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바둑 대국은 참으로 길었다. 지금은 2~3시간 안에 끝나는 바둑이 대부분이라 아무리 길어도 4~7시간이면 끝나지만 20년 전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5시간이라서 초읽기까지 합하면 총 대국 소요시간이 11시간이 넘기 일쑤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1993년 이창호와 두었던 기성전 결승대국. 보통 밤 9시~10시면 대국이 끝나는데 그때의 대국은 7판이 전부 밤 11시를 넘겼다. 아마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늦게 끝난 대국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다. 일본은 지금도 오래 두는 바둑으로 유명하다. 기성, 명인, 본인방전의 '빅3'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8시간이다. 둘이 합하면 16시간에 이르니 하루에는 다 소화할 수 없어서 이틀을 잡고 진행한다. 너무 길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굉장히 짧아진 것이다. 1930년대에는 제한시간이 각 40시간에 이르는 바둑도 있었고, 1940년대까지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13시간이어서 3일에 걸쳐 대국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지금처럼 이틀로 줄인 것도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노력한 결과다.

 

바둑에서 제한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제한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수읽기가 깊어진다. 내가 어떤 수를 두면 그로 인해 전개될 앞으로의 판세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따라서 제한시간이 넉넉하면 더욱 효율적이고 함축적인 수가 나오게 된다. 바둑을 예술로 생각하는 일본은 긴 수읽기를 통해 보다 완벽하고 능률적인 수를 생각해내는 걸 바둑의 '도'이자 '미'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 바둑은 지금 같은 광속의 시대에도 8시간의 장고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로 제한시간이 짧아지는 속기바둑은 깊은 수읽기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여 둘 수밖에 없다. 바둑 기사에게는 이 역시 중요한 훈련이지만 아무래도 실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만큼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

 

속기 바둑과 장고 바둑 중에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을 수 밖에.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형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 장고를 하여 최고의 실력을 겨루는 것도 의미가 있고, 빠르게 감각을 대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프로 기사라면 두 가지 다 훈련이 되어야 한다.

 

바둑은 감각만으로 둘 수도 없고 실력만으로 둘 수도 없다. 나는 초중급자들에겐 오히려 빨리 두라고 말한다. 그 시절에는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꼭 좋은 수가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때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수를 놓아서 만족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자신만의 바둑 감각을 쌓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서서히 수읽기가 되기 시작한다. 또 수읽기를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덩달아 감각도 좋아진다.

 

이처럼 속기와 장고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의 경향은 빠른 쪽으로만 흘러간다. 요즘 국내 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1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5분, 10분, 20분짜리 초속기 대회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2시간, 3시간의 장고 바둑은 두세 대회 정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장고 바둑이 80퍼센트의 점유율을 이루고 속기 바둑이 20퍼센트 정도 비율이었다면 지금은 역전되어 속기 바둑이 80퍼센트, 장고 바둑이 20퍼센트가 됐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건 인정한다.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의 아찔한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대여섯 시간이 넘는 긴 바둑을 지켜보는 건 고역일 터다. 그렇지 않아도 바둑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긴 호흡의 바둑만 고수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속기 바둑은 일단 빠지면 컴퓨터 게임을 능가하는 박진감과 스릴이 있기 때문에 젊은 팬을 끌어들이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바둑의 질적 측면을 본다면 지나치게 속기전으로 흐르는 건 위험하다. 이건 그만큼 프로기사들이 한 수 한 수 깊게 생각해볼 기회가 줄어드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얕고 빠른 잔머리 회전만 발달시키고 깊은 사유의 능력은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쓰지 않는 능력은 퇴화하게 마련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둑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깊은 사유를 통해 발달해왔다. 현대 바둑의 틀과 수준을 진일보시킨 우칭위안의 바둑이나 신포석을 창안한 기타니 미노루의 바둑, 처절하고 지독한 수로 점철되는 조치훈의 바둑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이창호의 견고한 바둑 등 모든 위대한 기풍은 오랜 사유를 통해 탄생했다. 그런 사유가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기에 최고의 기사들은 제한시간을 막론하고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속기 바둑에만 길들여진 젊은 프로들은 장고 바둑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길게 오랫동안 고민해본 적이 없기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기원 소속의 배태일 박사가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발표한 자료가 있다. 물리학자인 그는 속기와 장고 바둑 사이에 진짜 바둑 실력의 함수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조사를 통해 그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는 젊은 프로 기사들을 '속기에 강한 그룹'과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으로 나누어 랭킹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속기에 강한 기사들은 20~22세 때 실력이 최고조에 이른 이후로는 별로 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은 20대 초반에는 부진하지만 오히려 25세 이후로 실력이 늘어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태일 박사는 한국 바둑이 최근 들어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국제대회도 시대에 맞춰 1시간짜리 속기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잉창지배나 춘란배, 삼성화재배 같은 권위있는 대회는 2~3시간 장고 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활약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대회는 한국 기사들이 우승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중국 기사들이 우승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 기사들도 대단한 활약을 한다. 바둑의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것이 너무 빠른 것만 추구하다가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라고 생각한다. 빠른 것은 쾌감을 준다. 재미있고 짜릿하다. 하지만 그것만 쫓다 보면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하여 결정해야 하는 때에 경솔한 판단을 하게 된다.

 

바둑 밖에서도 똑같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매사에 너무 즉흥적이다. 이들은 이성보다도 감정을 앞세우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좋은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솔한 행동, 후회할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른다. 바둑으로 표현하자면 눈앞의 몇 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잘못된 수를 놓는 것이다. 상사의 꾸지람에 즉흥적으로 사표를 냈다가 후회한다거나, 친구나 가족에게 모진 말을 퍼부어 상처를 준다거나, 실수나 잘못을 거짓말로 둘러댔다가 들통이 나는 일이 반복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우리는 그럴수록 진지하고 신중한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다. 논문 표절로 고위 공직자 후보에서 낙마하는 사람이나 한마디 실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유명인 등 장기적인 면에서 깊게 생각하지 않은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은 단 하나의 수를 결정하기 위해 제한시간 8시간 중 무려 5시간 7분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5시간 7분 동안 그는 정말 진지한 얼굴로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장면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둑알 하나 놓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5시간이 넘게 고민을 한 것일까?

 

하지만 그 한 수의 차이는 실로 지대한다. 당장은 그저 돌 하나의 위치일 뿐이지만 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승부에 결정적 차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잘못 놓은 돌 하나가 훗날 내 목을 조이거나 내 등을 치는 약점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어떤 바둑을 하겠다는 다케미야 9단의 선택이기도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그날 치를 대국이 영토 분쟁이 될 수도 있고 대마싸움이 될 수도 있다. 바둑의 미학을 중시했던 다케미야 9단은 그 5시간 7분 동안에 머릿속에서 수백 판의 바둑을 두고 허물고 두고 허물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놓은 결정의 한 수,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바둑을 펼쳐보겠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선언이었다. 결국 이 바둑에서 다케미야 9단은 승리했다. 나는 이것이 생각의 승리이자 실력의 승리라고 믿는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7. 10:10

 

바둑에는 '류'라는 것이 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나의 바둑은 제비처럼 빠르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모험을 무릅쓰는 격렬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창호는 무디고 평범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상대의 도발에도 무한정 인내하면 묵묵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봉수는 진흙탕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바둑으로 '잡초'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창혁은 두텁고 화려한 공격으로 '일지매'라 불린다. 이처럼 튼튼한 바둑 세계를 구축한 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류'가 있다. 이러한 '류'는 절대적으로 강한 것이 없다. 서로 맞서 싸웠을 때 어느 류에는 강하게 작용하고 어느 류에는 약하게 작용하는 면이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류가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보완하고 발전하면서 끝없이 진화한다.

 

바둑 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 바둑에서 새로운 류를 발견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신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보면, 참 잘 두긴 한다. 그런데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바둑이다. 누군가의 기보, 누군가가 창안한 정석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쯤 해서 창의적인 수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빤한 수만 나온다. 요즘 바둑이 왜 이렇게 재미없냐는 애호가들의 불평이 쏟아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바둑 교육은 학원식이다. 학원식은 선생이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빠른 결과를 내어 학생과 부모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상상의 자유를 주기보다는 공식을 외우게 한다. 생각하면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식대로 두도록 가르친다. 그 결과 아이들의 바둑 시합은 생각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정보를 넣어두었나를 겨루는 시험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식의 바둑 교육으로는 자기만의 '류'가 나올 수가 없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가 교과서 밖의 지식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틀에 박힌 교육은 틀에 박힌 사고, 그리고 틀에 박힌 자아를 만든다. 생각이 한정되면 자아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은 나의 자아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준 좋은 스승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는 우리나라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선생님은 평생 딱 세 명의 제자만 받으셨다. 세계 바둑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우칭위안과 관서기원의 창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다. 우칭위안은 1930~1950년대 일본 정상급 바둑 기사들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조리 상대의 치수를 고쳐 '기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고, 하시모토는 1940~1970년대에 걸쳐 본인방전, 왕좌전, 십단전, 기성전을 무려 아홉 번이나 우승한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세계 최초의 바둑 올림픽인 잉창지배에서 우승하여 챔피언이 되었으니 선생님은 제자 세 명을 모두 세계 1인자로 길러내신 셈이다.

 

나는 열한 살 때 선생님의 생애 마지막 내제자가 되어 9년을 함께 살았다. 아담한 크기의 일본식 목조주택에 여든이 넘은 선생님과 열살배기 나, 그리고 선생님의 며느님인 마마짱과 나중에 같이 살게 된 아키다 강아지 벵케이, 이렇게 넷이 살았다. 그런데 그 9년 동안 선생님에게 바둑을 배운 적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선생님은 지도 대국에 인색하셨다. 아주 가끔 복기를 해보라고 하는 것 외에는 거의 말씀도 잘 안 하셨다.

 

어린 마음에 서운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연세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어두워진 건 아닐까, 나를 왜 불러들였는지 잊으신 게 아닐까 걱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흐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 식사때 선생님이 내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보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답이 없는 게 바둑인데 어떻게 너에게 답을 주겠느냐. 그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

 

정말로 9년 동안 함께 살면서 세고에 선생님은 나에게 바둑을 어떻게 두라든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두라는 식의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구와 어떤 바둑을 두고 돌아다니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야말로 아무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바둑을 배웠다.

 

선생이 헤매는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건 아주 쉬운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학생은 그 답을 받아먹을 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고에 선생님은 바둑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스승은 그저 방향만 제시할 뿐, 혼자 공부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올바른 바둑 교육이었다. 선생님의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에 나는 단 하나의 묘수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끙끙거리며 황금 같은 10대를 보낼 수 있었다.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바둑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나는 언제나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바둑을 두었다. 그것이 나중에 나만의 공격형 바둑으로 자라서 '제비행마', '마술사', '화염방사기'라는 독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생각의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개성이 강해지고 자아가 단단해진다. 인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갈 자신감과 확실한 인성이 형성될 수 있다.

 

생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 답을 알려주는 도구다.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일상의 작은 선택마저도 남들의 생각을 물으며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래야 할 지, 저래야 할 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도움을 구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고민을 상담해주는 인생 멘토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혼자 힘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는 그만큼 불안한 자아를 가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사람들은 행복이 돈이나 명예, 성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진짜 행복은 단단한 자아에서 온다고 믿는다. 자아는 자존감이다. 자아가 단단하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한다.

 

물론 이러한 자아는 거저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과 자기 성찰,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디 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고 신념대로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2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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