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바둑 대국은 참으로 길었다. 지금은 2~3시간 안에 끝나는 바둑이 대부분이라 아무리 길어도 4~7시간이면 끝나지만 20년 전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5시간이라서 초읽기까지 합하면 총 대국 소요시간이 11시간이 넘기 일쑤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1993년 이창호와 두었던 기성전 결승대국. 보통 밤 9시~10시면 대국이 끝나는데 그때의 대국은 7판이 전부 밤 11시를 넘겼다. 아마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늦게 끝난 대국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다. 일본은 지금도 오래 두는 바둑으로 유명하다. 기성, 명인, 본인방전의 '빅3'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8시간이다. 둘이 합하면 16시간에 이르니 하루에는 다 소화할 수 없어서 이틀을 잡고 진행한다. 너무 길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굉장히 짧아진 것이다. 1930년대에는 제한시간이 각 40시간에 이르는 바둑도 있었고, 1940년대까지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13시간이어서 3일에 걸쳐 대국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지금처럼 이틀로 줄인 것도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노력한 결과다.

 

바둑에서 제한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제한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수읽기가 깊어진다. 내가 어떤 수를 두면 그로 인해 전개될 앞으로의 판세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따라서 제한시간이 넉넉하면 더욱 효율적이고 함축적인 수가 나오게 된다. 바둑을 예술로 생각하는 일본은 긴 수읽기를 통해 보다 완벽하고 능률적인 수를 생각해내는 걸 바둑의 '도'이자 '미'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 바둑은 지금 같은 광속의 시대에도 8시간의 장고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로 제한시간이 짧아지는 속기바둑은 깊은 수읽기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여 둘 수밖에 없다. 바둑 기사에게는 이 역시 중요한 훈련이지만 아무래도 실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만큼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

 

속기 바둑과 장고 바둑 중에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을 수 밖에.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형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 장고를 하여 최고의 실력을 겨루는 것도 의미가 있고, 빠르게 감각을 대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프로 기사라면 두 가지 다 훈련이 되어야 한다.

 

바둑은 감각만으로 둘 수도 없고 실력만으로 둘 수도 없다. 나는 초중급자들에겐 오히려 빨리 두라고 말한다. 그 시절에는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꼭 좋은 수가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때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수를 놓아서 만족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자신만의 바둑 감각을 쌓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서서히 수읽기가 되기 시작한다. 또 수읽기를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덩달아 감각도 좋아진다.

 

이처럼 속기와 장고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의 경향은 빠른 쪽으로만 흘러간다. 요즘 국내 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1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5분, 10분, 20분짜리 초속기 대회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2시간, 3시간의 장고 바둑은 두세 대회 정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장고 바둑이 80퍼센트의 점유율을 이루고 속기 바둑이 20퍼센트 정도 비율이었다면 지금은 역전되어 속기 바둑이 80퍼센트, 장고 바둑이 20퍼센트가 됐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건 인정한다.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의 아찔한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대여섯 시간이 넘는 긴 바둑을 지켜보는 건 고역일 터다. 그렇지 않아도 바둑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긴 호흡의 바둑만 고수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속기 바둑은 일단 빠지면 컴퓨터 게임을 능가하는 박진감과 스릴이 있기 때문에 젊은 팬을 끌어들이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바둑의 질적 측면을 본다면 지나치게 속기전으로 흐르는 건 위험하다. 이건 그만큼 프로기사들이 한 수 한 수 깊게 생각해볼 기회가 줄어드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얕고 빠른 잔머리 회전만 발달시키고 깊은 사유의 능력은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쓰지 않는 능력은 퇴화하게 마련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둑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깊은 사유를 통해 발달해왔다. 현대 바둑의 틀과 수준을 진일보시킨 우칭위안의 바둑이나 신포석을 창안한 기타니 미노루의 바둑, 처절하고 지독한 수로 점철되는 조치훈의 바둑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이창호의 견고한 바둑 등 모든 위대한 기풍은 오랜 사유를 통해 탄생했다. 그런 사유가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기에 최고의 기사들은 제한시간을 막론하고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속기 바둑에만 길들여진 젊은 프로들은 장고 바둑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길게 오랫동안 고민해본 적이 없기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기원 소속의 배태일 박사가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발표한 자료가 있다. 물리학자인 그는 속기와 장고 바둑 사이에 진짜 바둑 실력의 함수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조사를 통해 그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는 젊은 프로 기사들을 '속기에 강한 그룹'과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으로 나누어 랭킹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속기에 강한 기사들은 20~22세 때 실력이 최고조에 이른 이후로는 별로 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은 20대 초반에는 부진하지만 오히려 25세 이후로 실력이 늘어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태일 박사는 한국 바둑이 최근 들어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국제대회도 시대에 맞춰 1시간짜리 속기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잉창지배나 춘란배, 삼성화재배 같은 권위있는 대회는 2~3시간 장고 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활약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대회는 한국 기사들이 우승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중국 기사들이 우승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 기사들도 대단한 활약을 한다. 바둑의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것이 너무 빠른 것만 추구하다가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라고 생각한다. 빠른 것은 쾌감을 준다. 재미있고 짜릿하다. 하지만 그것만 쫓다 보면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하여 결정해야 하는 때에 경솔한 판단을 하게 된다.

 

바둑 밖에서도 똑같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매사에 너무 즉흥적이다. 이들은 이성보다도 감정을 앞세우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좋은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솔한 행동, 후회할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른다. 바둑으로 표현하자면 눈앞의 몇 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잘못된 수를 놓는 것이다. 상사의 꾸지람에 즉흥적으로 사표를 냈다가 후회한다거나, 친구나 가족에게 모진 말을 퍼부어 상처를 준다거나, 실수나 잘못을 거짓말로 둘러댔다가 들통이 나는 일이 반복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우리는 그럴수록 진지하고 신중한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다. 논문 표절로 고위 공직자 후보에서 낙마하는 사람이나 한마디 실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유명인 등 장기적인 면에서 깊게 생각하지 않은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은 단 하나의 수를 결정하기 위해 제한시간 8시간 중 무려 5시간 7분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5시간 7분 동안 그는 정말 진지한 얼굴로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장면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둑알 하나 놓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5시간이 넘게 고민을 한 것일까?

 

하지만 그 한 수의 차이는 실로 지대한다. 당장은 그저 돌 하나의 위치일 뿐이지만 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승부에 결정적 차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잘못 놓은 돌 하나가 훗날 내 목을 조이거나 내 등을 치는 약점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어떤 바둑을 하겠다는 다케미야 9단의 선택이기도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그날 치를 대국이 영토 분쟁이 될 수도 있고 대마싸움이 될 수도 있다. 바둑의 미학을 중시했던 다케미야 9단은 그 5시간 7분 동안에 머릿속에서 수백 판의 바둑을 두고 허물고 두고 허물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놓은 결정의 한 수,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바둑을 펼쳐보겠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선언이었다. 결국 이 바둑에서 다케미야 9단은 승리했다. 나는 이것이 생각의 승리이자 실력의 승리라고 믿는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7. 10:10

 

"남과 다른 창의적인 수는 어떻게 생각해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프로 바둑 기사들은 아마도 다들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수가 떠오른다고. 즉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고서 창의적인 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번쩍 새로운 수가 떠오르는 것이다. 프로 기사들이 초읽기에 몰린 순간에도 기발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평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창의성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끈질긴 탐구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적인 두뇌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호기심과 탐구심이 없다면 창의성은 발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창의적인 생각을 창의성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 유명 미술가나 음악가 같은 사람만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은 꼭 뭔가를 발명한다거나 새로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창의성은 도처에 있다. 나는 우리 아내가 나를 위해 해주는 요리에서도 창의성을 느낀다. 똑같은 음식을 해도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든 식혜는 맛도 좋지만 마신 후 속이 편하다. 강정이나 엿 속에서는 다른 데서 느낄 수 없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뭘 넣었냐고 물어보니 식혜에는 생강을 살짝 넣었고 강정에는 귤껍질을 채로 썰어서 넣었다고 한다.

 

나는 창의성은 넓은 의미가 '남과 다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생각'은 그냥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아내가 똑같은 음식을 남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더 맛있게, 더 건강하게 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즉 가족들에게 식혜를 먹이고 싶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식혜의 찬 성질 때문에 배가 아플 테니까 이걸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따뜻한 성질의 생강을 넣는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강정이나 엿은 텁텁해서 금방 물리기에 개운함을 주는 귤껍질을 넣는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창의적인 생각의 과정은 어느 분야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바로 문제의식과 질문이다. 이 문제를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상식과 지식을 동원하여 추측을 한 후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창의성의 과정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끊임없이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질문해야 한다.

 

창의성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문제나 결핍 등에 예민한 사람이 한다. 즉 문제가 눈에 보이면 해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의 실체는 창의적인 능력이 아니라 뭐든 의문이 생기면 '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에 있는지도 모른다.

 

바둑 고수들을 보아도 그렇다. 바둑에 관한 한 우리는 절대로 궁금한 것을 못 참는다. 풀지 못하는 수를 만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길을 걸으면서도 볼일을 보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그 생각뿐이다. 과감하게 동료 기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는 경우도 많다. 머리를 맞대면 훨씬 빠르게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국기원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루이나이웨이 9단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다가와 그림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이 정석에서 돌의 수순을 이렇게 바꿀 경우 다음 전개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바둑 기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고바야시 정석'이었다. 정석은 오랜 시간 검증을 거쳐 가장 모범적이라고 인정된 것이기에 좀처럼 의심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루이9단은 뭔가 석연치 않은 모양이었다. 돌 하나를 바꿈으로써 우리가 믿어온 고바야시 정석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루이 9단은 중국의 여류 바둑 기사로 1988년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9단에 오른 인물이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녀의 바둑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중국기원과의 불화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조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을 떠돌며 무려 10년 동안 바둑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국기원과 이야기가 잘 되어 1999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여기서 13년을 살았는데, 그 사이에 놀라운 기록을 많이 세웠다. 여류기전 우승을 26번이나 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 최초로 물론 세계 최초로 남자를 꺾고 왕위에 올랐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수전이었고 아프게도 그때 꺾인 남자 상대가 바로 나였다. 루이나이웨이는 우리나라 바둑사에 최초의 여성국수이자 유일무이한 외국인 국수로 기록되어 있다.

 

루이 9단의 질문은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곧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후에 이창호를 비롯하여 여러 후배 기사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어서 그때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이건 루이 9단이 질문한 건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는 바둑판도 없고 그림도 없었지만 신나게 토론을 벌였다. 처음에는 정말 루이 9단의 의심처럼 정석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더 토론을 해보니 역시 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구나 그걸 증명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이창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를 발견해냈다.

 

만약 루이 9단이 고바야시 정식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것 때문에 골치 아플 일도 없었겠지만 새로운 발견을 해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의문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 함께 고민을 했다. 덕분에 창의적인 새로운 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발견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이런 거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시작되지 않는다.

 

바둑 기사들은 상대방의 한 수 한 수를 절대로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왜 거기에 두었을까?', '이 수에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비록 주어진 시간은 짧지만 우리는 무섭도록 집중하여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어 다음 수를 결정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도 바둑처럼 이렇게 한 수 한 수 깊게 생각하여 놓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막연한 느낌으로 결정하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압력이나 강요에 의해서, 혹은 시간에 쫓겨서 아무렇게나 결정한 일들은 반드시 후회를 낳는다.

 

따라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장 답을 찾기 힘들다고 회피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는 왜 이런 걸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까?', '무엇이 옳은가?', '어떤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답을 구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사유체계가 바둑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일, 인간관계, 자기관리 등에 두루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암기하는 지식은 오래가지 않지만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해한 지식은 내 것이 된다. 단지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만으로 실력과 능률이 향상되며 인격적으로 더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고민하여 얻은 답이 늘 최선의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후회도 적고 책임질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야말로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때다.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집중하여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며 반드시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게 재미없고 골치 아플 수도 있다. 당장 대답이 떠오르지도 않고 오히려 혼란만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 답을 찾아냈을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답을 찾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본인만의 체계가 완성되면 보다 빠르게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바둑 고수들이 가만히 앉아서 수십 수를 내다보는 것도 수많은 훈련을 한 덕분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성격에도 변화가 와서 훨씬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해결하는 사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6. 16:52

 

부모들은 고민에 빠진다.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학습지도 풀게 하고, 인터넷 강의도 듣게 했건만, 성적은 갈수록 더 떨어질 뿐, 자녀가 공부를 할 만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부모 입장에서는 무척 당혹스럽다. 필자의 한 지인은 "우리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와서 걱정이다"는 말을 5년째 되풀이 하고 있다. 그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중1 아들은 고2가 되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길래 성적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것일까? 지인에게 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지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학원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 열두 시간 다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 집에 와서도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는 지인의 아들처럼 오랜 시간을 공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은 학교에 와서도 학원숙제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늦은 저녁까지 학원수업을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늦게까지 학원숙제에 매달렸다. 아이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성적은 언제나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왜 성적이 부진했던 것일까?

 

나는 명문대 합격생과 학습법에 대한 연구를 수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명문대생의 합격수기서와 학습법 관련 책을 백 권 넘게 읽었고, 지금도 매달 신간을 구입해서 읽고 있다. 자녀교육서나 합격수기서를 읽어본 적 있는 부모라면 책에 소개된 방법들을 내 아이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책에는 그럴듯한 공부법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자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일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쓴 책들도 적용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자에게 최적화된 공부법을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똑같이 적용시킨다는 것도 무리였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특급 영재에 속했던 저자들 간의 차이가 너무 컸다. 명문대생들과 제자들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종국에는 참새와 독소리의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시도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약간 과장하면 명문대생들과 내 제자들의 공통점은 학생이라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한편 저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사교육이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방해가 되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설명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노트필기는 되도록 자제했다'는 이들도 있었다. '오답노트를 만들라'는 이들이 있었고, '시간낭비일 뿐이다'라는 이들도 있었다. '문제집을 백 권 넘게 풀었다'는 이들이 있었고, '두세 권만 풀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상반된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혼란스러웠다. 특히 일부 학생들이 합격 비결로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거론할 때면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혼란과 당혹감은 명문대생들의 합격수기서와 학습법 관련 책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해소되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각양각색의 공부법을 관통하는 공부의 '제1원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1원칙은 자녀교육의 제1원칙으로 삼아도 손색없을 만큼 절대적인 법칙이다. 제1원칙은 자녀를 키우면서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제1원칙은 풍문에 현혹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소신 있게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1원칙은 자녀교육의 실패확률을 대폭 낮춰줌과 동시에 성공 확률을 대폭 높여준다. 대체, 그 원칙이 무엇이냐고? 제1원칙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도착한 곳은 몇 년 후 미래. 어느 여름날. 당신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현재 시각은 밤 11시.

겨우(?) 밤 11시인데, 애가 벌써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당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숨을 고른 후, 운을 떼었다.

"얘야, 너도 내년이면 고3인데, 너무 일찍 자는 거 아니니? 공부 좀 더 하고 자거라."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난 하루에 4시간만 공부하는 거 몰라?"

 

4시간만 일(공부)하고 퇴근(?)하겠다는 미래의 아들(딸)에 대한 당신의 대처가 궁금하다. 그냥 자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공부를 좀더 하는게 어떻겠냐고 회유하겠는가? 당신이 4당 5락을 입시의 진리로 받들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4시간 공부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고등학생에게 하루 4시간 공부가 과도한 학습량은 아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일일 학습시간은 4시간이 훌쩍 넘는다. 이는 하루 4시간 공부로는 명문대 합격은커녕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4시간만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녀 때문에 근심에 잠긴 당신에게, L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 또한 고교시절 내내 하루 4시간만 공부했기 때문이다. 공부한 시간만 놓고 판단했을 때, 당신 아이나 L군이 명문대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필자도 고3, 재수생, 삼수생, 장수생으로 기나긴 세월을 입시 공부에 매달려 봐서 잘 안다. 하루 4시간 공부로는 서울 소재 대학은커녕 지방 국립대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에 4시간만 공부하고 책을 덮어 버린 배짱 두둑한 L군, 그는 과연 어느 대학의 배지를 달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입학했다. '설마, 서울대?'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최고 학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최고 학부라 함은?' 의대 말이다. '하루 4시간 공부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혹시 재수라도 한 건 아닐까?' 그렇진 않다. 그는 스무 살 현역으로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L군이 명문대에 들어갔다면 다른 수많은 학생들 또한 명문대에 들어갔어야 함이 마땅하다. 4시간 이상 공부하는 고등학생은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L군처럼 탁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L군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하루 4시간 공부로 어떻게 최고 대학의 최고 학부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효율성에 있었다. 즉, 그는 최소의 학습시간을 투입해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는 효율적인 공부를 했던 것이다. 수업시간을 쉬는 시간처럼 보내는 대다수 학생들과 달리, 그는 수업시간에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었다. 그는 수업시간을, 기본개념을 다지고 내신시험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적극 활용했다. '고액 과외나 족집게 강의를 들었던 것 아닐까? 놀랍게 또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L군은 고교시절 내내 사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어떻게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사교육을 받지 않느 것이 공부에 훨씬 더 유리하다. 왜 그렇냐고?

 

배운 것을 가능한 많이, 오래 기억할수록 공부의 효율성은 높아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할까? 쉼 없이 새로운 내용을 배워야 할까, 배운 내용을 수시로 익혀야 할까? 알다시피 사람의 기억력이란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바로 앞쪽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려보라. 불과 일분 전에 읽은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않은가. 당신의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원래 인간의 뇌가 망각에 취약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깜빡깜빡 잘 잊어버려서 때때로 불편하고 낭패를 볼 때도 있지만, 망각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평생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면 우리는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망각 덕분에 과거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에서 망각은 때때로 유익하지만, 공부에서 망각은 치명적이다. 망각은 선별과 자비를 모른다.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까지도 망각의 강 저편으로 끌어가 버린다. 책장을 넘기고 있는 아이는 지식의 조각들을 매순간 망각의 강에 흩뿌리고 있다. 망각의 강을 타고 떠내려가는 지식 조각들은, 즉각 건져내지 않으면 망망대해 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결국,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 지식을 주워 담았던 아이의 머릿속에는 한 조각의 기억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한 남자가 수백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날. 소파에 앉아 지친 심신을 달래며 여행의 추억에 젖어들려는 찰나, 남자는 자신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행히 지갑에는 비행기 왕복 티켓이 남아 있었고, 두 장의 티켓을 통해서 자신이 15박 16일 동안 유럽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무지한 남자, 여행을 다녀온 것이 맞을까?

 

뜬금없이 남자를 등장시킨 까닭은 당신 아이가, 여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처럼, 무의미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갈하기 위함이다. 나는, 어리석은 남자처럼 어리석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매일매일 목격한다. 아이들은 학교, 학원, 집을 순회하며 하루 종일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어제 배운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잊어버릴 거라면 실컷 놀고 푹 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이들을 놀리자는 말은 아니다. 망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대처일 것이다. 다행히 망각을 극복할 비법이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라서 비법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좀 민망한데, 비법은 복습이다. '에잇, 비법이 고작 복습이야? 참 시시하네.'

 

이런 식으로 복습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자녀의 기억력을 과신해선지, 어린 자녀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부모들은 복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녀가 끊임없이 배우기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학원에서 배우고, 과외로 배우고, 인터넷으로 배우고, 학습지로 배우고, 하루 종일 배우기만 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언가를 또 배우는 아이에게 복습이 가능할까? 복습을 안 하면 오늘 배운 지식들은 망각의 강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학생이라면 누구나 사교육과 자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둘 다 하면 안 되나?' '하루가 48시간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자습과 사교육을 양손에 거머쥐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봄 초록의 싱그러움과 가을 낙엽의 정취를 동시에 만끽할 순 없는 법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L군 또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고, 자습을 선택했다. 사교육을 완전히 배제한 그는 모든 공부시간을 자습으로 채워 넣었고, 자습시간 동안 심화학습과 수능공부에 주력했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4시간만 공부했기 때문에 잠도 충분히 잘 수 있었다. 하루에 7시간씩 수면을 취했고, 저녁 식사 전후로 한 시간씩 쪽잠도 잤다. 충분한 수면 덕분에 그는 깨어있는 동안 공부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었다. L군은 자신의 공부 방식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공부시간이 적었지만 실제로 공부한 양은 다른 학생들의 두세 배에 달했다."

 

명문대 합격생들은 자신만의 공부 노하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공부 비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효율적으로 공부하라!'

 

이 문장이 바로, 공부의 제1원칙이다. 그리고 자녀교육의 절대 법칙이다.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혹독하게 공부한다고 해서 우등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4시간을 공부하지만, 어떤 학생은 유명대학에 가고, 어떤 학생은 무명대학에 간다.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열심히는 기본이고, 제대로 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도 학습량과 실력은 쌓이지 않는다.

 

당신 아이가 학창 시절 내내 비효율적인 공부를 한다면 당신이 자녀교육에 쏟은 열정과 헌신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자녀교육에 실패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더구나 자녀교육의 실패는 부모의 실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녀교육의 성패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모로서 성공하고 싶다면, 당신 아이가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공부의 제1원칙을 자녀교육의 제1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자녀교육을 함에 있어서 모든 선택과 판단의 기준을 '효율성'에 두어야 한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4:03

 

'꿈꾸는 다락방'으로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지성, 그는 전주교대를 졸업한 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그에게 왠지 모를 친근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가 전주에서 교육대학교를 다녔던 시기에 나 또한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가 초등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나 또한 초등 교사였고, 그는 작가로서 나의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인생아, 고맙다'는 이지성이 겪은 이십대 시절의 방황과 아픔을 상세히 기록한 자전적 에세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한다.

 

"세상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작가의 길을 가겠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겠다, 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이지성은 저서에서, "내 젊은 날은 방황과 고독,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암흑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당시의 착잡한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4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화사하고 멋진 정장을 입고 교생실습을 나갔다. 친구들이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일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작가도 되지 못하고 교사도 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는 건가.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인가. 학교에만 가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열아홉 살에 대학을 갔다고 하니,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일이다. 잠시, 우리의 스물두 살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스물두 살 때 무얼 하고 지냈는가? 평범하게 살았다면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었거나, 군대에 가 있었거나, 직장을 다녔거나,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지성처럼 존재에 대한 회의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지성의 글을 읽으면서 젊은 날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시련과 아픔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시련과 아픔이 부러웠다. 뭐 그런 걸 다 부러워하냐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놓고 따졌을 때, 스물둘 전위성은 스물둘 이지성보다 남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신 7등급이라는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포자기의 나날을 보내던 내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시기가 고2겨울 즈음이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셈이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법,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고, 나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재수를 했다. 원서를 한 군데도 넣지 못할 만큼 참패했다. 삼수를 했다. 원서를 넣은 세군데 대학에 모조리 낙방했다. 삼수를 실패한 것도 암울한데, 한 달 뒤에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몰랐다. 최종 학력이 고졸인 스물두 살 남자는 군대에 강제 징집된다는 사실을. 끌려가듯 훈련소에 입소했다.

 

스물셋 이지성은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교대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만, 스물셋 전위성은 삼수를 실패한, 고졸 학력이 전부인 군인이었다. 부끄럽다, 초라하다, 비참하다, 죽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적도 없다. 그건 내가 긍정적 사고방식을 소유한 낙관주의자라서가 아니었다. 인생과 앞날을 걱정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개념으로 살았기 때문에 삼수를 실패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군대에 끌려갔어도 슬프지 않았고, 고졸 학력이 전부였어도 절망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나에게는 아품마저도 사치였다. 아픔을 느낄 수 없는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희망도, 절망도,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정신적 뇌사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것이 방황, 고독, 상처, 결핍, 좌절로 점철된 스물둘 이지성을 내가 부러워하는 이유다. 지금 내 신세를 한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당신 아이가 나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왜 이십대 중반까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해야 했을까? 성공한 이들은 나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그들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최적의 환경,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우월한 조건을 갖췄던 것일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희귀병을 앓고 있는 1급 지체장애인, 뺑소니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된 청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된 군인,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다섯 살에 고아가 된 아이, 16개월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 고교자퇴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는 고졸청년, 15년째 출판 거절을 당하고 있는 무명작가. 이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을까, 실패할 확률이 높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들이 성공은커녕 밥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들 거라고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나는 최고다 될 것이다",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외쳤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네 분수를 알아라.", "너 미쳤냐?"라고 비아냥거렸다.

 

여기, 주제 파악 못하는 젊은이가 또 한 명 있다. 학창 시절, 그의 번호는 언제나 1번 아니면 2번이었다. 키가 158.7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젊은이는 예술대학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는 단돈 30만 원을 들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시장골목 한 구석에 있는, 보증금 없는 월 12만 원짜리 방을 구했고, 3개월 과정의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그는 밤마다 소리를 지르며 발성 연습을 했다. 지독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공연에서 남자주인공으로 열연하게 되었고,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연기상도 받았다. 연기학원을 수료하던 날, 학원장은 면담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넌 키가 유난히 작아서 연기 활동하는 데 장애가 많을 거다. 아마 방송 출연은 어려울 거야. 방송 관련된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

 

이것은 작은 시련에 불과했다. 그의 삶은 탈락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MBC 공채시험에 4번, KBS 공채시험에 3번 떨어졌고, 수년 동안 원서를 넣은 대학에 모조리 낙방했다. 연이은 실패에 좌절한 그는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 40알을 모았고, 옥상 난간에 서보기도 했다.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운 없는 놈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다."

 

좌절은 했어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있었고, 희극배우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옥탑방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방송국을 보면서 다짐했다.

 

"난 저기 꼭 들어간다. 방송국아, 기다려라. 지금은 내가 여기서 너를 보지만, 언젠가는 방송국에서 여기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KBS 공채시험에 합격한다. 현재 그는 영화, 연극, 드라마,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꿈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성공을 일궈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능인 김병만이다.

 

그들은 성공은커녕 실패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스무 살에 가장이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타고난 재능도 없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그로 인해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악조건에 굴하지 않았고, 암울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실패에 무릎 꿇지 않았다. 끈질기게 도전했고, 무소의 뿔처럼 전진했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들이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꿈과 목표에 있었다. 그들에겐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간절한 꿈이 있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뤄내고 싶은 비장한 목표가 있었다.

 

흔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을 꼽는다.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생뚱맞다. 부모가 자녀의 학업성취에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 요인에 재력, 무관심, 정보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성적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는 학생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다. 그 의지와 노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꿈과 목표다. 실제로 명문대 합격생들은 확고한 꿈과 명확한 목표를 갖고 공부에 임했다. 그들은 원하는 대학, 가고 싶은 학과, 장래희망을 학창 시절에 이미 확고히 정해 놓았다. 여기서 잠깐, 서울대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공부를 했지만, 크면서 서울대에 진학하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에 참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때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교 1등은 해야 된다는 말을 줄곧 들어왔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교 1등을 꼭 해야 한다는 목표를 확실하게 세웠다. 이것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1등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다. 그 후 나는 정말로 1등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반문하는 부모들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서울대는커녕 반에서 중간도 못가는 실력이다. 공부에 특출난 재능을 갖춘 명문대생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아이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들이 서울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꿈이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갈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꿈과 목표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품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명문대에 들어갈 만큼, 공부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학생들도 이루고 싶은 간절히 꿈과 목표가 있는데, 재능도 실력도 노력도 부족한 당신 아이에게 꿈과 목표마저 없다면, 대체 무슨 수로 그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는 당신 아이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숨걸고 공부하는 그들을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어린 자녀에게 기권과 포기부터 가르칠 셈인가"

 

때때로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잠기곤 한다. '나느 왜 스물넷까지 고졸백수로 살아야만 했던가.' '수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순리대로 흘러간 것이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남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출중한 실력도 없었다. 환경도 상당히 열악했다. 무엇보다도 꿈과 목표가 없었다. 눈물날 만큼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비장한 목표가 없었다. 꿈 없는 내 청춘은 신경세포가 괴멸된 듯 무감각했다. 목표 없는 내 젊음은 뇌세포가 마비된 듯 무기력했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스물넷의 8월 1일을. 그날은 내 생일도 아니었고, 어떤 기념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새롭게 태어난 역사적인 날이었다. 재능도 없었고 환경도 열악했지만, 간절한 꿈과 비장한 목표를 갖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훌륭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교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듬해 나는 고졸백수를 탈출했고, 4년 뒤 초등 교사가 되었다.

 

당신 아이에겐 꿈이 있는가? 목표가 있는가? 공부를 안 한다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당신이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은, 꿈 없는 당신 아이가 고통도, 좌절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인간처럼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목표 없는 당신아이가 이십대 중반까지 고졸백수로 살면서 아무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봤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 아이에게 꿈과 목표가 없다면 성적이 떨어지는 것보다, 재수 삼수를 하는 것보다, 청년 백수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암울한 일이다.

 

재능이나 환경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성공의 조건은 노력이다. 99%의 노력이 천재를 만들고, 많이 아는 사람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재능과 실력도 노력을 했을 때만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당신 아이가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공부든 다른 무엇이든 쉼 없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그 쉼 없는 노력은 꿈과 목표로부터 나온다.

 

일등, 백점, 우등생, 명문대, 성공은 꿈과 목표라는 씨앗을 뿌렸을 때 비로소 거둘 수 있는 열매들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열매만 수확하려 든다. 자녀에게 목표를 세워보라고 조언하지 않고, 날을 세워서라도 백점을 받아오라고 종용한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하지 않고, 학원을 가라는 말만 한다.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백점 맞아라, 학원가라를 외치는 부모인가? 꿈이 무엇이냐, 무슨 목표를 세웠냐고 묻는 부모인가?

 

꿈과 목표는 인생이라는 배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꿈과 목표없이 사는 인생은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 꿈 없는 인생의 끝은 좌초요. 목표 없는 인생의 결말은 난파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꼭 꿈과 목표가 있어야만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꿈과 목표가 없어도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꿈과 목표가 있다면 끊임없이 노력할 확률은 높다. 꿈과 목표가 별로 생각나지도 않는데, 억지로 꿈과 목표를 세울 순 없다, 그래도 어쨌든 참고가 될 만한 글이기에 올려본다.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3:08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부모의 말 한마디에 자녀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자신감입니다. 자녀를 우등생으로 키워내고 싶은가요? 오늘부터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아, 넌 할 수 있어!"

"딸아, 네겐 그것을 해낼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

 

어떻게 하면 이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먼저 자신감을 심어주는 부모의 말이 자녀교육에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겠지? 논문을 검색해볼까? 성공한 부모들과 명문대생들의 예화를 찾아볼까?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싣지 않기로 했다. 자신감이라는 정서적 요소를 무미건조한 통계 수치로 치환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성공한 부모들의 사례나 명문대생들의 일화는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논문이나 성공담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메시지 전달에 흡입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호소력 짙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저자나 독자 모두 논문의 숫자놀음은 따분하고 머리 아플 테고, 일면식도 없는 성공자들의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저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이 독자들의 가슴에 더 와 닿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나는 비관과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자포자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일곱 꽃 같은 나이에 인생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다. 포기와 나태의 대가를 치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학하고 두 달 만에 중간고사를 치렀고, 며칠 뒤에 성적표가 나왔다. 48명 중 10등이었다. '10등이면 잘한 것 아닌가?' 벌써 잊었는가? 뒤에서 10등이었다. 내 앞에 38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밀려드는 좌절감, 한국말로 진행되는 수업을 알아듣지 못하는 당혹감, 해답지를 봐도 뭔 소린지 몰라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참담함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간혹 어떤 책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과대 포장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지금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고교시절의 방황 때문에 나는 스물네 살까지 고졸백수로 살아야 했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로 그랬다. 당시에는 '짜증난다, 재수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겨우 열일곱 나이에 비관과 염세의 늪에 빠져 인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절망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자녀교육 문제로 고민이 많은 부모라면 여기서부터 좀 더 진지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밑바닥을 모르고 끝없이 침전하던 나를 건져 올려 준 사람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내 인생의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은인이 내게 공부를 가르쳐 주거나 장학금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준 선물은 바로 이것이었다.

 

"넌 할 수 있어!"

 

고작 다섯 글자였지만, 내겐 천금보다 값진 말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린 줄 알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은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게 편지로, 전화로, 만날 때마다 쉼 없이 외쳐댔다.

 

"넌 할 수 있어!"

"네겐 무한한 능력이 있어!"

"넌 무조건 잘 될 거야!"

 

자폐적 삶을 살아가던 내 처지에선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아는가? 아무리 무능하고 비관적이고 무기력한 사람일지라도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들으면 두뇌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2년이 흘렀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아무런 변화도, 성과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은인은 여전히 외쳐댔다.

 

"넌 할 수 있어!"

 

그 쉼 없는 외침에 나를 감금했던 절망의 벽이 조금씩 금갔고,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온 빛줄기들이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되는대로 살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라는 비관에 빠져 있던 나에게 희망의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아!',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몰라!','사람답게 살고 싶다!'

태양이 지평선까지 내려앉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아침을 소생시키듯,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비관과 절망에 빠진 나를 소생시키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내게도 그 능력이란 게 있을지도 몰라.'

그와 동시에 나를 끝까지 믿어준 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날 믿어주는데, 그 믿음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절망의 벽을 깨부수고, 빛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절망의 동굴을 벗어나 희망의 광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만일 내게 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절망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거라고, 밑바닥 삶에서 희망을 꿈꿀 수 없었을 거라고,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은인을 생각할 때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감사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흐른다.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서 밝힌다. 은인은, 나의 친누나였다.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자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한 적이 있는가? 자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적이 있는가?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눈에서 감사의 눈물 대신 원망의 눈물을 쏟게 만들고 있다. 자신감은 불어넣지 않고, 잔소리만 불어넣고 있다.

 

당신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사람이 있는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희망의 밧줄을 던져줄 사람이 있는가? 수년 동안 변화와 진전이 없어도 끝까지 믿어 주고 격려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안타깝지만, 당신 아이에게는 그런 은인이 없을 것 같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우리 아이에게 그런 사람이 왜 없나? 엄마인 내가 있는데! 아빠인 내가 있는데!'

 

그렇다. 당신 아이에게 은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당신이다. 오직 당신 밖에 없다. 그 어떤 사람도 당신 아이에게 '넌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라. 당신이 수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를. 당신 아이도 똑같은 처지다. 부모인 당신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신 아이 또한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평생 듣지 못할 것이다.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자녀교육의 진리다. 특히,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잘 새겨듣기 바란다. 이제 당신이 자녀의 공부에 도움으 줄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 밖에 없다. 물론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많은 부모들이 '공부하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 한다. 반면 '할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부모는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라. 자녀에게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준 적이 언제였던가.

 

당신이 자녀에게 불어넣어 주어야 할 것은 잔소리가 아니다. 자신감이다. 오늘부터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대신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외치는 부모가 되라. 오늘 당신이 외친 이 말 한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킨다. 자신감, 당신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이자,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_ 전위성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11. 12:11

by 미스터신 2016. 3. 24. 12:40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 번째 나무가 자랑한다. "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 두 번째 나무는 "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며 으쓱한다. 세 번째 나무가 이에 질세라 뽐낸다. "나는 아주 향기로운 예쁜 꽃들을 많이 맺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한 그 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물'.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가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이때 성경책 북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그 접착제를 쓰겠다며 찾아온다. 자신이 개발 중인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강해 한 번 책장에 붙이면 뗄 때마다 종이가 찢어져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와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물병은 물을 충분히 담을 수 있고 또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꼭 맞는 조롱박만을 골라 물병을 만들었다. 어느 해, 엄청나게 큰 조롱박만 주렁주렁 열리자 고민에 빠진다.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조롱박을 잘라도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조롱박을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자 가게 밖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쓸어 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그 큰 조롱박 둘레에 그물을 씌운 다음, 그것을 허리에 동여매고 물에 띄었다. 조롱박이 커서 공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기에 둥둥 잘 떴다. 조롱박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바깥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의 또 다른 사례다.

 

장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물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과 입시생들의 면접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부모와 싸우고 온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순간 전쟁 시작이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너 그럼 굶어 죽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 공부해서 뭐 하려고 그래." 1973년에 연세대 철학과 원서를 쓸 때의 나도 그랬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인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쓸모없는 철학으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철학, 인문학의 그 쓸모없음에 쓸모 있음이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 철학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바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철학을 만나시길. 인문학을 만나시길. 그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철학의 힘_ 김형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1. 13:50

 

'버림'은 어렵다. 마음을 비우는 것도 그렇고, 책장이나 옷장 등을 정리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제대로 버릴 줄 알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법이다.

 

곤도 마리에는 일본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이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라는 그녀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충고가 나온다.

 

물건을 버릴지 아니면 남겨 놓을지를 구분할 때, '물건을 갖고 있어서 행복한가', '갖고 있어서 마음이 설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라.

 

마음이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해지지 않으며,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는다고 역시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녀만의 말이겠는가? 우리 중에 누군들 그런 경험 한 두 번 없는 사람이 있을까. 설레지도 않는데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은 '버리던' 그 경험 말이다.

 

그녀는 거듭 말한다.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자." 나는 그녀의 정리 비법은 '물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 즉 사람에게도 때때로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버림'과 '비움'을 통해 더 가치 있는 현재를 구성하라는 그녀의 권면을 받아들여, 집 짓고 도배한 지 12년이나 되는 목사관 사택의 아래층 벽지를 새로 발랐다.

 

벽지를 바르는 김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를 하면서 주워다주신 장식장 여러 개도 버렸다. 도배가 끝날 즈음에 어떤 교우가 '목사님 사시는 집이 궁금하다'는 말을 했대서, 그러면 이참에 목사의 집 여기저기를 구경하도록 열어둘 테니 주일예배 마치고 들어와 보시라고들 했다. 아울러 사택에 있는 목사의 물건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걸 점찍어 두면 차차 드리겠다는 말도 했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정리'일 테니까.

 

한 주가 지나자 목사의 사택을 구경한 교우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목사님 댁엔 쥐뿔도 없어요. 집이 휑해요."

 

그러면 '없는 것'하고 곤도 마리에가 말하는 '버림'하곤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내 생각에 답한다_ 허태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0. 13:47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식마다 다른 품성과 그릇으로 존재한다. 부모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은근히 비교하면서 아이를 멍들게 한다. 비교라는 방법으로는 부모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뀌기 힘들다.

 

우리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시적, 묵시적 경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는 한 가정 내에서도 형제자매끼리 비교하면서 좀 떨어지는 아이를 서슴없이 질책한다.

 

"너는 왜 언니처럼 못하니." "네 동생의 반이라도 닮아봐라." "형이 돼서 만날 그 모양이냐." 등등의 말로 어린 싹을 싹둑 잘라버린다. 자녀가 많지 않은 요즘에는 '엄친아' '엄친딸'과 비교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 아이가 받을 상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책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교를 당하는 아이가 부모의 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더 노력하길 기대할테지만 그것은 아이의 마음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런 아이 중에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 분발하고 노력하기보다 마음속 상처에 매몰되어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부모의 말처럼 언니나 형보다, 또는 다른 형제만큼이라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부모의 잦은 비교는 이내 아이를 지치게 하고 자존심을 잃고 좌절하게 한다. 결국에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았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고 무기력한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 아이를 치료해서 원상태로 돌리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부모는 비교하면서 채찍질하던 그때보다 더 큰 상실감을 안고 아이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아이는 일어설 수 없는 좌절의 늪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개별적인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식마다 다른 품성과 그릇으로 존재한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할 뿐이다.

 

부모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은근히 비교하면서 아이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아이는 격려와 칭찬을 받을 때는 더 잘하려고 애쓰고 자신감을 얻지만 비난이나 비교당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쉽게 포기해버리고 더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비교를 하더라도 열등한 아이에게 '너는 다른 사람보다 이런 것을 잘 하니까 열심히 하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와 같이 우등한 비교를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문제아의 절반은 줄어들 것이다. 열등한 비교를 해서 아이가 바뀐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보다는 거칠고 나쁜 방향으로 바뀌게 될 뿐 부모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뀌기는 힘들다.

 

실제로 부모의 비교 때문에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아이도 있었다. 매춘과의 전쟁 선포로 유명했던 한남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객원교수 김강자 씨가 종암경찰서장 시절에 만난 S양은 아버지가 개업의이고, 어머니는 유치원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S양과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언니와 오빠는 일류대를 다녔는데 S양은 어릴 때부터 줄곧 똑똑한 언니, 오빠와 비교당하며 자라왔다.

 

S양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받은 성적 때문에 본격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 성적을 보고 아버지는 "어쩌다가 우리 집에 너 같은 아이가 생겼냐? 네 언니, 오빠만큼만 해라. 그럼 내가 업고 다니겠다." 라는 말을 했고 S양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중의 한 남자아이와 성관계를 맺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간 S양은 예상대로 집 안에 갇혔고, 설상가상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임신의 두려움 때문에 다시 가출해서 그 남자아이를 찾아갔지만 남자아이는 자신이 아기의 아빠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며 발뺌했다.

 

S양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 모르게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고 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흥 업소를 찾아갔다. 그 업소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유흥가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들은 밤마다 늦게 들어오는 S양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춤추고 노래만 하던 S양은 처음 화대를 받고 속칭 2차라는 것을 나간 날 아예 집을 나와버렸다.

 

룸살롱과 단란주점을 전전하던 S양은 경찰의 일제 단속에 걸려 김강자 서장에게 붙들려 왔다. S양은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가족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김 서장은 부모에게 연락해 데리고 가도록 했다. 김 서장은 부모가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해 부모에게 모든 사실을 다 말했지만, 딸이 임신중절한 것을 안 아버지가 S양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고 S양은 그 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처음엔 부모도 그저 자극을 주려고 비교를 하기 시작했겠지만 점점 심해지는 비교는 급기야 자극이 아니라 깊은 칼이 되어 딸의 인생을 깊숙이 찌른 꼴이 되어버렸다. 성경에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 축에 껴들거나 견줄 생각은 하지 말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이 할 일의 범위는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니라 신이 정하는 것이고 우린 그 범위 안에서 행하는 것뿐이라는 의미다.

 

부모가 자꾸 비교하기 시작하면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기 시작한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이 어리석은 어른들처럼 우열의 잣대로 평가를 내린다는 게 무섭고 슬프게 다가온다.

 

유대인들은 아이에게 남보다 우월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남과 다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비교하는 대신 각자 다른 개성을 인정하고 길을 터주는 부모가 아이를 큰 사람으로 만든다.

 

차이는 증오를 낳는다_ 니체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21. 13:35

 

부모의 권위는 소리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뢰감을 자녀에게 확실히 심어줄 때 생긴다. 자녀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부모도 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아이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기준이 되는 사람의 서로 다른 말과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 행동할 것인가는 아이에게 너무 난해한 문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부모의 언행불일치는 곧바로 불신과 저항으로 이어진다.

 

부모의 권위는 소리침으로써 생기는 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뢰감을 자녀에게 확실히 심어줄 때 생긴다. 말이 많은 부모는 그 말들 중 대부분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로 자녀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고, 부모도 제시한 것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가 동영상 전쟁이다. 성에 눈을 뜬 아이들은 부모 몰래 또래끼리 포르노 동영상 같은 것을 구해서 보곤 한다. 아이가 늘 어린애인 줄만 알고 있다가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 부모는 당황하게 되고 일단은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공부나 할 일이지, 이런 것은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되는 건데 왜 보고 그래! 다신 보지 마!" 하고선 아이를 무안하게 만든 다음 휙 방으로 사라진다.

 

영화 <아메리칸 파이>를 보면 성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너한테 실망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빠도 너만 할 때 그랬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을 마치 아이들이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대하는 데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요즈음 아이들은 정신적인 성장보다 육체적인 성장이 훨씬 빠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대중화 등으로 인해 포르노 영상물을 쉽게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무조건 쉬쉬하면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성교육도 문제지만 일단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의 부모의 행동 또한 반성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환경을 자녀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녀의 행동이 걱정된다면 부모가 그런 것을 곁에 두지 않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너는 보면 안 돼, 나는 너 몰래 볼 거야.'라는 식의 태도는 몰래 보면 된다는 잘못된 기준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그 일을 계기로 부모가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는 불신을 가지게 한다. 그 이후로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자녀는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된다. 자녀에게 무조건 하지 말라고 말하기 이전에 부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행동을 학습하게 되어 규칙과 규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사람과의 약속도 잘 지키지 않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점차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잃는다. 그러면서 성취동기가 매우 낮아지고 매사에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거나 비도덕적 양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 자녀로 키우고 싶지 않다면 아이 앞에서는 말조심하자. 특히 행동은 더 조심해야 한다.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진지하게 그렇게 하고자 할 때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_ 카알 힐티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21. 13:11
| 1 2 3 4 5 6 7 ···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