쳐 이제는 초등 수준까지 내려갔다.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아니면 태아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몇 년 전, 어떤 엄마가 세 살짜리 아이의 혀 밑 근육을 잘라 영어 발음을 원어민처럼 하게 만든다고 하는 바람에 해외 토픽감이 된 적도 있다. 다른 편에서는 많은 부모들이 초등 아이들을 억지로 부모 품으로부터 떼어내 '조기유학'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바람직한 결과를 얻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특히, 이른바 '기러기 아빠'들의 애환이나 자살 소식이 들릴 때면, 과연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미쳐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식으로 가면 과연 10년이나 20년 뒤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과연 더욱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난공불락의 엄청난 실력을 듬뿍 다지고 배움의 기쁨에 행복해하며 모두 멋진 실력자가 될까? 옆집 아줌마가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모두들 따라 갔을 때 이 세상은 과연 좋아지는 걸까, 아니면 갈수록 나빠지는 걸까? 우리가 길을 가도, 이게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셋째, 아이의 생계 문제는 굳이 부모가 일일이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가 머리가 커지면 스스로 고민하게 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모든 걸 마련해주는 것이 진정 행복할까 아니면 아이가 커서 독립해 숟가락 하나라도 스스로 장만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옛말에 "아이 먹을 것은 자기가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진정 걱정할 것은 아이의 생계가 아니라 꿈이다. 꿈을 키우는 아이, 그 꿈을 좇아 즐거운 마음으로 실력을 키우는 아이, 그 실력을 자기 행복만이 아니라 사회 행복을 위해 쓸 줄 아는 아이, 바로 이런 '일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행복한 세상이 된다.

 

그렇게 꿈을 키우고 실력을 키워 사회 헌신까지 하는 아이들은 생계 문제도 거뜬히 해결한다. 꿈을 좇아 정진하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실력을 인정받아 먹고살 길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호화판으로 살지는 못해도 소박한 살림살이는 탈 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편, 매일같이 생계 걱정만 하며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하니, 결론은 뻔하다. 늘 생계에 허덕거리며 살거나, 생계 해결을 한답시고 대부분 돈과 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이들은 삶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재테크 이야기만 하고 산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속물 사회 또는 물신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꿈과 소신에 따라 사는 이들의 인생은 향기가 나고 멋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멋진 사회, 행복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바로 그 옆집 아줌마조차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도록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교육혁명_ 강수돌

by 미스터신 2016. 3. 14. 08:04

 

나에게는 15학번인 아들이 있다. 며칠 전 아침을 같이 먹으며 혹시 올해에 입학하는 후배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들놈은 단호하게 한 마디로 표현했다. '기-승-전-공부'라는 것이다. 그럼 '니가 생각하는 공부란 어떤 것이냐' 하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또 한 마디로 대답한다. '현실 공부'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대학 1학년 동안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내린 결론이란다. 시간이 없어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그 날 하루 종일 아들이 말한 '현실공부'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아들이 한 말은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이 말엔 많은 학생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 대학 수업은 진짜 공부인가? 자기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를 결정하고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은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시험 성적에 따라 학과를 결정하며, 미리 진로를 생각한다 해도 대부분 사회적 평판이나 수입에 따른 결정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대학 강의실에서의 수업이라 해도 정말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목이 아닌 경우, 그저 시간을 때우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3월 개강 후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 풍경을 잠깐 그려보자. 조그만 흑백사진이 붙어있는 출석부를 펼치고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듯 한 사람씩 부른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면 처음의 긴장이 20분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가장 단기적인 시간이 20분이라 한다. 이 때쯤이면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학 입학 후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여행,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대답과 함께 미팅이나 소개팅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 다시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서부터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경험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상대인지 명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묻는다. 서로 질리지 않고 오래 만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하기 어렵다. 이제 학생들이 반문한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하면 될까?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공부해라' 학생들은 다시 말한다. '데이트 하는데 무슨 공부를 해요?' 그럼 나는 또 대답한다. 발전하지 않는 관계는 금방 질리고 끝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술관에 가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러간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런 준비 없이 둘이 같이 본 그림이나 유물들 혹은 영화에 대해서는 짧은 감탄사 이외의 느낌을 더 말하기 힘들다.

 

오직 입시 준비만을 해 온 학생들에게 모든 그림이나 영화는 내 인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먹고 마시며 일상적인 소비생활로 돌아간다. 단순하고도 지속적인 소비밖에 없다. 그런데 미리 공부를 하고 가면 어떨까? 간단하게라도 미술사에 대하여, 영화감독에 대하여, 장르적 특성에 대하여 실로 공부를 하자면 끝이 없다. 데이트를 하고 나온 이후에도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앞으로의 만남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대를 새롭게 보게 될 것이고 내가 얼마나 좋은 상대를 만나게 되었는가 감사해 할 것이다. 나는 어떤 데이트를 할 것인가?

 

모든 공부는 시험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공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더욱 알차게 만들어준다. 공부는 현실과 접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생들은 어떤 공부를 할 것인가? 살아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떻게 하면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것인가. 답은 한마디로 '기-승-전-공부'다.

 

_ 전승주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by 미스터신 2016. 3. 13. 20:46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 번째 나무가 자랑한다. "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 두 번째 나무는 "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며 으쓱한다. 세 번째 나무가 이에 질세라 뽐낸다. "나는 아주 향기로운 예쁜 꽃들을 많이 맺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한 그 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물'.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가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이때 성경책 북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그 접착제를 쓰겠다며 찾아온다. 자신이 개발 중인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강해 한 번 책장에 붙이면 뗄 때마다 종이가 찢어져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와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물병은 물을 충분히 담을 수 있고 또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꼭 맞는 조롱박만을 골라 물병을 만들었다. 어느 해, 엄청나게 큰 조롱박만 주렁주렁 열리자 고민에 빠진다.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조롱박을 잘라도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조롱박을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자 가게 밖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쓸어 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그 큰 조롱박 둘레에 그물을 씌운 다음, 그것을 허리에 동여매고 물에 띄었다. 조롱박이 커서 공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기에 둥둥 잘 떴다. 조롱박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바깥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의 또 다른 사례다.

 

장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물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과 입시생들의 면접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부모와 싸우고 온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순간 전쟁 시작이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너 그럼 굶어 죽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 공부해서 뭐 하려고 그래." 1973년에 연세대 철학과 원서를 쓸 때의 나도 그랬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인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쓸모없는 철학으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철학, 인문학의 그 쓸모없음에 쓸모 있음이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 철학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바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철학을 만나시길. 인문학을 만나시길. 그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철학의 힘_ 김형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1. 13:50

 

'버림'은 어렵다. 마음을 비우는 것도 그렇고, 책장이나 옷장 등을 정리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제대로 버릴 줄 알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법이다.

 

곤도 마리에는 일본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이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라는 그녀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충고가 나온다.

 

물건을 버릴지 아니면 남겨 놓을지를 구분할 때, '물건을 갖고 있어서 행복한가', '갖고 있어서 마음이 설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라.

 

마음이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해지지 않으며,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는다고 역시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녀만의 말이겠는가? 우리 중에 누군들 그런 경험 한 두 번 없는 사람이 있을까. 설레지도 않는데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은 '버리던' 그 경험 말이다.

 

그녀는 거듭 말한다.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자." 나는 그녀의 정리 비법은 '물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 즉 사람에게도 때때로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버림'과 '비움'을 통해 더 가치 있는 현재를 구성하라는 그녀의 권면을 받아들여, 집 짓고 도배한 지 12년이나 되는 목사관 사택의 아래층 벽지를 새로 발랐다.

 

벽지를 바르는 김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를 하면서 주워다주신 장식장 여러 개도 버렸다. 도배가 끝날 즈음에 어떤 교우가 '목사님 사시는 집이 궁금하다'는 말을 했대서, 그러면 이참에 목사의 집 여기저기를 구경하도록 열어둘 테니 주일예배 마치고 들어와 보시라고들 했다. 아울러 사택에 있는 목사의 물건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걸 점찍어 두면 차차 드리겠다는 말도 했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정리'일 테니까.

 

한 주가 지나자 목사의 사택을 구경한 교우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목사님 댁엔 쥐뿔도 없어요. 집이 휑해요."

 

그러면 '없는 것'하고 곤도 마리에가 말하는 '버림'하곤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내 생각에 답한다_ 허태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0. 13:47

 

아이에겐 최적의 학습환경과 학습 시기가 있다. 그 환경과 시기를 놓치면 오히려 더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최적의 학습시기보다 최적의 학습환경이 더 중요하다. 부모와 함께하는 환경보다 더 나은 최적의 조건은 있을 수 없다.

 

한때 조기유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무성했던 적이 있었다. 조기유학을 찬성하는 부모의 대부분이 유학의 시기는 아이가 언어형성이 되기 전,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교육시키면 더 나은 삶의 고지를 점령하게 되리란 막연한 기대 때문에 아이를 서둘러 유학 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강요된 학습환경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새로운 학습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이는 자신감을 상실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감을 상실하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가 아닌데 모자란 듯이 행동하는 등 여러 가지 정서 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국제전화로 어떻게 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상담을 해오기도 한다. 이들의 부모들 또한 아이 때문에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을 호소한다.

 

제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남보다 특별히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남이 하는 것만큼 한다는 뜻이다. 언어가 다른 것은 접어두더라도 조기 유학에서 같이 공부하는 외국 아이는 자기 나라에서 자기 부모와 함게 생활하는 아이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안정된 아이들이다. 결코 같은 생활환경이라고 볼 수 없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간다 해도 사고 수준이 아직은 '피아제의 인지발달단계'에서 말하는 구체적 조작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부모가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구체적 조작기에는 가설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고 판단력이 정확하게 서지 않는다. 즉 보이는 것이 A라면 A밖에 모르고 그 외에 B나 C가 미치는 영향이나 가상의 경우를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가 사고의 논리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에 무조건 주입하려고만 한다면, 그 아이는 한계를 크게 느끼게 되어 도중하차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는 태어나서 2년 동안은 자신이 타고난 반사적 신체능력을 습득하고, 이후 7살까지는 외부 환경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이 시기에 말로써 표현하는 방법을 습득하지만 구체적으로 유사성과 연관성을 추론해내는 것은 그 이후에나 가능하다. 조기유학을 통해 외국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다른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형성기를 대개 만 13 세 전후로 보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아이가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유학을 보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이에겐 최적의 학습환경과 학습시기가 있다. 그 환경과 시기를 놓치면 오히려 더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최적의 학습시기보다 최적의 학습환경이 더 중요하다. 부모와 함께하는 환경보다 더 나은 최적의 조건은 있을 수 없다.

 

부모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세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조기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찾고 계발해 최대한의 가치를 창출해내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그러나 부모 없이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설정하기 어려울뿐더러, 올바른 가족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아이는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는 있어도 내면이 성숙된 인간이 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식을 잘 기르기로 소문난 부산의 장덕기내과의 장덕기 원장은 조기유학에서 실패한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장 원장의 아이들도 호주에서 조기유학을 했고 호주에 있는 동안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지만, 다시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면 아이들을 조기유학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다. 유학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 또래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는 유학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고, 그보다 심각한 것은 아버지와 아이들과의 단절감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거의 모든 기러기 아빠들의 비애일 것이다. 아내가 아이들과 호주에 함께 머무는 동안 전화나 메신저, 이메일 등을 통해 함께 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차츰 아버지를 잊어갔고 나중에는 찾지도 않았다 하니 아무리 아이가 지적인 인간의 조건을 훌륭히 갖추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005년 8월까지 주한 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우지 마노르 대사의 부인 나오미 마노르 여사는 한국의 조기유학 붐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외국에 내보내기에 중학생은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조기유학은 물론 집을 떠나 공부하는 기숙학교도 거의 없다고 했다. 세계적 인재를 무수히 배출한 유대인들의 교육지침은 주로 탈무드와 구약성경을 토대로 하는데, 여기에는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자녀 교육의 의무를 분명히 부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부모의 행동과 사고가 그만큼 아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부모의 그늘 아래 성장해야 아무리 세찬 비바람과 강한 폭풍우라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가 옷을 입는 동안 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하루를 따뜻하고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다_ 샐리 리스터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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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0. 19:13

 

http://www.ttimes.co.kr/index.html?no=20150920173777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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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9.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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