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한 메리 고든이라는 캐나다의 교육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치원 교사를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아기가 가진 힘'을 발견하고 지역에 사는 갓난아기를 초,중등학교에 초대해 아이들로 하여금 한 학년 동안 성장 과정을 지켜보도록 했다. 특히 초중등 아이들 사이의 폭력이나 공격성, 왕따 현상과 같은 문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대두된 때에 메리 고든의 '갓난아기 요법'은 특별한 마법의 힘을 발휘했다.

 

나는 이 '공감의 뿌리'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었기에 몇 년 전 연구를 위해 캐나다 토론토에 머물게 되었을 때, 하루 날 잡아 '공감의 뿌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운이 좋으면 메리 고든 선생도 직접 만나보고 생생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사무실은 토론토 시내로부터는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 주변은 대단히 조용하고 한가했다. 유리로 된 멋진 건물 5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메리 고든 선생은 토론토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밴쿠버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직원 한 분이 친절하게도 '공감의 뿌리'를 소개하는 책자를 골고루 챙겨 주었다.

그 속에는 앞의 사례처럼 유치원이나 초중등 학교 교실에서 운영되는 프로그램들이 자세히 안내되고 있었다.

 

'공감의 뿌리' 재단 대표인 메리 고든 선생은 말한다.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아기가 충동을 조절하는 법을 어떻게 배워나가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갓난아기'와의 만남이라는 체험학습을 통해 초등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공감의 뿌리'식의 교육성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일반 학교에서 정규과목으로 채택하는 학교가 꾸준히 늘어 지금까지 이 교육을 받은 학생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제는 캐나다는 물론 미국과 호주, 영국, 뉴질랜드 등으로 '공감의 뿌리' 학습법이 확산되면서 학교폭력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거나 줄이는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메리 고든은 이미 2010년에 한국에서 열린 '사회적 기업가 정신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공감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갈등을 해결하지도, 이타심을 발휘하지도, 평화를 추구하지도 못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해마다 10대 청소년 300명 내외가 자살하는 나라, 청소년 스트레스 지수가 세계 최고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라도 모두들 떠나버리고 싶어 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2014년 4월의 세월호 사고와 그 이후의 과정을 보더라도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떠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어디에 살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한국사회, 특히 언론 및 정치권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온 나라가 돈벌이에 혈안이 된 나머지 사회 전체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메리 고든의 '갓난아기 요법'은 앞서 살핀 바, 갓난아기와 어머니를 일반 학교에 정기적으로 초대해 1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갓난아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생들끼리 생각과 감정, 느낌을 공유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대체로 이 교육을 받은 학생 중 70% 이상은 봉사정신과 친사회적 행동이 증가했고, 프로그램 보급이 10년이 지나면서 캐나다 전역에서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현상이 90%나 줄어든 것으로 관찰됐다.

 

'공감의 뿌리', 과연 무엇이 어떻게 작용해서 마술 같은 효과를 내게 될까? 내가 보기엔 유치원생이건 초중등생이건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과 '갓난아기'와의 만남이 '뜻밖'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보인다. 유치원 아이나 초중등 아이들은 갓난아기를 보면 '뜻밖에' 자기 동생이 온 것처럼 보일 것이고,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런 아기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갓난아기의 특성이다. 갓난아기는 아직 사회적 편견이나 고정 관념에 노출되지 않았다. 아주 순수한 편이다. 이런 아기를 만나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감정을 재발견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곧, 갓난아기와의 '뜻밖의' 만남이 결국은 학생들 자신의 순수한 원래 모습과 접촉하게 함으로써, 사람마다 갖고 있는 '공감의 능력'을 발달시키게 되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강자 동일시'만 하는 게 아니라 '약자 동일시' 곧  '약자와의 공감'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의 고통이나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약자의 내면을 이해하고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나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역량,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게다가, 공감 능력의 발달과 함께 학습 능력도 향상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인이나 다른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은 집중력을 높이고 이해력을 높임과 동시에 창의성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이미 900년 전에 중국의 소동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대나무가 내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 손에 붓을 쥐고 눈으로 집중을 하면, 그림이 바로 내 앞에 떠오른다. 그럼 그림을 재빨리 잡아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냥꾼을 본 토끼처럼 그림이 잽싸게 사라진다."

 

로버트와 미셸 루트번스타인이 쓴 '생각의 탄생'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힘'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란 책에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는 긴 역사의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 고찰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앞으로 세계의 경제는 경쟁과 독점의 시대가 아니라 공감과 협력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망한다.

 

"인간 이해에 기초하고 분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협업의 경제 체제에 동승한 개인, 기업, 나라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렇다. 갈수록 석유 문명에 기초한 경제 성장의 신화는 종말로 치닫는다. 자본주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생산력을 발달시켰지만, 마치 '이카루스 역설'처럼, 그 과정 속에서는 우리는 자연이나 타자와의 공감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공감 능력마저 잃어버린 게 아닐까?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세 아이 모두 내가 직접 경작하는 텃밭에서 지렁이와 함께 놀던 때가 있었다. 보통 도시 아이들은 지렁이를 보면 기겁을 한다. 사실 어른인 나도 지렁이나 뱀을 보면 끔쩍끔쩍 놀란다. 그런데 지렁이는 사실 유기농 농사에서 엄청 중요한 일을 한다. 음식물 등 각종 유기물을 분해하여 마침내 퇴비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생태 순환형 살림살이 경제에 지렁이는 매우 소중한 존재다. 이런 걸 알고 난 뒤 나는 아이들에게 "지렁이가 없으면 맛있는 상추도 못 먹는다. 지렁이가 큰 일꾼이란다. 지렁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알려주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지렁이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행여 지렁이가 밭에서 기어 나와 길가에서 길을 잃고 있으면 아이들은 조심스레 지렁이를 손에 담아 밭으로 넣어주곤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죽임과 혼란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식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자란 아이들은 감성이 살아 있고 오감이 살아 있으며 자기 삶의 책임성 있는 주체로 잘 자란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공감, 소통, 연대)의 회복이야말로 메리 고든이나 제레미 리프킨의 메시지처럼, 나를 살리고 관계를 살리고 경제와 세상을 살리는 토대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 교육혁명_ 강수돌

 

by 미스터신 2016. 3. 14. 11:17

 

언젠가 대안교육 전문지 '민들레'에서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바로 이거다!"라고 느낀 적이 있고, 내가 쓴 책 '나부터 교육혁명'에도 그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옆집 아줌마'의 위력은 너무나 크다.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우선, 내가 여기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아줌마 또는 어머니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건 아니다. '옆집 아줌마' 이야기의 본질은, 아빠는 돈벌이 기계로 전락하고 동시에 엄마는 아이의 성적 관리자가 되어버린, 우리 모두의 뒤틀린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람직한 모습은, 엄마나 아빠가 일정한 사회경제적 활동을 하되 하루 중에 한 나절만 일하고 그 외 시간의 많은 부분을 자녀 교육이나 자녀와 함께 활동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지금처럼 엄마 아빠의 일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상태로, 그리하여 엄마가 아이 교육,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의 점수 올리기나 일류대 입시 준비를 전적으로 담당하다 보니 사실상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중노동을 수행한다. 잔업, 철야, 특근도 마다않고, 또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먹으며 자존감이 상하는 일도 겪어가며 돈 벌어다 주는 아빠나, 아이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엄마나 삶의 스트레스는 극한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시급히 바꿔야 할 현실이다.

 

이런 잘못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한 위에서 이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다시 보자.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자녀 교육에 관한 좋은 강의를 듣고 아무리 좋은 교육 서적을 읽은 뒤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막상 다음 날 '옆집 아줌마'만 만나고 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옆집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는가?

 

옆집 아줌마가 먼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인성교육이고 자연교육이고 대안교육이고 말은 참 좋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앞으로 더 살벌해질 세상에서 과연 아이가 먹고살 수나 있을까?"

 

그렇다. 역시 생계 문제다. 생각해보니 지금 아빠도 바로 그 생계 전선에서 매일 힘겹게 살고 있지 않은가? 경쟁은 치열하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다리 질서에서 높은 등급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이도 나처럼 '뺑이치고' 살게 될 것 같다. 심하면 서울역 같은 데서 보는 노숙자처럼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돈다.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결론은 "그래, 사실 그 말도 맞네. 아이고, 이를 어쩌나? 혹시 좋은 학원이나 과외 선생 아는 데 있어요?" 로 끝난다.

 

이제 이 부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받는 가운데 과연 부모인 나는 행복하게 자라왔던가? 우리 스스로의 경험을 반추해보자는 얘기다. 만약 중3이나 고3을 다시 한 번 해보라 하면 기꺼이 할 것인가?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가? 만일 본인도 행복했고 아이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느낀다면 그렇게 계속 가면 된다. 사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도 '모두 행복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아이나 어른이나 지금의 모습이 행복하다면, 더욱 치열하게 경쟁적으로 공부하도록 하면 된다. 그것이 참 행복의 길로 느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 교실 붕괴를 촉진하는 아이들, 탈학교를 결심하는 아이들을 곰곰 생각해보면 결론은, 이 모든 일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들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너도 나도 자기 자식을 전쟁과 같은 입시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다른 말로, 보다 슬기로운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계속한 것이 지난 50년 정도의 대한민국 교육이었다. 대학 입시, 나아가 일류대 합격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고교로부터 중학을 거쳐 이제는 초등 수준까지 내려갔다.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아니면 태아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몇 년 전, 어떤 엄마가 세 살짜리 아이의 혀 밑 근육을 잘라 영어 발음을 원어민처럼 하게 만든다고 하는 바람에 해외 토픽감이 된 적도 있다. 다른 편에서는 많은 부모들이 초등 아이들을 억지로 부모 품으로부터 떼어내 '조기유학'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바람직한 결과를 얻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특히, 이른바 '기러기 아빠'들의 애환이나 자살 소식이 들릴 때면, 과연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미쳐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식으로 가면 과연 10년이나 20년 뒤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과연 더욱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난공불락의 엄청난 실력을 듬뿍 다지고 배움의 기쁨에 행복해하며 모두 멋진 실력자가 될까? 옆집 아줌마가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모두들 따라 갔을 때 이 세상은 과연 좋아지는 걸까, 아니면 갈수록 나빠지는 걸까? 우리가 길을 가도, 이게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셋째, 아이의 생계 문제는 굳이 부모가 일일이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가 머리가 커지면 스스로 고민하게 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모든 걸 마련해주는 것이 진정 행복할까 아니면 아이가 커서 독립해 숟가락 하나라도 스스로 장만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옛말에 "아이 먹을 것은 자기가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진정 걱정할 것은 아이의 생계가 아니라 꿈이다. 꿈을 키우는 아이, 그 꿈을 좇아 즐거운 마음으로 실력을 키우는 아이, 그 실력을 자기 행복만이 아니라 사회 행복을 위해 쓸 줄 아는 아이, 바로 이런 '일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행복한 세상이 된다.

 

그렇게 꿈을 키우고 실력을 키워 사회 헌신까지 하는 아이들은 생계 문제도 거뜬히 해결한다. 꿈을 좇아 정진하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실력을 인정받아 먹고살 길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호화판으로 살지는 못해도 소박한 살림살이는 탈 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편, 매일같이 생계 걱정만 하며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하니, 결론은 뻔하다. 늘 생계에 허덕거리며 살거나, 생계 해결을 한답시고 대부분 돈과 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이들은 삶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재테크 이야기만 하고 산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속물 사회 또는 물신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꿈과 소신에 따라 사는 이들의 인생은 향기가 나고 멋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멋진 사회, 행복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바로 그 옆집 아줌마조차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도록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교육혁명_ 강수돌

by 미스터신 2016. 3. 14. 08:04

강남의 아이들은 비싼 과외와 학원으로 하루에도 수십 곳을 이동하며 배운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못한 다른 지역아이들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노동을 보는 눈, 강수돌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3. 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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