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예쁜 아이들 많아?", "말은 잘 들어?" 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보통은 "당연히 아이들은 예쁘지. 가끔은 아닐 때도 있지만!" 하며 웃어넘깁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 라고 묻는 말은 약간의 선입견이 포함된 느낌이라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저 말에 절대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나머지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선행학습을 통해 성적만 우수한 학생들은 더욱 예쁘지 않습니다. 주입식 교육 또는 학원 공부에 한껏 취해 자신이 또래보다 앞서 있다는 착각에 빠진 아이를 데리고 수업하면 속된 말로 '가르칠 맛'이 안 납니다. 수업 내용은 이미 기계적으로 배워왔기 때문에 아이는 교사에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쌓이다 보면 교사와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지기 때문이지요. 자신은 답을 알고 있다고 답을 툭툭 말하는 경우까지 있는데, 그렇게 수업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양반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떤 아이를 좋아할까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아이도 아니고, 리더십이 좋은 아이도 아닙니다. 바로 '인사'를 잘하는 아이입니다. 물론 리더십이 좋고 운동도 잘하며 공부까지 잘한다면 너무 훌륭한 학생이지요. 하지만 그런 장점을 모두 갖고 있어도 '인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으면 '땡!'입니다. 인사는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 아이들은 생각보다 그 기본적인 것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아이들은 등교할 때 또는 하교할 때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이런 인사는 정말 기본이라서 대부분 잘 지키지요.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인사는 세심한 '감사'의 인사말, '미안함'의 인사말, '배려'의 인사말입니다. 수업을 할 때 활동 중에 수업자료를 나누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각 모둠의 나눔이들은 나와서 자료를 받아가세요~"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나와서 두 손으로 자료를 받고 그냥 자리로 돌아갑니다. 어떨 때는 그 누구도 "감사합니다!" 또는 '꾸벅' 하나 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인사가 중요하다고 교육하는데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면 고민이 늘어납니다. '오늘(지금) 인사교육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뫼비우스의 띠를 돌 듯이 수없이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틈이 날 때마다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한두 명을 제외한 아이들은 한 번 하고 잊어버립니다. 자료를 나누어줄 때마다 '어른에게 물건을 받을 때에는 양손으로 받고 감사를 표하는 거예요. 가벼운 목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고 껄끄럽습니다. 그래서인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아이는 기억에 콕 박힐 만큼 너무나 예뻐 보입니다.

 

'인사성'이란 단순히 인사를 얼마나 잘하는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감사함을 표현하고, 필요할 때는 사과와 유감을 표하며, 자신의 주변을 보살피는 행동입니다. '인사와 진로가 도대체 무슨 관계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사는 민주시민으로서 기본 자질이고, 기본 자질은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줍니다. 인사가 누군가에겐 꿈을 이루는 데 윤활제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초등학교의 학교폭력 사태는 중, 고등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우선 초등 수준의 학교폭력은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장난이나 다툼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거나 또는 일대다 구도로  변화하는 순간, 다툼은 학교폭력 사안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의 틀어진 감정이 부모에게 옮겨가고, 부모들 간에 감정이 상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송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가 법적 책임을 논하며 싸우고 있을 때 아이들끼리는 화해하고 잘 노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쉽게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되짚어 보면 초등학생의 학교폭력 사건은 대부분 단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는 실수하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충분히 사과할 법한 일이라서 서로 사과하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지요. 물론 사건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건은 이렇게 쉽게 해결 가능한데, 아이들 사이에서 왜 해결되지 못했을까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사건 당시 양쪽이 서로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다면 초등학교의 학교폭력 사건은 어느 정도 종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과의 말 한마디, 다시 말해 '인사' 한마디가 부족한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사는 단순히 "안녕하세요!"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에서 사소한 일에도 "고맙습니다"라고 감사를 표현하고,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전하며, 상대를 존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인사입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인사'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얽히고설킨 문제를 해결하듯 인사가 만능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인사 잘하는 아이는 친구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물론 사소한 다툼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평소에 인사를 잘하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신뢰감이 높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실수해도 친구들이 너그럽게 받아주고 이해해 줍니다. 애초에 어떤 실수를 하거나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해도 다른 친구들이 그 학생을 믿고 지지해 줍니다. 잘못한 일이면 사과할 테니까, 또 좋은 일에는 예쁜 말을 해 주는 친구니까, 어느 쪽이든 믿고 지지해 주는 겁니다. 마치 우리 어른들이 사회성이 좋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친구가 한 실수는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들의 사회생활과 똑같습니다.

 

학교에서 교직원을 대상으로 학교폭력 예방교육, 대처교육 등의 연수를 실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근무하는 학교 외에 타 학교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례를 접하게 됩니다. 실제 학폭위가 열린 사례들을 확인해 보면 공통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사과의 인사가 부족했던 것, 부모님끼리 연락하는 과정에서 서로 존중과 위로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 그 두 가지로 사건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이지요.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피해자의 부모님은 물론 가해자의 부모님도 무척이나 속상해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사과의 인사, 존중의 말 한마디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학교폭력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해야 합니다. 안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과 학교 등의 교육공동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러한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인사교육' 아닐까요? 학교폭력과 안전문제를 걱정하는 만큼 어른인 우리가 나서서 모범을 보이고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초등 진로교육이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를 만든다_ 이영균

by 미스터신 2021. 2. 8. 21:01

어떤 학생이 미래에 창의적인 인재가 될지, 어떤 분야에서 그러한 역량을 발휘하게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가상의 신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존의 연구들은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 지식을 많이 습득하고, 그 지식을 활용하여 호기심을 해결해 보는 경험을 많이 쌓을 때 미래에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면 지식의 양과 질, 지식을 습득하는 기술,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 호기심과 의지 같은 자질들이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식의 양을 늘리고 지식의 질을 높이며, 지식을 습득하고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는 기술을 익히고, 호기심 같은 개인적 자질을 키울 수 있는 학교 교육이 이루어져야 창의성이 길러진다.

 

어떤 학생이 무게 100kg의 역기를 들려고 한다. 그런데 그 학생은 지금 50kg밖에 들지 못한다. 자신의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100kg의 역기를 들고자 하는 마음이 곧 호기심과 의지라는 잠재력이다. 그런데 호기심만으로 100kg의 역기를 들 수는 없다. 역기를 들려면 근육의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쓸 줄 아는 기술도 필요하며, 꾸준한 연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의지, 근육, 기술을 갖추면 누구나 100kg의 역기를 들 수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 학생이 100kg의 역기를 들어 올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역기를 들 수 있는 근육이 바로 지식이다.

 

기존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면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한다. 고등학생에게 지식이란 교과서에 한정된 지식만 의미하지 않는다. 교과서는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지식의 기본 골격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교과서에 나온 지식만 배워야 한다면 지식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게 된다. 학생은 전수된 지식만이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지식을 받아들이고,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학생이 더 많은 영역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학생의 사고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면 창의성 교육은 작동하지 않는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정규 수업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학생 스스로 지식을 채워 갈 수 있도록 자극하고 장려하자는 말이다. 교사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 교사는 지식의 전수자이면서 동시에 학생 스스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환경을 마련해 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아는 것도 지식이고, 그 지식이 만들어진 '과정'과 '의미'를 아는 것도 지식이다. 수학 공식에 수치를 대입하여 답을 찾았다고 해서 그 공식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학 공식이 어떤 원리와 개념 정의에 근거하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 공식이 고안되었고, 그 문제는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해결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지식이 만들어진 '과정'과 '의미'를 안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 지식의 내용만이 아니라 '과정'과 '의미'를 알고 있을 때 지식은 창의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는 근육이 된다.

 

교과 학습량이 줄더라도 창의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는 근력을 갖추고 있으면 '학력'은 오히려 높아진다. 과거의 학력은 '지식'만 평가했지만 지금은 지식을 넘어 사고력, 판단력, 표현력, 주체성, 다양성, 협동성 등이 포함된다. 이것이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 곧 새로운 '학력'이다. 고등학교 교육의 일부분에서라도 학생들은 지식의 근육을 키우는 경험을 해야 한다. 창의적인 생각을 만드는 도구로서 지식은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넓이와 깊이로 측정되는 지식의 양

 

그릇이 넓고 깊을수록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양이 늘어나듯이 지식의 양은 넓이와 깊이로 표현된다. 넓이의 '최소 기준'은 교과서 지식이다. 학생이 교과서 지식조차 알지 못한다면 지식의 최소 넓이를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과도하게 세분된 과목 구분, 선택형 교과과정, 문이과 구분(교과에 의한 구분은 명목상 해소되었지만, 수능에 의한 구분은 여전히 유지되어 이수 교과에도 문이과 구분이 실재한다) 등이 교과지식의 최소 넓이를 확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여러 과목을 통합하여 교과목의 수를 줄이고 모든 학생이 기본적으로 이수해야 할 교과의 폭을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학생은 스스로 지식을 넓혀야 한다. 교실은 지식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런데 EBS 교재에 나오는 문제 풀이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교실은 지식의 확장을 막는 공간이 된다.

 

지식의 깊이란 암기-이해-적용-융합의 각 단계 가운데 어느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말한다. 융합의 단계를 논외로 한다면, 지식의 깊이에는 세 단계가 있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가 암기된 지식이다. 암기에 의한 학습은 동일한 문제가 동일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해 준다. 하지만 단순 암기된 지식은 다른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지식이 만들어진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리를 이해하여 얻은 지식은 암기된 지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의 문제들에 한정된다.

 

하나의 원리를 알아서 열 가지 원리를 깨우치려면 알고 있는 하나의 원리를 다른 영역에 적용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두 문제가 같은 원리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지, 풀리지 않는다면 원리를 어떻게 바꾸어 적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원리가 필요한지 경험해 보는 훈련이 영역 전이적 통찰력을 키우는 학습이다.

 

영역 전이적 통찰력이란 한 영역에서 얻은 지식을 그와는 맥락이 다른 영역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적용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은 훨씬 더 넓고 깊은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준다. 주어진 규칙이나 틀에 맞춰진 기계적 사고가 아니라, 다각도의 접근을 통해 문제를 새롭게 규정할 때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의 목적은 무엇인지, 현재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지, 중심 개념이 무엇인지,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재 활용되는 지식은 무엇이고 어떤 지식이 더 필요한지, 핵심 주장은 무엇인지, 행간에 숨어 있는 함축이 무엇인지, 생략된 전제가 무엇인지, 관점이 무엇인지, 맥락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창의적 지식을 만들어 내는 생각이 도구다.

 

하지만 대개 고등학교 교육은 암기와 이해에 머문다. 원리 이해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단순한 원리 이해만으로 창의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목욕탕 물이 넘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르키메데스뿐일까.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본 사람도 뉴턴만이 아니고,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장면을 와트만 본 게 아니다. 교과 지식의 이해를 넘어서 교과 지식을 다른 영역에 적용하고 관찰하는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도적인 학습 경험이 만드는 지식의 질

 

암기-이해-적용의 단계로 지식이 깊어지는 과정을 학생 스스로 주도할 때 지식의 질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정규 교과 수업에서 학생이 주도적인 학습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교실 수업이 바뀌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학생 스스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영역은 대개 독서와 탐구 활동이다. 하지만 학생에서 읽으라는 책을 읽고 학교에서 준비한 탐구 활동 프로그램에 수동적으로 참여하여 얻은 지식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리 유용하지 않다. 독서와 탐구 활동은 뭔가를 알고 싶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도 학생이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얻어야 창의력을 높이는 근육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하려면 학교는 학생이 학습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모든 수업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수업은 그러해야 한다. 지식의 넓이와 깊이를 학생 스스로 갖추면 지식의 질이 높아지고, 지식을 습득하는 기술도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지식을 넣어 주는 수업보다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기술을 길러 주는 수업이 학교에 필요하다.

 

지식을 습득하는 몇 가지 기술

 

우리는 수업 방식을 두고 이런 비유를 들곤 한다.

 

A. 교사가 학생의 식탁 위에 생선 요리를 차려 주고 먹으라고 하는 교육

B. 교사가 물고기를 잡은 후 학생에게 요리법을 가르쳐 주고 학생이 직접 요리하여 먹는 교육

C. 교사가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학생은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서 요리하여 먹는 교육

D. 교사는 여러 가지 음식의 재료를 알려 주고, 학생은 스스로 원하는 재료를 구해서 요리해 먹는 교육

 

A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교사 주도형 학습이고, D 방식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교육이다. D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일부 수업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이다. A 방식은 나쁘고 B,C,D 방식으로 갈수록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네 가지 방식은 학생의 수준과 교육 목표에 따라서 혼합적으로 조합할 수 있다. 모든 학생이 배타적으로 하나의 방식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창의성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창의력 중심의 교육을 위해서 A 방식 위주로 진행되던 기존 수업의 일부라도 B,C,D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지식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는 심화된다. 지식을 얻는 기술은 새로운 교수, 학습 방법이 필요하다. 학생이 다양한 수업 방식을 경험하고 스스로 지식을 채워 가는 훈련을 한다면 창의성 교육은 실현될 수 있다. 교실 수업과 관련하여 교수법 권위자인 조벽 교수는 <인재 혁명>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1)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탐색해 보고 그것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을 주라. 학생들이 어떤 과제에 대해 생산적으로 몰입해 있고 그 과제를 끝마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는 간섭하지 말라.

2) 무언가 하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흥분시키는 교실환경을 조성하라.

3) 흥미롭고 유용한 교수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라.

4) 학생들이 실수가 허용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독려된다고 느끼는 교실 분위기를 조성하라. 적절한 정도의 소음과 어수선함, 자율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하며, 학생에게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기술은 배우고 익힐 수 있다. 창의성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학교 수업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과 방법이 바뀌어야 하며, 학교가 변화하려면 대학 입시가 창의성 중심으로 달라져야 한다.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평가해야 고등학교도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대학 입시가 먼저 변화되어야 초, 중, 고등학교에서 창의성 교육이 이루어지며, 호기심, 의지, 협력, 공감과 같은 인성적 특성도 키워진다.

 

창의혁명_ 서울대학교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

 

by 미스터신 2020. 12. 12. 11:48

요즘 공부가 잘되는 것 같다. 문제집을 풀어도 좀처럼 틀리는 경우가 없고, 자습 시간에 공부하는 게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문제집을 펼칠 수 있고, 오랜 시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다. 아, 드디어 나도 상위권으로 진입한 걸까? 성적표에 좋은 등급이 찍히길 기대하며 시험 날만 기다린다. 그리고 얼마 후 시험을 치르고 받아 본 성적표. 이럴 수가. 점수가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등수가 떨어졌다. 난 분명 열심히 했고 문제집도 잘 푸는데 왜 이러지?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공부를 잘한다는 선배한테 물어봤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

 

"네가 아는 것만 공부해서 그래."

 

우리는 틀린 문제에서 더 많이 배운다

 

재차 강조하지만 공부는 힘들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지만 공부가 할 만하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문제를 맞힐 때' 이다.

 

문제집을 푸는 건 힘들어도 문제집을 채점할 때는 비교적 편한 마음이 든다. 문제를 대부분 맞혔다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공부할 의욕도 샘솟는다. 특히 수학 같은 과목에서 이런 경향이 유독 심하다. 나 역시 고3 때 문제집을 풀 때는 동그라미를 치고 싶은 마음에 한 문제 한 문제에 온 힘을 다 했다. 반면에 문제집을 풀었는데 동그라미 개수가 적으면 기분이 나빠질뿐더러 공부 의욕도 뚝뚝 떨어진다. 틀린 문제는 다시 풀어 봐야 하고, 오답 노트도 써야 한다. 기껏 열심히 문제를 풀었는데 할 일이 더 늘어나 버렸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가 생긴다.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는데 틀린 문제가 많으면 공부 의욕도 떨어지고 기분이 나빠지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맞히는 문제'만 풀기로.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문제집을 비교해 보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열 문제 중 네 문제를 틀렸다. 본인 성적에 맞춰 기본개념 수준의 문제집을 택했기에 다행히 반 이상은 맞힐 수 있었다. 어려운 문제도 몇 개 있고 계산 실수 등으로 아쉽게 틀린 문제도 있어서 네 문제를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열 문제 중 몇 문제를 틀렸을까? 공부를 잘하니까 다 맞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람이니까 실수도 가끔 할 테니 한두 문제?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똑같이 네 문제를 틀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네 문제를 틀렸어야만 한다.

 

우리는 정답을 많이 맞히는 것이 공부를 올바르게 하는 징표라고 착각한다. 물론 어떤 문제를 엄청 오랜 시간 끙끙대면서 맞혔다면 그 문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힌 문제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문제를 맞혔다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잘 끄집어내는 훈련을 했다는 뜻이다. 정말 제대로 된 '배움'은 틀린 문제에서 나온다. 내가 아는 개념을 내가 아는 방식으로 해석해서 '맞힌 문제'가 아닌, 내가 아는 개념을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해석해서 '틀린 문제'로부터 말이다.

 

아는 것만 공부하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틀리는 것이 힘 빠지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잖아도 힘든 공부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난도라서 오답이 자주 나오는 문제집은 머리가 아프니까 피하고 비교적 거의 다 맞힐 수 있는 문제집을 선택한다. 그러다가 성적이 안 오른다 싶으면 더 어려운 새로운 문제집을 푸는 것이 아니라 이미 푼 문제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푼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큰 폭의 성적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아는 것만 반복해서 공부하기 때문이다.

 

내 수학 실력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다. 수학을 가장 잘 풀던 시절인 고3 때도 문제집을 풀면 문제의 절반 정도를 틀렸다. 모의고사에서는 거의 100점을 맞는 수준이었지만 왜 문제집을 풀면 절반 정도를 틀렸을까? 내가 선택한 문제집은 21번, 30번과 같은 킬러 문항만을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편없는 정답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만 모아 놓아서 문제집을 풀 때마다 항상 끙끙대며 고생했다. 2시간 동안 한 문제를 못 푼 적도 많았다. 고3 때만 놓고 보면 수학 공부가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수학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이미 충분히 아는 문제를 점검하고, 이미 아는 개념을 복습하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제집을 풀며 '동그라미 중독'에 걸려 있었다면, 내 수능 수학 성적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쉬운 문제에 집착하는 현상은 잠이 많아서 공부를 안 하거나 게임 혹은 다른 취미에 빠져 공부를 놓아 버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망친다. 후자의 경우에는 뭔가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쉬운 문제에 집착할 때는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더 무서운 점은 서서히 공부가 망해 가는 것을 눈치채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항상 자기를 성찰하며 되새기자.

 

'아는 것만 공부하지 마라.'

 

공부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_ 송영준

 

 

by 미스터신 2020. 12. 5.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