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education/newsview?newsid=20150509094108278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5. 24. 23:04

 

언니가 조카를 낳았다. 맞벌이인 탓에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게 되었고, 현재는 부모님이 열심히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머니가 도맡아 애를 보고, 아버지가 옆에서 조금 거든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버지는 한 눈으로는 TV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아이를 본다. 함께 놀아 주는 법을 모르니 TV를 보게 하거나, 무언가를 먹이거나다. 그도 안 되면 재운다.

 

어머니는 예전에 우리를 키우던 가락이 아직 남았는지 애를 어르고, 노래를 불러 주고, 말도 붙이며 놀아 준다. 이렇듯 아이 대하는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두 분에게도 비슷한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조카에게 '착한 아이'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착한 아이'의 기준은 단순하다. 최대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당신 보시기에 예쁜 짓, 즉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하면 된다. 하루에 똥을 세 번 싸는 것은 부모님을 힘들게 하니 '나쁜 아이'의 행동이다. 밖에 나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 또한 '나쁜 아이'나 하는 짓이다.

 

부모님이 원하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선 하루 종일 울지 않고 혼자서 놀다가, 때 되면 밥을 먹고, 아무 것에도 호기심을 보이지 않으며, 누군가 쳐다 보면 방긋방긋 웃어야 하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렇게 주욱 늘어놓고 보니 영락없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아이다.

 

아이가 크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려면 여러 가지 경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러나 부모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육아법에서는 그런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착한 아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냥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실패하지 않는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고, 누군가 시키는 일을 아무런 의심 없이 실행한다.

 

나라도 조카를 '나쁜 아이'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푸르넷, 책나무 2015년 5월~6월 / 이나영 , 서울시 서초구 서초3동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5. 9. 19:36

운명, 사랑과 상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오늘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새 출발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졸업식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그저 이야기 세 가지 입니다.

첫 번째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리드대학이라는 곳을 6개월 다닌 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 동안은 비공식적인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진짜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제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제가 대학을 나온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예정되었고, 그것으로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났을 때 변호사 부부는 마음을 바꿔, 여자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제 생모는 한밤중에 입양 대기자 명단에 있는 다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 생모는 나중에야 제 어머니(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양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이 때문에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에게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나고 저는 정말 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그때, 연간 약 6천 만원 정도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였던 부모님(양부모)은 평생 동안 모든 돈을 제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저는 그만한 돈을 쓰는 것에 대해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살면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살면서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저를 위해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결정을 내릴 때는 조금 두려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가 지금까지 한 가장 훌륭한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이유가 사라진 대신 흥미로운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낭만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청강생이다 보니 기숙사에 방이 없어 친구들 방의 침대 옆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 위해 50원짜리 빈 콜라병 모으는 일을 했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무료 급식을 받아 먹기 위해 일요일 밤마다 10킬로미터를 걸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걸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가다가 제가 부딪친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제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타이포그래피(서체)교육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에 있는 모든 포스터와 표지물들은 손으로 쓴 아름다운 글씨체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정규과목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보려고 서체 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란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났습니다. 우리의 맥(Mac)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대학을 그만두지 않고 타이포그래피 강좌를 듣지 않았다면 맥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윈도우즈는 맥을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지금처럼 다양하고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무렵 제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것은 분명 모두 이어진 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제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우즈(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공동창업자)와 저는 애플을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애플은, 연매출 20억 달러에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매킨토시 컴퓨터를 시장에 출시한 해에 저는 막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냐구요? 글쎄, 애플이 커가면서 우리는 회사를 운영할 전문 기업인을 고용했고 첫 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관점에 서로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서른 살이었던 저는 쫓겨났습니다. 당시 제 삶의 전부였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려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첫 몇 달 동안 무엇을 할지 정말 몰랐습니다. 앞서 간 세대는 물러나게 된다는 느낌, 내게 지휘봉이 전해진 것처럼 또 누군가에게 전해지도록 내려놓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데이비드 팩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그들을 그렇게 못살게 군 것을 사과했습니다. 저는 공식적인 실패자였습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 겪은 일도 그것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거부당했지만, 여전히 내 일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최고였습니다. 나를 짓누르던 성공에 대한 부담은, 확신은 없지만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내 삶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넥스트(NEXT)라는 회사, 픽사(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시작했고, 나중에 아내가 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놀라운 반전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르네상스를 이루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 픽사에서 만난 로린과 저는 한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 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끌어간 유일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처럼, 그것은 해가 지날수록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을 때,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당신은 옳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 말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제 안에서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로 이어지면, 그 결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삶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숭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약 일 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췌장에 악성이 분명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길어야 세 달에서 여섯 달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죽음의 준비입니다. 그것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늦게 목구멍에 내시경을 넣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췌장에서 몇 점의 세포를 떼어 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매우 드물게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췌장암이라고 의사들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앞으로 몇 십 년 동안은 그렇기를 바랍니다만,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지적 개념만으로 알던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람조차 거기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훌륭한 창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내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음을 청소하고 새로움을 위한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그때, 여러분들도 점차 낡은 것이 되고 치워질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전 세계 목록'이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그 책은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스튜워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시적인 표현들을 가미해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생기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고쳐 펴냈고, 결국 그 책의 최종판이 나온 게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 나이 때입니다.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여행을 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기 위해 손을 드는 곳과 같은, 이른 아침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

이것이, 그들이 책을 더 이상 찍지 않기로 하면서 한 작별 메시지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저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감사합니다.

* 스티브 잡스(Steve Paul Jobs) 매킨토시, 아이폰, 아이패드로 유명한 애플사의 최고경영자. 이 연설문은 2005년 여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들려준 것으로, 좀 오래되었지만 삶과 교육의 핵심을 짚고 있다고 여겨 소개합니다.

_ 민들레 < vol.72 2010 6th> 중에서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3. 30. 22:24

자영업에 관한 기사를 봤다. 내가 아는 지인도 부부가 고깃집을 냈다가 6개월만에 1억을 손해보고 접고 다시 월급생활을 하고 있다. 그동안 몇 년동안 알뜰살뜰 모은 돈인데 말이다.

권리금이다, 인테리어비용이다 해서 그만큼 들어간 것 같다. 정주영 회장의 유행어인 '하면 된다' '이봐,해봤어?' 라는 말이 오히려 안좋을 때도 있다. 도전이라는 말도 좋긴 하지만 그것도 성공했을 때나 실패해도 후회없을 때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물론 당사자들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일 것이다. 요즘엔 수익률 광고도 많이 하지만 그냥 원금보전하면서 사기안당하고 손해안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근성, 조서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3. 29. 19:44

강남의 아이들은 비싼 과외와 학원으로 하루에도 수십 곳을 이동하며 배운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못한 다른 지역아이들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노동을 보는 눈, 강수돌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3. 22. 10:13

 

괜찮아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여섯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 집에 아이가 네댓은 되었으므로 골목길 안에만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줄잡아 열 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은 시끌벅적,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방과 후 골목길에 아이들이 모일 때쯤이면 대문 앞 계단에 작은 방석을 깔고 나를 거기에 앉히셨다.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딱히 놀이 기구가 없던 그때,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하고 놀았지만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그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골목 안 친구들은 나를 위해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내게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겼다. 그뿐인가. 술래잡기를 할 때는 한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답답해할까 봐 어디에 숨을지 미리 말해 주고 숨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은 골목에서 중앙이 아니라 모퉁이 쪽에 있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이 늘 친구들의 놀이 무대였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난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친구들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 골목길에서의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반이 좀 일찍 끝나서 나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던 깨엿 장수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가위를 쩔렁이며, 목발을 옆에 두고 대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흘낏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더니 리어카를 두고 다시 돌아와 내게 깨엿 두 개를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 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전의 학교 친구를 찾아 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한번은 어떤 가수가 나와서 초등학교 때 친구를 찾았는데,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허리가 36인치일 정도로 뚱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뚱뚱해서 잘 뛰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끼워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나서서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 얜 골키퍼를 시키면 우리 함께 놀 수 있잖아!"

 

그래서 그 친구는 골키퍼를 맡아 함께 축구를 했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가수의 따뜻한 말과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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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3. 17. 21:03

 

십대에 만난 나의 돈보스코

 

나의 십대는 얼어붙은 겨울이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마저 압류당한 나는 가장 가난한 소녀였다.

그 꽁꽁 언 시절에 그분을 만났다.

 

책가방 없는 소녀는

하루하루 공처럼 뒹굴다

중졸 이력서를 들고

을지로에 있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소녀는

'사환'으로 돈을 벌면서

얇은 지폐뭉치에 꿈을 눌러버렸다.

쉽게 살고 싶었다.

 

1년이 흘렀다.

그분이 공채 합격 사원으로 들어왔다.

'김양'이라 부르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소녀를 '인숙씨'라 불러줄 때

어색했으나 존중받는 것 같았다.

 

퇴근 길, 어느 날

그분이 막내뻘 소녀를

조용한 찻집에 데리고 가

준비한 말을 심어주었다.

 

"여기서 멈추기엔 아까운 나이에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말아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짧은 몇 마디

소녀는 픽, 웃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하지만 나쁘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분이 사직서를 썼을 때

소녀는 알고 있었다.

좋은 곳과 원하는 곳은 다르다던

그분은 늦었으나 꿈을 향해 떠났다.

 

나는 사람들 이름을 잘 기억 못한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 석 자는

죽을 때까지 못 잊는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알고 있기에

 

그분

가난한 소녀의 이름을 불러주고

존중해주고

포기한 꿈을 흔들어 깨운 그분은

십대에 만난 나의 돈보스코였다.

 

출처 : 너는 늦게 피는 꽃이다 ㅣ김인숙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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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3. 17. 00:14

 

나답게 산다고 해서 이금희가 아무 노력도 안하고, 그냥 개성있게 다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 나다움을 인정받은 것이지 약속도 안 지키고, 직무에 소홀히 하면서 나다움을 견지했다면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점이라고 해서 강점만 부각시킨다고 되는 것 같진 않고, 그 이면에 여러 노력이 어우러져야 그 강점이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따라 하기 보단 나다움을 견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온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본다. 그래도 대학이라도 졸업하고 높은 경쟁률의 아나운서에도 합격을 하여 촌스러운 아나운서라는 소리도 들어본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시절 나는 무척이나 촌스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때가 되어서도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대학생들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화장도 할 줄 몰랐고, 머리도 손질할 줄 몰랐으며, 옷도 청바지 외에는 별로 없었다.

 

그러던 내가 취직을 했는데, 그곳은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방송국이었다. 시골 사람 서울 구경이 그랬을까? 신입 사원 연수 때부터 나는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신입 사원들의 연수를 위해 단체 합숙을 하는 첫날, 순진하게도 나는 안내문에 써 있는 대로 세면도구와 속옷 몇 벌만 달랑 챙겨 갔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동기 아나운서들은 여벌의 옷가지들은 물론, 드라이어와 화장 도구 일체를 챙겨 와서는 갖가지 화장품을 풀어 놓고 아침마다 정성껏 얼굴을 두드리는데, 나는 제대로 된 화장이 그런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은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비춰야 하는 직업이라서 아나운서에게는 화장, 머리 모양, 의상 등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쪽에는 도통 관심도 없었고 눈썰미도 없었던 나는 동기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세련된 그들에 비해 촌스러운 나를 누가 눈여겨보기나 할까 하는 열등감과 함께, 어쩌면 방송 프로그램에 나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동료 아나운서들이 값비싸고 유명한 상표의 옷을 입으면 나는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에 가서 비슷한 옷을 사들였다. 화장품도 이것저것 사서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눈썹도 더 진하게, 입술 색깔도 더 강렬하게... 원래 잘하는 화장일수록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법인데, 나는 무조건 진하게 그리고 발랐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딘지 내 색깔이 없어져 가는 것 같았다. 화면에 나온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어색하기만 했고, 옷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불편했다.

 

그러면서 점차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나다움'이었다. 아무리 그들을 의식하고 흉내 낸다 하더라도 나는 결국 나다. 나는 어떻게 해도 그들이 될 수 없다. 그들을 좇아 가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 나다운 것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당시에 내가 맡았던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신입 사원 시절, 나는 어린이 동요 대회 프로그램과 고향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당시 그 프로그램의 담당자들은 나의 그 촌스러움, 즉 소박함을 높이 사서 나를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 것이다. 모자란 부분도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장점이 될 수 있다. 촌스러움이 순수함으로 비칠 수 있고, 세련되지 못한 점이 친근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기준과 잣대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봐 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제대로 봐 줄 리 없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출처 : 금성출판사, 리더스 중학 국어 1, 김소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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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3. 16. 22:22
요즘은 실행력에서 많은 것이 판가름나는 것 같다. 요즘은 몰라서 안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넘쳐날 정도로 이론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역시 누구에게나 실행은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좋은 말씀이다.


출처 : 공부방의 여왕 by 원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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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3. 10. 23:26

근본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정, 공부방등 작고 구체적인 조직과 단위가 우선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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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3. 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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