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부가 잘되는 것 같다. 문제집을 풀어도 좀처럼 틀리는 경우가 없고, 자습 시간에 공부하는 게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문제집을 펼칠 수 있고, 오랜 시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다. 아, 드디어 나도 상위권으로 진입한 걸까? 성적표에 좋은 등급이 찍히길 기대하며 시험 날만 기다린다. 그리고 얼마 후 시험을 치르고 받아 본 성적표. 이럴 수가. 점수가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등수가 떨어졌다. 난 분명 열심히 했고 문제집도 잘 푸는데 왜 이러지?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공부를 잘한다는 선배한테 물어봤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

 

"네가 아는 것만 공부해서 그래."

 

우리는 틀린 문제에서 더 많이 배운다

 

재차 강조하지만 공부는 힘들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지만 공부가 할 만하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문제를 맞힐 때' 이다.

 

문제집을 푸는 건 힘들어도 문제집을 채점할 때는 비교적 편한 마음이 든다. 문제를 대부분 맞혔다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공부할 의욕도 샘솟는다. 특히 수학 같은 과목에서 이런 경향이 유독 심하다. 나 역시 고3 때 문제집을 풀 때는 동그라미를 치고 싶은 마음에 한 문제 한 문제에 온 힘을 다 했다. 반면에 문제집을 풀었는데 동그라미 개수가 적으면 기분이 나빠질뿐더러 공부 의욕도 뚝뚝 떨어진다. 틀린 문제는 다시 풀어 봐야 하고, 오답 노트도 써야 한다. 기껏 열심히 문제를 풀었는데 할 일이 더 늘어나 버렸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가 생긴다.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는데 틀린 문제가 많으면 공부 의욕도 떨어지고 기분이 나빠지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맞히는 문제'만 풀기로.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문제집을 비교해 보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열 문제 중 네 문제를 틀렸다. 본인 성적에 맞춰 기본개념 수준의 문제집을 택했기에 다행히 반 이상은 맞힐 수 있었다. 어려운 문제도 몇 개 있고 계산 실수 등으로 아쉽게 틀린 문제도 있어서 네 문제를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열 문제 중 몇 문제를 틀렸을까? 공부를 잘하니까 다 맞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람이니까 실수도 가끔 할 테니 한두 문제?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똑같이 네 문제를 틀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네 문제를 틀렸어야만 한다.

 

우리는 정답을 많이 맞히는 것이 공부를 올바르게 하는 징표라고 착각한다. 물론 어떤 문제를 엄청 오랜 시간 끙끙대면서 맞혔다면 그 문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힌 문제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문제를 맞혔다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잘 끄집어내는 훈련을 했다는 뜻이다. 정말 제대로 된 '배움'은 틀린 문제에서 나온다. 내가 아는 개념을 내가 아는 방식으로 해석해서 '맞힌 문제'가 아닌, 내가 아는 개념을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해석해서 '틀린 문제'로부터 말이다.

 

아는 것만 공부하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틀리는 것이 힘 빠지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잖아도 힘든 공부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난도라서 오답이 자주 나오는 문제집은 머리가 아프니까 피하고 비교적 거의 다 맞힐 수 있는 문제집을 선택한다. 그러다가 성적이 안 오른다 싶으면 더 어려운 새로운 문제집을 푸는 것이 아니라 이미 푼 문제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푼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큰 폭의 성적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아는 것만 반복해서 공부하기 때문이다.

 

내 수학 실력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다. 수학을 가장 잘 풀던 시절인 고3 때도 문제집을 풀면 문제의 절반 정도를 틀렸다. 모의고사에서는 거의 100점을 맞는 수준이었지만 왜 문제집을 풀면 절반 정도를 틀렸을까? 내가 선택한 문제집은 21번, 30번과 같은 킬러 문항만을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편없는 정답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만 모아 놓아서 문제집을 풀 때마다 항상 끙끙대며 고생했다. 2시간 동안 한 문제를 못 푼 적도 많았다. 고3 때만 놓고 보면 수학 공부가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수학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이미 충분히 아는 문제를 점검하고, 이미 아는 개념을 복습하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제집을 풀며 '동그라미 중독'에 걸려 있었다면, 내 수능 수학 성적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쉬운 문제에 집착하는 현상은 잠이 많아서 공부를 안 하거나 게임 혹은 다른 취미에 빠져 공부를 놓아 버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망친다. 후자의 경우에는 뭔가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쉬운 문제에 집착할 때는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더 무서운 점은 서서히 공부가 망해 가는 것을 눈치채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항상 자기를 성찰하며 되새기자.

 

'아는 것만 공부하지 마라.'

 

공부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_ 송영준

 

 

by 미스터신 2020. 12. 5.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