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분명 동양과 비교했을 때 사고 체계가 본질적으로 외향적이다. 자기 표현이 중요하고 언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 발표가 생활화되어 있다. 교실을 벗어난 과목이 더 많고, 활발한 교외 활동을 한 학생에게 높은 성적을 준다. 내향적이고 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설 곳이 많지 않은 생태계다.

 

주목받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곳에서 나는 거침없이 주장하고 표현하는 법을 익혔다. 벼랑 끝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나를 홍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향적 기질을 온 몸에 두른 탓에 주목받고 표현하고, 설득하고 비판하는 것에 온통 길들여진 상태로 고요한 한국의 교실로 돌아왔다. 한국에 오니 친구들은 내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했다. 나의 직설적이고 강한 어투에 상처받았다고 토로했다. 주장이 너무 강해서 다가가기 힘들고 말 붙이기가 무섭다고, 친해지기 힘든 성격이라고 말했다.

 

내향적인 본질을 무시한 채 표면적인 외향적 기질만을 뒤쫓기 바빴던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이도 저도 아닌 성격이 되어 있었다. 나는 국제학교를 다니며 익혀온 나의 습성을 원망했다.

 

서구의 교육 방식이 이상적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계급 사회에 기반한 철저한 능력주의, 그것이 서구식 교육 방식이다. 다르고 독특하면 매도하고 고립시키는 것이 한국의 방식이라면, 비슷하고 특징이 없으면 재능없다고 무시하는 것이 서구의 방식이다. 내향적인 성격은 소수 집단이다. 극히 적은 내향인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아이들은 너드(괴짜, 찌질이)가 될 뿐이다.

 

동양은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한다고 비난받지만, 서양은 다름을 우상 숭배한다. 이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폭력적이다. 개성 강하고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이 강해야 유능한 사람이라는 강박이 학교 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말 없고 홀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강점은 쉽게 주목받지 못했다. 외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위협적인 무기가 있어야 했다 .눈에 드러나는 장기가 있어야 했다.

 

어릴 적 나는 배려하고 공감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신중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어에 '착하다' 라는 말은 없다. '착함'은 능력도 칭찬도 될 수 없다. 착했던 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착함을 지우고 능력과 재능을 택했고, 경청을 없애고 자기 주장을 선택했다. 내향성을 부정하고 외향성을 덕지덕지 붙였다. 경청과 자기 주장을 동시에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향적인 사람들이라고 다 자기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경청하고 존중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외향인의 전형적인 기질을 닮기 위해 나는 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어린 내게 점진적으로 성격을 바꿔갈 여유는 없었다. 배려하면서 동시에 확고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기질적으로 외향인과 내향인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학습법, 인간 관계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다. 정해진 학습법, 문제 해결법은 없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람마다 효율이 극대화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무작정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한다고 훌륭한 교육이 아니다. 책을 읽고 조용히 사유하며 지식을 흡수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공부법을 따라야 한다.

 

질문하지 않는 교실은 답이 없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G20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에 왔을 때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구했다. 개최국인 우리나라에 심심한 감사의 말과 함께 질문의 기회를 선물한다고 했다.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중국 출신 기자가 끼어들었다. 한 다큐멘터리는 이 장면을 전면으로 내세워 질문하지 않는 한국 교육을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과 어색하게 감도는 정적을 화면에 가득 담으며 질문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꼬집었다. 나는 이 장면이 상당히 불쾌했고 수치스러웠다. 질문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도와 개성은 무시한 채 오직 '질문'에만 목을 맨다. 다큐멘터리의 취지와 관계없이 내가 불편함을 느낀 이유는 '질문'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질문을 못하는 환경은 문제가 있지만, 질문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거다. 주변을 의식해 눈치를 보며 질문을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질문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스트레스를 느껴서도 안 된다. 질문을 강요하는 것 또한 질문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폭력이자 차별이 될 수도 있다. 의견을 교환하고 다수가 동의하는 현명한 답을 찾는데 분명 상호 작용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질문의 과정을 통해 정답을 구하는 사람이 있듯, 반대편에는 곰곰히 홀로 생각하며 가만히 스스로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주입식 교육은 비판하면서 서양식 교육 방식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주입식 태도는 왜 방조하는가. 서구식 교육 방식을 맹목적으로 쫓으면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조앤 롤링이 나올까. 학생의 기질과 성향은 외면한 채 우선적으로 서구식 교육 모델부터 주입하며 위인을 기대하는 발상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기업 업무 환경에서도 오픈 스페이스를 앞세워 사무실 칸막이를 없애거나 수직적 상하 관계를 완화한다며 개인 사무실을 지양하는 추세다. 왔다갔다 이동하는 동료들의 발소리, 오며 가며 건네는 잡담 소리, 회의실에서 스며나오는 각종 잡음... 자극을 처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는 내향인들은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다. 자극이 최소화된 공간이야말로 내향인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조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인데 말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적 교실 책상은 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서 얼마든지 골똘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서양은 다르다. 교실 규모가 작아 주목이 불가피하고 책상은 동그랗게 배치해 서로를 마주보게 한다. 끊임없이 상호 교류를 독려한다. 대화와 의견을 주고받고 질문과 공유에 대한 압박을 가한다.

 

나 또한 과거에 질문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토론과 논쟁에 취약한 자신을 꾸짖고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토론의 학업적 성과가 매우 약한 사람도 있다. 발표가 학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사람 또한 분명 있다.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타인의 방식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만큼 자신의 재능을 망치는 건 없다. 사회적으로는 폭력이고 개인적으로는 재능 낭비다.

 

서양의 기준을 정답이라 여겨 그들의 기준에 따라 공부했으나, 무엇을 배우든 공부는 괴로웠다.  공부가 즐거움인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배움을 싫어했다. 내게 맞는 학습법을 찾아 실천하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은 커졌고 공부가 점점 좋아졌다. 무엇보다 학습이 뚜렷한 성과로 이어졌다. 가시적인 결과물의 성취도 또한 질부터 달랐다. 배우는 속도, 지식의 양, 사유의 깊이, 모두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내가 의욕 넘치게 학문에 애착을 가지게 된 이유는 공부하는 시간이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책을 수차계 반복해서 읽고 듣고 필사한다. 또 곱씹어 읽고, 신중하게 사유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로 쓰면서 어느 때보다 많이 배우고 성장했으며 성취했다. 내게는 논쟁보다 독립적 사유 방식이 더 어울리는 학습법이었다. 스펀지처럼 모든 지식을 놀라운 속도로 흡수했고, 성장을 발판으로 공부는 즐거움이 되었다.

 

남다른 패션 스타일을 지니고 독특한 식습관이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학업적 성과를 이룬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정답이 없듯, 학습법도 저마다 다르다. 결과로 증명하면 되고, 성과로 승부하면 된다. 서양의 방식을 쫓기보다, 우리에게 최적화된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을 우직하게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내향인입니다_ 진민영

by 미스터신 2021. 4. 6. 1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