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최고의 학자, 한국 최대의 실학자,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던 다산 정약용은 필자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다. 책을 통해 필자는 그에게서 배우고 또 배웠다. 평생 배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 독서법이다.

 

오래 전 위인들의 삶을 책을 통해 접하고, 책을 통해 매일 배우고, 가르침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 독서법은 학생이 스승에게 매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그 배움대로 집에 와서 실천하고, 사회에 나가서 행동하고, 직장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은 고전 독서법이 어디 있을까?

 

바로 이런 고전 독서법이 결국 조선조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이 실천한 실학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고전은 실학자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방대한 글을 남긴 조선조 최고의 학자이며, 삶과 학문이 나누어지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그래서 필자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그 당시 정약용을 억압하고, 유배를 보낸 세도가들은 이름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자손손 오래도록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다산은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마흔의 나이에 정계에서 쫓겨나게 되고,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말이 유배 생활이지 가난과 결핍으로 점철된 혹독한 세월이다. 물리적인 환경보다 더 혹독한 것은 정신적인 환경일 것이다.

 

시쳇말로 잘 나가다가 그만 망하게 되고, 주 활동무대인 세상에서 쫓겨나 시골로 귀양을 가게 되면, 더 이상 삶의 희망도, 미련도, 열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3년 안에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하던 사람들이 정년 퇴직을 하게 되면, 갑자기 병이 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다. 매일 출근해서 갈 곳이 있고, 자신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해 주고, 강하게 해 주지만, 정년 퇴직을 하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나이도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

유배지로 귀양을 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건강만 챙겨도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다산 선생은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마치 유배 생활을 40세부터 18년 동안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할 정도로 유배 생활이 그의 인생의 최고의 전성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 관리와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다산 정약용 선생을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토록 가난하고 결핍되고 혹독한 세월을 그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로 반전시킬 수 있었던 힘은 결국 붓과 책이었다.

 

그가 독서와 집필을 통해 귀양을 오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책을 읽고, 방대한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배 생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1년 365일 그에게 허락된 것은 유배지에서의 기거일 뿐이다. 여행도, 휴가도, 취미 생활도, 친구나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다산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다산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그의 놀라운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고전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다산처럼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산이 강조한 독서법은 먼저 바탕을 세우는 독서법이다.

 

"독서에는 반드시 바탕을 먼저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두려면 반드시 바탕을 세워야 한다. 무엇을 바탕이라고 하는가. 효도와 공경이 바로 그것이다. 모름지기 효도와 공경에 먼저 힘써 바탕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몸에 베게 된다. 학문이 몸에 배면 독서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효도와 공경이라는 바탕을 세우면, 학문이 몸에 배게 되고, 독서는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효도와 공경은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마음이다. 즉, 독서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필자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3년 동안 다양한 독서법으로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하면서 처음 6개월 동안은 정말 바탕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 낭비식의 독서를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렇다. 6개월 동안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지만, 그것은 모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독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점차 독서라는 것이 제대로 되기 시작했고, 점차 독서력의 엄청난 도약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6개월 전과 후의 차이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바탕이다.

그 당시의 6개월 전에는 그저 마음 관리 없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6개월 이후부터 마음 관리를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6개월 후 부터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수한 열정, 순전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공경하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비우고, 낮추는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서의 기술도 달라졌다. 하지만 독서의 기술, 독서의 방법이 달라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독서를 하는 필자의 마음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산의 말처럼, 바탕을 세우자, 마음이 달라졌고, 마음이 달라지자, 독서의 방법과 기술도 달라졌다. 그러자 알게 모르게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과 점차 닮아졌고, 학문하는 이유와 세상에 대한 세계관과 철학관이 다산을 닮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다산처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500권을 집필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필자도 다산처럼 닮아지게 되자, 2년 동안 45권의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집필하는 것은 출간하는 것보다 쉽다. 출간을 하기 위해서는 집필된 원고를 다듬고, 편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추 다산 선생의 집필 양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다산 선생의 독서력이 필자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그의 다른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보통 그는 백 권의 책을 열흘 만에 독파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필자는 보통 하루에 열 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읽는다기 보다는 독파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산처럼 읽고, 쓰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런데 평범했던 필자가 위대한 조선조 최고의 학자와 비슷하게 닮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전 독서의 위력이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고전 독서의 힘인 것이다.

 

자기계발서만 읽었다면, 벤츠를 사고, 부자가 되고, 성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산물이 아닐까?

 

인문 고전을 읽었기 때문에 필자는 다산 정약용, 세종대왕처럼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 분들의 발꿈치도 쫓아가지 못했지만, 평생 노력하고 독서에 매진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산이 쓴 많은 책들 중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책들도 있다. [소학주관]이라는 책이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을 보면, 독서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지금 내가 슬슬주 1만 섬을 얻었다 하더라도 꿰미로 꿰지 않으면 어디 간들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요즘 학문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구경과 구류 백가에 나오는 수많은 책의 이름과 항목들이 모두 슬슬주다. 이것을 꿰미로 꿰지 않는다면 이 또한 얻는대로 곧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정약용 선생은 독서를 해도, 반드시 정리하고 요약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야 자신의 것으로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필자가 쓴 독서법 책인 초의식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서 독서법과 의식 독서법을 합하여 초의식 독서법이라고 필자는 명명한 바 있다. 여기서 초서 독서법은 책을 눈으로만 보면 읽는 대로 곧 잃어버리게 되는 문제점을 개선한 독서법이다.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 새롭게 생긴 생각들과 주견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필기하고, 요약하면서 책을 읽는 방법이 바로 초서 독서법이다. 여기에 의식 독서법은 책을 읽을 때 마음을 먼저 집중하고, 마음을 관리하면서 책을 읽는 독서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탕을 먼저 세우고 독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필자가 쓴 세 번째 독서법 책인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독서법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고, 그것을 현대식으로 바꾸어, 현대의 독자들이 자신의 독서력이 초급이든, 중급이든, 고급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준에 맞게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제 사례를 들어 풀어 써 준 현대식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눈으로만 읽으려고 하는 것은 자만이다. 왜냐하면 눈으로만 읽어서는 절대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의 말대로 얻는 대로 곧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반드시 꿰어야만 가치 있는 보석이 되는 법이다. 고전 독서도 바로 이와 같다. 한두 번 눈으로만 읽고 그 책의 진짜 가치를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그래서 고전 독서법으로 지금까지 그나마 유행했던 것이 토론 독서법인 것이다. 하지만 토론 독서법을 하기 위해서는 함께 토론해 줄 친구들, 사람들이 필요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양의 고전 독서를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 독서법보다는 초서 독서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이다. 필자가 토론 독서법보다 초서 독서법을 추천하는 이유는 또 있다.

 

토론 독서법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활 방식이 다른 것이 너무 많다. 생활 방식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연히 지역적인 환경과 생활환경의 차이로 사고 방식도 다르다. 그런 것들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영향을 주어, 결국 DNA가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세계 그 어떤 나라 백성들보다 음주가무에 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K-POP이 전 세계를 사로잡는 이유가 한국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DNA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인과 서양인들의 가장 큰 차이는 사고 방식과 사고 프레임의 차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문과 책들을 통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차이점 중의 하나가 서양인들은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할 때 사고력이 향상된다는 것과 이와 반대로, 동양인들은 혼자서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글씨를 쓸 때 사고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식 수업, 토론식 독서법은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에게 최적화된 독서법이고 수업이다.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는 동양인들에게 맞는 독서법을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필자가 교육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필자는 교육학 학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방대한 책을 통한 지식과 이론적 근거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로 독서력의 도약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초서 독서법을 통해 가장 큰 도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필자가 혼자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토론 독서법보다 초서 독서법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종대왕, 모택동, 다산 선생, 정조, 박지원 등 많은 위인들이 초서를 통해, 즉 붓을 들고 쓰는 독서법을 통해 위대한 도약을 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모택동이 위대한 중국 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남다른 독서법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위대한 말을 보면 곧 알게 된다.

 

"붓을 들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모택동은 누구보다도 더 붓을 들고 쓰면서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은 또 어떤가? 백 번 읽고 백 번 쓰는 독서법인 백독백습을 실천했고, 항상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고전은 다산처럼 읽어라는 것이다. 다산은 초서 독서법으로 고전을 구슬처럼 꿰었다. 그래서 고전의 가치를 극대화 시킬 줄 알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18:58

 

독서의 참된 정의는 읽기가 아니라 생각하기이다.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하기가 결여된 빨리 읽기 방법인 속독법을 독서법이 아니라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독서는 사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독서의 정의다. 마음속에 반드시 새겨야 할 것 같다. 독서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면 독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은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다. 바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칸트는 [프롤레고메나]에서 형이상학은 이성을 위한 하나의 도야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도야된 인간의 이성은 인류 공동체에게 훌륭한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가 독서 혁명 프로젝트를 할 때 참여하신 분들에게 4주 동안 전수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독서에 대한 의식 변화다.

 

이번에는 숭실대학교와 문학동네 아템포가 후원을 아낌없이 해 주어, 멋진 숭실대학교에서 4주 동안 '독서 혁명 프로젝트2기' 과정이 열렸다. 부산, 여수, 울산, 대구, 대전 할 것 없이 매주 토요일 마다 숭실대학교 캠퍼스는 전국에서 독서 혁명 프로젝트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독서 혁명 프로젝트 라는 독서법 수업에 왜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멀리서 비싼 수강료를 내고, 그것도 매주 적지 않은 차비와 시간을 투자해서 오는 것일까?

 

멀리서 오는 사람 중에는 여수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지금까지 4천 권의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이렇게 독서에 대해 많은 경험과 독서력도 상당한 수준의 사람이 왜 독서 혁명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일까?

 

물론 많은 참여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가장 큰 목적은 '4주 만에 독서 천재로 도약'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4주 만에 독서 천재로 도약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한 페이지가 통으로 읽히게 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 번에 다섯 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라. 하루 열 시간 독서를 꼬박 해도 한 권도 다 읽지 못했던 사람들이 4주 동안의 독서 혁명 프로젝트에서 실시하는 독서 스킬 향상 프로그램을 통해 하루 열 시간 독서를 하면 최소한 다섯 권에서 열 권 이상의 책을 독파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단 기간에 도약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 가서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세계 최강의 독서 스킬 향상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독서 혁명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이렇게 속독하고 통독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성과는 독서를 통해 '깊은 생각, 넓은 생각, 높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의식을 완전하게 바꾸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한 옛 선인들의 말이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고, 지식만 주입하면 독서는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 그것도 타인에게, 세상에게 큰 해를 끼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지식이 없는 착한 사람은 타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지식이 있는 악한 사람은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지식도 있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간 독서를 했다면 최소한 십분의 일은 생각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고 비판하고 취사선택하고 융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나가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가서 많이 생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는 그런 책이 좋은 책임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작가나 영웅이나 박사라고 해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자만이다. 어떤 위대한 작가도 정답을 알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답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답이 있는 그런 책은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고전의 위대함은 정답이 없고, 위대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어라는 것이다. 고전은 기본적으로 많이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고전을 가까이 하는 자는 조급하거나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진 상태에서 벗어나 느긋해 질 수 있고, 많은 위기 상황에서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고전의 위력인 것이다. 고전을 가까이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위기 상황 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인 것이다.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2. 17:59

 

나이가 들어가면서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실험 결과를 보면 창의성을 기른다는 말은 모순인 것 같다. 오히려 창의성을 유지하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와 토론, 프로젝트 수업, 체험활동, 그리고 진로와 관련된 경험 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본질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능력은 창의성의 기초가 되는 비판적 사고로부터 출발하며 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얻어진다.

 

독서의 목표 또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서 비판적 사고를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교육은 창의성을 기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동서고금의 명저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게 되고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보다 성숙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명저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비판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과정을 겪으면서 성숙한 지성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 특히 인쇄술의 발전 이후 정보나 지식의 전달이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정보를 유통하고 지식을 재생산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매체가 존재하니 독서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매체가 다양한 정보를 쏟아냄에 따라 오히려 제대로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보유통의 걸림돌이 생기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이런 신매체들은 즉각적이고 쉽게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파급력과 영향력이 매우 크므로 이런 매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모티머 J. 애들러, <독서의 기술>, 범우사, 2011)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 등을 통해 사람들은 교묘한 설득에서부터 신중하게 선별된 정보와 통계에 이르기까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자료들을 제공받는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찌나 효과적으로 포장되어 있는지 시청자나 독자들은 그 의견을 그대로 자신의 사고 속에 주입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즉각 그대로 재생시킨다는 게 문제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게 위험하다. 생각이 없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로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이 전달하는 정보나 지식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떠한 매체에서 얻은 정보든 그것을 제대로 읽고 재해석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독서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요즘 제대로 된 독서를 위해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독서토론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독서는 자신과 저자와의 대화이다. 책을 읽는 것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저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자신의 주체적 사고로 재정리하는 것이다. 이때 독서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데 독서란 혼자서 하는 행위라 주관적인 지식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다양한 주장을 담은 책들을 고루 읽음으로써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거나 오류에 빠지는 것을 최소화할 수는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독서는 토론과 함께해야 온전해진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생각을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아집에 갇히는 것을 피할 수 있고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함께 의미를 탐구하면서 책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토론이 중요한 이유는 좋은 토론을 통해서 소통과 협력, 다른 것을 인정하는 자세 등 민주시민적 가치까지 습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에서 토론을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전 세계 인구의 0.25%도 안 되는 유대인이 전 세계 노벨상 수상자를 20% 이상 배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유를 그들의 독특한 교육법인 하브루타에서 찾고 있는데, 이 교육의 핵심은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를 읽고 정답이 없는 문제로 토론하는 것이다.

 

독서, 하면 역시나 유태인 출신인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수학때문에 낙제를 한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인문고전 독서광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서 특허청 말단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매일 저녁 인문고전독서클럽을 운영하였다. 수학을 못하면서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직관력을 가졌던 그의 힘은 바로 독서와 토론으로 부터 나왔음을 스스로도 강조하였다. 또 한 사람의 과학자 레더포드도 독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독서와 더불어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생각 없이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 외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훌륭한 인문고전 독서가였다는 사실은 독서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독서가 좋다고 해도 잘못 읽으면 독이 된다. 그래서 독서교육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겉핥기식의 독서이다. 한 권을 읽더라도 깊게 제대로 읽어야 한다. 독서는 여행과 같다. 해외여행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에는 한 번 해외에 나가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그래서 한 번 나간 김에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찍고 오기'라고 불리는 이런 여행에서는 갔다 왔다는 자랑거리 외에는 별로 얻는 것이 없다. 여행을 하는 진짜 목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아침독서나 독서록 같은 것에 찬성하기가 어렵다. 독서프로그램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많이 이루어지는데 대게 다독을 강조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이렇게 다독으로 아이들을 경쟁시키다 보니 한 아이가 6년 동안 수천 권의 책을 읽는 일이 벌어진다. 대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용의 이해보다는 빨리 읽는 것에만 매달리게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책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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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독서교육의 사례를 한 번 생각해보자.

EBS 다큐프라임에 소개된 경기도의 모 초등학교의 사례인데 딱 한 권의 책으로 5학년 국어수업을 일 년간 진행한 사례가 있다. 이런 수업이 나오게 된 것은 아마도 경기도교육청에서 명저를 수업에 직접 활용하는 교육을 강조한 것이 배경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 권의 책을 정해서 그것을 일 년 수업의 교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책이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이 수업에서는 책을 천천히 다 같이 읽으면서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내용을 파악하다 보니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어휘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정확히 뜻을 이해한 후 넘어간다. 국어교과의 목표인 어휘습득, 내용파악 등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책 한 권만으로 수업을 하면 교육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까 우려하는 교사나 학부모들에게 충분한 답이 될 듯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책에 나오는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토론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나와 다른 다양한 생각을 접하게 되어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이 수업은 책에 나오는 나무를 학교 주변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책에 기술된 생활이나 문화와 자신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다른 과목의 교육목표까지 포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통합교과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을 아이들이 문단을 나누어서 글과 삽화로 표현하는 과정도 있는데, 이렇게 삽화로 표현하려면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므로 아이들은 내용을 깊게 생각하게 되고 창의성을 키우게 된다. 책 한 권으로 국어수업을 진행하지만 과학, 음악, 미술, 사회, 역사까지 섭렵하면서 아이들은 분리된 지식의 벽을 넘어 통합적 사고가 가능해지고 통찰력이 생긴다. 이런 사례를 보고 국어교과서라서 책 한 권으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상력의 문제이다. 다른 과목도 책을 활용해서 수업이 가능하다. 같은 어학과목인 영어는 물론이고 사회, 역사 등의 과목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과학과목의 경우도 일부 단원의 경우 시도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수업은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생긴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스스로 알아가는 즐거움을 얻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수업이 가능하려면 교사들의 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교과서를 이용하면 지도서에 따라서 단계별로 진행하면 되지만 이런 수업에서는 교사가 새롭게 모든 것을 기획해야 하며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사는 몇 번씩 책을 읽고 다양한 방법으로 학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목표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교사의 이런 노력은 아이들에게 다른 수업에서 기대할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신안산대학교 부교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4. 21:04

 

국가적으로도 창조경제를 외치고 창의융합이니 창의인성이니 하면서 입만 열면 창의성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창의성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창의성이란 것이 창의성을 기르는 훈련을 하면 생겨나는 것인지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간단하게 '창의적인 생각이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다른 생각은 어떻게 나오게 될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열심히 잘 듣고 암기하려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머리에서 나올까? 일 년 내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적막이 감도는 엄숙한 교실에서 나올까?

 

다른 생각은 다르게 보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외국의 한 학교 - 아마 발도로프 계열의 학교일 것이다. - 에서는 예술 수업을 강조하는데 특히 미술 수업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교의 미술시간은 여러 가지 재미있고 특이한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물을 관찰하고 그리는 수업 장면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사물을 한 가운데에 두고 아이들이 뺑 둘러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었다. 그게 뭐 그리 특별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특별한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은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사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그리는 아이들의 그림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의 모습만을 그리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아이들이 보는 모습을 그릴 수 없다.

 

이런 수업이 왜 중요할까? 이 수업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전체로 투영되어서 모든 사물과 현상에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며 다른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각이 도움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 반드시 다른 시각이 있어야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수업이 놀라운 수업이라는 것이다. 교사는 미술 수업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라든지 협력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배우고 협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백 번의 말보다 교과서에 담긴 어떤 내용보다도 이런 자연스러운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이 더욱 강하게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창의적인 생각을 기르기 위해 다른 시각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당연한 것에도 의문을 갖는 것이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상식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전문가가 이미 결론을 내놓은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말이다.

 

우리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업적은 바로 이런 의문을 갖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면서도 실제로 자기 스스로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가? 무거운 것과 물은 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 지금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사실들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의심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해치는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우리의 학교에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고 독특한 호기심을 발하는 아이들이 문제아 취급을 받는 것처럼, 뛰어난 인물들도 그 시대에는 고난을 당하기도 했으니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이렇게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과 질문을 던지는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나온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학습방법으로는 길러지기 힘든 배움의 자세이다. 지식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일 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출발은 비판적인 사고에서 시작된다. 그럼 비판적 사고는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북돋아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는 세상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나온다. 부모나 선생님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 중에 하나가 "원래 그래." 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는 듯하다.

 

인간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햇빛이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에 흥분하지 않을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래." 라는 한 마디로 아이들의 사고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지적 폭력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아이들은 마침내 깨닫게 된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것을. 몇 번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 날아오는 것은 짜증 섞인 어른들의 반응뿐이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돌아오는 것은 문제아라는 낙인뿐이다. 이런 문화가 우리 아이들을 교실에서 질문이 없는 아이들로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만이 정답인 학교에서 다른 생각은 불이익을 가져올 뿐이다. 정작 교과서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사고의 단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사실 교과서란 모든 지식을 해체해서 뼈대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국가가 아이들을 교육할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만든 후 거기에 필요한 지식들을 제시하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교과서이다. 따라서 이것이 절대화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교과서 시대를 너무 오래 거친 탓에 교과서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교과서에 기초한다는 말이 교과서만 들입다 외우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식이란 교과서이든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것이든 그것을 기초로 다양한 자료와 내용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대단히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많아서 그것 자체가 진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에서조차 기존의 주장이 뒤집히는 기막힌 일들이 생기지 않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우롱해왔던 천동설이었고, 최근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심각한 도전에 빠지기도 했었다. 물론 오류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아인슈타인이라는 대물리학자의 권위에 의문을 갖고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그 탐구정신이 어쩌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를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지식과 업적에까지 도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온 것이다. 하물며 다양한 주장과 불완전한 사실을 다루는 교실이라면 더 많은 도전이 있어야 할 일이다. 더 많은 의문을 갖도록 부추기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제대로 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지식의 불완전성과 객관이라는 가치의 허약한 실체를 제대로 이해시킬 때 사물이나 현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양한 가치와 다른 시각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도, 지식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사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교실에서 멍하게 공상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깐족거리면서 "왜요?"를 반복하는 아이들에게 꿀밤과 고함을 안기기보다는 그 아이가 정말 훌륭한 아이가 될 것이라는 기대의 눈빛을 보내라고 이야기한다.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말썽피우지 않는 아이가 편하고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 따르는 아이가 예뻐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열망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일 수 있다. 주어진 질서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 일반적으로 사회와 학교 시스템이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아이들이 바로 이런 부류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다루기 힘들고 때로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자기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고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의문이 자신의 자제력을 이겨버리는 그런 아이들이 종종 더 대단한 성취를 거두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사례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으로 꼽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인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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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으로 유명한 케네디 가에서 촉망받던 아이는 전쟁 중 전사한 케네디의 맏형인 조셉이었다. 형 조셉과 함께 사립명문학교인 초트스쿨을 다녔지만 늘 말썽만 일삼던 케네디는 경쟁상대로 생각했던 형이 졸업하자마자 전혀 다른 학생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트스쿨 교장이 케네디의 아버지에게 보낸 다음 편지글은 케네디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잭(케네디 대통령의 애칭)은 명민하고 개성이 뚜렷한 개인주의 성향의 소유자입니다. 형인 조와 달리 마구를 채우기 힘든 야생마 같은 심성이 있습니다. 잭에게는 천부적으로 독자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또 기지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는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잭 같은 학생에게는 적응과 조정과 성장의 기간을 참작해야 합니다. 평범한 모범생의 심성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교사나 부모들의 골치를 썩이는 경우가 훨씬 적습니다만, 결국에는 잭 같은 아이가 더 흥미 있고 더 보람찬 성과를 얻게 되기 마련입니다."(최효찬, <세계명문가의 독서교육>)

 

꼴통 같은 녀석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겠지만 한 호흡만 가다듬고 그 내면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그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길 만한 엄청난 일들을 해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으로 파고들다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큰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행복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런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행복한 일이라면 그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하게 되고 그럴 때 놀라운 성과를 만들게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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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비유의 하나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페르마의 정리는 수백 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혀온 난제 중의 난제였다. 수많은 천재수학자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문제이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던진 페르마는 전문 수학자가 아니라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의원이자 지방 판사였다. 수백 년간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이 문제에 도전한 많은 수학자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학적 진전이 있었고 이것은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인류는 한 발씩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일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 위대한 수학자도 페르마가 남긴 세기의 난제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의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오일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낸 수많은 수학적 업적은 우리 인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수학자들의 도전에 발판이 되었고, 마침내 페르마의 정리는 임자를 만나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문제의 도전자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푼다고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느라 수년에서 수십 년을 바치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매달리게 했을까? 그것은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런 보상이나 대가가 없을 때 새로운 생각이나 진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류가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 교훈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그런 교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자신을 평가하는 척도로 생각한다. 그 평가라는 것이 자동차, 집, 연봉등으로 정의되는 능력인데, 이것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정작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가치 없는 일을 좇느라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 기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더 이상 돈이나 지위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게 된다. 돈이나 지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나 지위를 갖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위한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 돈과 자동차, 승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주는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는 것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충만한 에너지가 새로운 생각,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

 

세상과 사물의 한 면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새로운 생각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대가나 보상과 상관없이 집요하게 지식의 본질을 추구하고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 세가지 요소들이 바로 우리 아이들을 창의적인 인간으로 길러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신안산대학교 부교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3. 21:14

 

그것은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가 혁신학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우리 학교는 너무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학교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은 모든 지식을 교사가 더 떠먹여준다. 교사가 아니라도 T나라, 아이스크림 등의 수업프로그램이 가만이 앉아 있기만 하면 다 머릿속에 집어넣다 못해 욱여넣어 주려고 노력한다. 시험 때가 되면 예상문제를 가르쳐주는 친절이 넘치는 선생님도 적지 않다. 학원에 가면 학원선생님이 기출문제니 요약집이니 해서 고농축 영양제처럼 압축해주니 쏙쏙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하거나 고민스러울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이들은 지식소비자이기만 하면 되니까.

 

이것이 옳은 교육일까? 답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아이들을 괴롭히자는 것이다. 숙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단순히 문제를 반복해서 풀거나 암기하는 숙제가 아니라는 전제하라면 말이다. 교실에서도 선생님이 모든 것을 다 알려주겠다는 부지런함과 의욕을 제발 버리라고 제안하고 싶다. 아이들이 하도록 남겨 두자. 스스로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얼마나 큰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의 생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괴롭히라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충분히 괴롭다. 괴로워도 너무 심하게 괴롭다.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어른들은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서 참으라고만 한다. 문제는 정작 괴로워야 할 일이 아니라 엉뚱한 일로 괴롭다는 점이다. 자신의 꿈과 상관없는 공부에 억눌리고 지나친 통제와 간섭으로 고통받고 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생각이나 마음속의 문제가 아닌 여전히 머리길이, 치마길이, 머리색으로 갈등한다. 복잡하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머릿속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언어와 비인격적 대우로 인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상처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괴롭다와 고통스럽다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행복이 깃들 리 없다.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아이들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아이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면 아이들은 점점 더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든다. '마음은 따뜻하게 머리는 복잡하게'가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혁신학교에서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여유 속에서 괴로운 사고의 과정을 통한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학교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다고 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한다.

 

선생님이 일일이 친절하게 머릿속에 넣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찾아가는 힘든 길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학교,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생각이 커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학교. 그것이 혁신학교 제일의 목표이다.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것, 스스로 탐구하며 깨우치는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혁신학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기존의 좋은 학교의 개념이다.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배움이 일어나면 혁신학교에서 추구하는 가치로 오해하기 쉽지만, 혁신학교에는 치열한 자기 고민과 내적 갈등을 통해 깊은 탐구와 통찰이 핵심이 되는 배움의 과정이 있다. 그래서 학력이 혁신학교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혁신학교라 학력이 좀 낮아도 된다는 생각은 혁신학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혁신학교라 아이들이 좋아하기는 하는데 학력이 걱정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아이들 가운데 생겨나고 있는 생각의 크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이다. 제대로 된 혁신학교라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혁신학교가 아이들을 공부로만 내몰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들의 성장과 제대로 된 학력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도 EBS 문제집만 죽어라고 푸는 것으로도 얻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으로 깊이 있는 탐구와 통찰이 가능할 때 어떤 상황, 문제에도 먹히는 실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런 교육이 쉬울까? 혁신학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육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저마다 막연히 이런 좋은 교육이 있었으면 하는 교육의 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편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전망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혁신학교는 우리가 희망했던 교육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학교의 문화가 문제이다. 그래서 혁신학교는 특별한 사업이 아니라 학교의 총체적인 구조를 바꾸고 그것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교사의 자발성과 헌신성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바꾸는 것은 교사와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순간 아이들의 몰입도 창의성도 금방 사그라진다. 교사들의 뜨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사실은 성공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필요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은 분명했다. 누군가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고, 그것이 우리의 교육을 제대로 세우는 길이라는 신념은 바위보다 굳고 강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제 그 혁신학교의 속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보통 대안이다 혁신이다 연구다 시험학교다 해서 보면 학교공부보다는 진로나 정서적인 면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다 보면 기존의 공부는 마치 대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부정적인 관점을 갖기가 쉽다. 그 결과 학력이 저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기존 학교의 폐해들을 고쳐야 되겠지만, 숙제도 내주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서 열심히 사고하고 공부해야 학력이 높아지는 것이지, 많이 놀게 하고 즐겁게 한다고 학력이 좋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이런 실험학교는 그래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2. 20:27

 

1921년 미국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창의력의 아이콘으로 잘 알려진 토마스 에디슨이 자신의 회사 - 이 회사가 나중에 미국에 거대기업인 GE가 된다. - 입사 지망생들을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입사 시험을 도입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한동안 전범처럼 활용했던 150가지 상식문제가 수록된 시험으로, 나중에 '에디슨 질문서'라 불리게 되었고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엉클 샘이 에바를 위해선 한 일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어떤 금속으로 만들어졌는가? 등 암기형 지식을 묻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마침 이 시기에 아인슈타인이 미국을 방문했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돌발질문을 던졌다. "음속의 값은 얼마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기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이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도 단순히 음속의 값뿐 아니라 파동의 특성과 양자역학적 특성까지 설명하는 해박한 물리학 강의가 뒤따라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두지는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기자는 에디슨의 입사시험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의견을 재차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정보의 습득은 교육의 본질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것, 교육의 본질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고하는 능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덧붙여 아인슈타인은 지능의 진정한 지표는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은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교육의 본질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진정한 교육의 목표는 사고하는 능력이지,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필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사고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개인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능력이 된 것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_ 이성대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2. 19:49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전역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기아문제가 심각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해 하루 음식 섭취량의  결핍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는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있었다. 같은 빈민 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이라면 다 같이 영양실조에 걸려야 했는데, 한 집에서 의외로 건강한 아이가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똑같이 배급받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말이다. 기아 전문가들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영양 상태가 양호한 아이가 있는지 더 조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사원들은 베트남 가정을 집집마다 방문해서 그들의 일상 습관을 관찰했다. 조사원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영양 상태가 좋았던 아이들을 더 발견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습관이 있었다. 습관은 바로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을 때, 엄마가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긴 것'이다. 아이들이 개를 만지고 나서도 손을 씻게 했고, 슬리퍼나 운동화를 만진 뒤에도 손을 씻게 했다.

 

손을 깨끗이 씻는 습관에 대한 보고 외에도, 또 다른 습관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가정의 식사 시간을 관찰했을 때, 한꺼번에 밥을 몰아주는 아이보다 음식을 하루 세 번에 나눠줬던 가정의 아이가 훨씬 더 건강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각 가정에 손 씻기와 음식을 나눠 먹는 습관을 권유했고 아이들의 발육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치밀한 관찰력이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점차 호전시킨 것이다. 조사원들의 섬세한 관찰, 곧 '디테일의 힘', '관찰의 힘'이 베트남 아이들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실패하는 다수보다 성공하는 예외에 주목하는 관찰의 힘이 모두를 살려낸 것이다. 같은 악조건의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성공적인 예외를 찾아내 그 예외의 자원을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한 지혜다. 이처럼 성공한 하나의 실례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서 전체에 적용시켜 모두가 잘 되게 하는 것이 '긍정적 이탈'이다.

 

으로 상과 하다_ 최형만(랄랄라~)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0. 20:53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대학_ 예시바

 

아인슈타인, 에디슨, 프로이트,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등 세계적인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2013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12명 중 절반인 6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인구는 세계 인구의 0.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22퍼센트가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금융, 경제,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며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대인이 이처럼 세계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많은 분석을 내놓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뿌리다. 즉 수천 년 전부터 숱한 전쟁과 압제를 경험해 온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명석한 두뇌가 필수였을 것이란 설명이다. 다른 이유로는 어릴 적부터 받은 창의력 계발 교육이다.

 

노르웨이 출신으로 197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이바르 게이바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이유를 "항상 궁금증을 갖고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의 가정 교육이 유대인의 성공 비결이라는 것이다.

 

예시바 대학은 미국 뉴욕에 있는 유대인 명문 종합 대학이다. 각 언론사에서 매기는 대학 순위에서도 늘 상위를 차지한다. 2009년<US뉴스>가 발표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866년 초등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예시바 대학은 미국에 있는 유대인 계열 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이다. 동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와 영어를 가르치다가 1945년 지금의 종합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유서 깊은 대학답게 [탈무드]와 유대인의 가치를 연구하고 배운다.

 

예시바 대학의 도서관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도서관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시끄러운 소음이다.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흰 셔츠 복장을 한 남학생들이 책을 펴놓고 큰 소리로 떠든다. 책상위에는 참고 서적 몇 권과 음료수뿐이다. 서로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언뜻 보면 상대에게 화가 나서 따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시바 대학의 수업은 5명의 소수 정예 수업부터 70명의 대규모 수업까지 다양하다. 규모와 상관없이 수업은 학생들의 참여로 이뤄진다. 수업에 참여한다는 건 단순히 참석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 수업에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때로는 논쟁도 불사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위함이다.

 

유대인의 질문 공부법 '하브루타'

 

세계에 유례 없는 이 시끄러운 학습법을 '하브루타'라고 부른다. 하브루타는 '말하는 공부법'이다. 원래 '친구'라는 뜻으로, 친구(파트너)와 함께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는 교육 방식을 뜻한다. 하브루타는 2000년 전부터 유대인 전통으로 내려오는 오래된 교육 방식이다. '얌전한 사람은 배우지 못한다'라는 [탈무드]의 글이 말해 주듯이 공부는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래된 공부법이다.

 

유대인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이 하브루타이다. 예시바 대학 심리학 부교수로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는 하브루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전통적으로 볼 때 하브루타는 [탈무드]에서 '공부하는 파트너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면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교육도 그랬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는 자신의 어릴 적 가정환경을 이야기하면서 하브루타 교육을 설명했다. 그 성장 과정을 따라가보면 하브루타가 어떻게 인재를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교사였던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의 부모님은 뉴욕에서 자란 유대인이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캔터이자, 미국에서 캔터들을 가르치는 유명한 교사이기도 했다.

 

호프만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온 지는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동유럽, 특히 폴란드와 러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떠났다. 호프만 교수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 수는 3백만 명이었다. 이후 1세대가 정착해 유대인 전통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며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민족으로 부상했다.

 

미국에 정착했다고 해도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을 따른다.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다. 하루 3번 기도를 하고, 음식은 코셔만 먹는다. 코셔는 히브리어로 '적절한'이라는 뜻으로, 육류와 유제품을 섞어 사용하지 않는 등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조리한 정결한 음식이다. 또한 전통 유대교의 의식 절차를 지켜 토요일에는 일하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하브루타 교육을 배운다. 아이가 글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면 가정에서는 [탈무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평균 열 살이 되면 일주일에 두세 번 부모와 함께 [탈무드]를 공부한다. 본격적인 토론은 열다섯 살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탈무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공부한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떠들썩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현재의 이슈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 대해 의견을 묻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아시아권에서는 식사를 할 때 얌전히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고 부모의 말씀에 아이가 질문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유대인 가족은 각자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가정에서부터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괜찮다'는 지지감을 심어주고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영어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호프만 교수에게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것을 절대로 창피해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학생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부터 "떠들지 말고 공부해" "조용히 해"라는 말을 듣는 한국의 가정과는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제작진이 찾아간 예배당과 유치원은 호프만 교수가 말한 분위기와 비슷했다. 토요일 저녁이면 아이들이 있는 곳은 아이들 말소리로 혼이 나갈 만큼 소란스럽다. 아버지와 아들이 짝을 지어 [탈무드]를 읽고 친구들끼리 마주보면서 큰소리로 열심히 외친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학교인 프로키오 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까지 마치는데, 유치원에서의 수업도 학교와 다를 바 없다. 수업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짝을 지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어릴 적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하브루타 교육을 자연스레 몸에 익힌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하브루타를 몸에 익히는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진짜다

 

왜 하브루타 교육일까?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을 예시바 대학생 케빈 포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다 보면 사고가 명확해지고 자신이 배우는 걸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혼자 생각할 때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막상 말로 표현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때가 많다는 뜻이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 논리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실제로 내가 아는 지식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경우 막상 남에게는 설명하지 못하기 쉬운데 사실상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브루타 방식은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좀더 명확히 생각하고 지식을 체계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다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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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7. 11. 08:25

 

'인문학 고전 100권'의 비밀_ 세인트 존스 대학

 

미국 메릴랜드 주의 작은 도시, 아나폴리스에 특별한 대학이 있다. 학생 수는 600명에 불과한 작은 사립대학이지만 아이비리그와 같은 명문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세인트 존스 대학이다. 세인트 존스 대학은 1696년 전통적인 교양학과만을 가르치던 킹 윌리엄 스쿨이 전신으로, 1937년 교과를 개정하고 지금의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인트 존스 대학이 명성을 얻은 이유는 다른 대학과 차별화한 독특한 교육 과정 때문이다. 우선 이 학교에는 별도의 전공이 없다. 선택 과목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학 4년 동안 학생들은 학년별로 모든 교과 과정을 똑같이 배우고 교양 학사 학위를 딴다.

 

학기 말에는 학생이 들었던 4~5개 수업의 담당 교수들이 모여서 교수들이 구두로 학생을 평가한다. 소수 정예의 수업이라 교수들이 그 학생의 생각 패턴이나 화법을 다 꿰고 있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조언들이 이 자리에서 나온다. 성적표는 원칙적으로 비공개이다. 외부 제출용으로만 사용하고 학생이 원할 때에만 보여준다.

 

세인트 존스 대학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꽤 있다. 이 대학 2학년 이창재 씨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곳으로 유학 온 경우다. 제작진을 만난 그는 대학에 들어와 맞이한 첫 학기를 "죽을 맛" 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에서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수업 시간은 자는 시간이고 공부는 집, 학교 자습실 아니면 학원에서 했다고 한다.

 

대학에 와서도 토론하고 대화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세인트 존스의 모든 수업은 토론 수업이었다. 입학 초기에는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정작 말이 안 나와서 한마디도 못한 채 수업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는 맨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누구나 창재 씨의 문화 충격을 공감하고 있었다. 현재 1학년인 오현재 씨도 세미나에서 처음 2주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학생들이 느끼는 문화 충격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2학년 박주찬 씨는 "수업이 끝났는데 아무도 안 일어났어요"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밥 먹으러 가서도 수업에서 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교수가 강의를 마치자마자 학생들이 서둘러 강의실을 떠나는 우리 대학과는 다르게 학생들은 수업 이후에도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작진이 캠퍼스를 찾았을 때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는 책을 읽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교내 벤치에서도 책을 읽고 잔디에 누워서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다. 책을 읽다가 생긴 질문들은 다시 친구들과 열띤 토론으로 이어진다. 캠퍼스 한쪽에 서너 명이 모인 자리에서도, 식당에서도 어김없이 토론이 이뤄졌다. 학생들은 무슨 책을 이처럼 열심히 읽고 토론하는 걸까?

 

학교에서 만난 니콜라스가 읽고 있는 책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토마스 홉스가 1651년에 쓴 책 [리바이어던].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을 국가에 비유해 쓴 사상 철학이다. 다른 한쪽에서 한 학생이 읽고 있는 책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가 고대 영웅들에 대해 기술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다.

 

이 대학에서 책 읽기는 수업을 듣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학생들은 오늘 있을 학년별 세미나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책을 읽으며 궁금한 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학년별로 교과 과정이 같기 때문에 같은 학년의 학생들은 같은 책을 들고 있다. 학생들이 든 책에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흔적으로 보아 적어도 두세 번은 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의 구성원도 다양하다. 명문대를 다니다 온 학생,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온 학생, 안식년인 대학 총장까지.

 

책 읽는 풍토가 세인트 존스 대학에 자리잡은 이유는 이 학교만의 독특한 커리큘럼에 있다.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는 '100권의 책'이 있다. 100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 이것이 대학 4년 동안 하는 공부의 전부이다.

 

교과 과정도 간명하다. 세미나와 수학, 언어는 4년, 생물학, 화학, 물리학이 포함되는 과학은 3년, 음악은 1년을 배운다. 학점도 매기지 않는다. 세미나 수업은 본격적인 토론 수업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쓴 책부터 단테, 스피노자, 흄이 쓴 책까지 다양하게 공부한다. 그밖에 서양고전을 기초 소양으로 해서 과목별로 나누어 수업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입생은 논리학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을 생물학을 시작하는 식이다.

 

수학은 초등학교에서 배운 점, 선을 정의하는 단계부터 시작한다.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법칙이지만 토론을 하다 보면 내가 아는 것은 진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OECD 국가에서도 학업 성취도 1, 2위를 다투는 우리나라 학생들로서는 왜 이런 기초적인 것부터 배워야 하는지 의아해할 정도로 쉽게 느껴지는 수업도 많지만 갈수록 그 수준은 높아진다.

 

과학은 실험 수업이지만,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토론을 거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실험한다고 하자. 두 개의 공이 서로 부딪치면 충돌 전과 후에 공이 같은 속도로 접근하거나 서로 멀어지는데 이때 어떻게 에너지가 보존되는지를 토론하는 식이다. 자신이 하는 실험의 개념부터 정리하는 것이다.

 

대충 책을 읽고 아는 척하며 수업 시간을 넘기려고 하는 학생은 이 학교에서 버티지 못한다.

 

시험 공부가 아닌 생각 공부

 

대학 4년 동안 책 100권을 읽어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세인트 존스 대학은 미국에서도 공부 많이 시키는 대학으로 유명하다. 하루 읽어야 할 책의 쪽수만 해도 평균 300~400쪽에 다다른다.

 

제작진은 한국 유학생인 은지 씨를 따라 세인트 존스 대학의 자랑이라고 하는 세미나 수업에 들어가 실제로 어떤 수업을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해가 저물어 어둑해질 무렵, 저녁 8시에 세미나 수업이 시작됐다. 세마나는 보통 일주일에 두 번, 밤늦은 시각에 시작된다.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세미나에서 읽어야 할 쪽수를 확인하고 수업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커다란 테이블에 빙 둘러 앉은 학생 수는 15명, 놀랍게도 이 교실에는 교수가 두 명 있다. 학생 수도 적은데 왜 수업에 두 명의 교수나 필요한 걸까? 3학년인 매트 브라운은 두 명의 교수가 있어서 책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을 갖게 되어 좋다고 했다. 수업에 다른 의견, 다른 목소리가 있으면 새로운 관점들이 생기고 토론도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이 학교 패트리샤 록 교수는 여기에 대해 두 명의 교수가 대화의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대부분의 대화를 이끌어가지만, 두 명의 교수가 글 내용에 관한 상이한 해석을 내리기도 하고 다른 요소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시각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성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수업시 시작되자 질문이 꼬리를 물고 토론이 벌어졌다. 다른 학생들의 말에 기죽은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트 필기를 하는 학생도 없다. 필기를 하다 보면 대화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책 한 권을 펼쳐 놓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학생들은 토론에 열중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교수가 가르치는 말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교수는 조용히 학생들의 말을 들을 뿐이다. 토론을 들으며 간혹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교수가 하는 일이다.

 

같은 수업에 들어간 제이슨 팁튼 교수는 수업에서 교수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수업 도중에 흥미롭고 몰입력 있는 말은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는 척 하는 걸 없애는 데 몇 년이 걸렸다는 제이슨 팁튼 교수의 말처럼 교수가 수업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수업을 하는 건 다른 대학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러한 태도는 교수를 프로페서가 이나라 튜터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차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튜터는 수업의 안내자, 또는 배움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과거 지식의 소유자로 여겨졌던 교수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학생 스스로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고, 대화가 주제에서 벗어나면 방향을 다시 잡아주는 교수의 역할을 잘 표현한 말이다.

 

책 읽기와 토론 중심의 세미나를 1년 넘게 하게 되면 입을 뗄 줄 모르던 평범한 한국 학생들도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진다.

 

처음 이 대학에 와서 문화 충격을 느꼈던 창재 씨도 대학에 다니면서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슨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얘기해요. 다른 사람이 얘기하고 있고, 만약에 틈을 안 주면 이런 식(두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등의 제스처)으로 '나 얘기하고 싶다'는 걸 보여줘요."

 

자기 의견을 말하는 데 막힘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는 건 실전의 문제라며 배움에 있어서 계속 말하려고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2시간의 세미나가 끝난 밤 10시. 학교 안 뜰은 방금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북적였다. 학생들은 여기서도 토론을 그치지 않았다. 각자 세미나를 끝낸 학생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위해 저녁에 세미나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시간이 다 되어서도 학생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우리는 책 읽기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책 읽기가 배움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잘 모른다. 특히 고전을 요약 정리본으로 읽고, 책 한 권 읽을 시간조차 없는 초, 중, 고교 생활을 보낸 유학생들은 책 읽기를 통해서 달라진 점을 이렇게 말했다.

 

2학년 박주찬 학생은 "궁금증이 계속 생긴다고 해야 하나,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게 돼요. 그게 가장 핵심인 것 같아요. 원래 알지만 말을 하면 또다른 게 보이니까. 얘가 이 말을 했으니까 나도 이 생각이 나서 생각이 끊이지 않게 돼요" 라고 말했다.

 

2학년 송원경 학생도 말을 하면 "아 내가 진짜 이걸 배우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책 읽기는 스스로 공부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도 만나고, 알지 못하는 것이 나오면 '왜?'라는 궁금증이 발동하기도 한다.

 

책 읽기가 토론과 만나면 더욱 폭발적인 힘을 갖는다.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경청하면서 새로운 질문이 생기고,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암기로는 얻을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책 읽기의 목적은 생각하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저자의 생각과 주장이 실린 글이다. 이를 테면 고전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길게는 몇백 년 전 저자가 살아온 시대의 생각과 주장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세태 등을 알게 된다. 전체의 흐름이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책을 넘기기가 힘들다. 그래서 책 읽기를 두고 맥락을 이해하고 지식들을 구조화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책 읽기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쌓으면 저절로 질문이 생긴다. 이를 통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질문을 통해 기존의 선입견이나 편견 등 사고의 틀이 깨지고 생각의 폭은 깊어진다.

 

책을 읽고 나서 한국에서는 주로 독후감 쓰기와 같은 글쓰기와 연결한다. 그런데 세인트 존스 대학은 독서를 질문을 바탕으로 한 토론 수업과 병행시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인트 존스 대학 총장인 크리스 닐슨은 이를 '대화의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고 나서 대화를 함으로써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세미나 수업을 할 때 교수는 '홉스의 사상은 서양 철학에서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라는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질문은 '그가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가?' '위험할 수 있는 다른 사상이나 아이디어들은 무엇인가?' '부정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대중들은 읽지 말아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발전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 읽고 있었는지, 무엇을 몰랐는지 깨달을 수 있다. 특정한 한 가지 해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존중하게 된다.

 

물론 교수 중에는 세미나가 끝난 뒤에 학생들이 1~2페이지 정도로 글을 쓰도록 해서 자기 생각을 더욱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격려하는 경우도 있다.

 

'왜?'라는 물음이 있을 때 배움에 힘이 생긴다

 

크리스 닐슨 총장은 심리학 개론과 같은 일반적인 대학 교과서를 없애고 고전 작품들로 커리큘럼을 정한 이유를 "다른 책의 기준이 되는 책을 실제로 쓴 저자들의 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상이나 이론을 정립한 원저자들의 책은 흥미롭고 활력이 넘친다. 단순하게 개요를 정리한 게 아니라 중대한 의견을 논리적으로 구성해냈기 때문이다. 그 열정과 상상력 넘치는 주장들을 학생들은 질문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고, 자기 스스로 타당성을 검토한다.

 

사람들이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질문에는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공부는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배움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질문은 수동적인 학습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스스로 배움을 얻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고 배움의 과정에 적극 참여할 때 비로소 생긴다. 수업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도록 훈련된 한국 학생들에게 질문하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한국 유학생들이 세인트 존스 대학에 입학해 교수에게 많이 듣는 말은 "말을 많이 하라, 네가 그냥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라는 독려다. 세인트 존스 대학과 같이 책 읽기로 생각을 키우고 그것을 토론으로 표현하는 환경을 만나면 그 다음에는 폭발적인 배움이 일어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이다. 이는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경험담이기도 하다.

 

취업을 위한 공부는 책 읽기나 토론을 멀리하게 만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우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실제로 세인트 존스 대학 졸업생들은 혼다, <뉴욕 타임즈> 등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의 유명 기업에서도 선호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있다. 업무와 창의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분석력, 비판적 사고력을 대학교 때부터 훈련받은 학생들은 기업 입장에서 보면 매력적인 인재들이다. 실질적인 업무 경험은 없어도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이 배움을 촉발한다는 메시지는 2009년부터 건국대에서 국제무역학 수업을 하고 있는 레데스마 교수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레데스마 교수는 자신의 수업 방식을 '소크라테스 수업'과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거듭하면서 학생들이 참여를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만 수업에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2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레데스마 교수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수업에서 나온 정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점차 질문하는 수업으로 바꾸어 갔다고 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판을 깨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려고 한다. 수업도 마찬가지로 학생이 참여하는 활동이 있으면, 더 많은 양의 정보를 기억하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게 된다.

 

학생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레데스마 교수는 학점을 산출할 때 참여 점수를 10퍼센트 반영한다. 자신의 질문에 답하거나 질문하는 학생에게 점수를 주는 것이다. 그는 "질문을 하기 시작할 때 학생들은 배우기 시작할 수 있어요. 더 좋은 점은 실수를 하기 시작할 때(학생들의)배움은 가속도를 얻기 시작합니다. 더욱 빠르게 배우지요"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학기 시작에는 참여 점수가 없다가 학기가 끝나가면서 학생들의 참여 점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참여 점수를 받기 위해서라는 점도 있겠지만, 참여 점수는 질문에 대한 동기 부여일 뿐 학생들이 점차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수업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진지하게 호기심을 가진 학생들이 나오면 그때는 수업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다른 그룹과 함께 지식을 공유하려고 하고, 다른 학생들의 호기심도 폭발한다. 이른바 전시 효과, 남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효과다.

 

다만 교수가 "그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질문과 응답에 "괜찮다"고 말해 주거나 "더 좋은 응답이 나오는지 봅시다"정도로 말할 뿐인데도 말이다.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다큐프레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10. 22:47

 

고정관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것들을 그냥 믿어 버리는 것이다. 남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은 '브론토 사우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공룡의 그림이다.

 

이 공룡을 보니까 닥치는 대로 다른 짐승들을 잡아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이 공룡은 실제로는 풀만 뜯어먹고 살았던 양처럼 순한 공룡이다.

 

누구나 이와 비슷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다음 질문에 답을 해 보자.

 

⊙ 하루살이는 과연 이름 그대로 하루만 사는 것일까?

⊙ 곰팡이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라고 생각했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살이는 환경에 따라, 즉 산소와 물의 온도가 얼마나 적당한지에 따라 하루살이들은 약 이틀 반까지 살기도 한다. 또 모든 곰팡이가 사람 몸에 해를 가져다 주는 건 아니다. '페니실린'이라고 하는 푸른 곰팡이는 항생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수히 많다.

 

과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러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가 직접 확인해 본 사실만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학을 잘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교과서만 열심히 공부하면 과학을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과학 성적은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과학 실력을 쌓기는 어렵다.

 

진정한 과학 실력을 쌓으려면 먼저 책을 통해 언어 능력을 키워야 한다. 과학 지식을 비롯한 모든 지식은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으면 과학 실력을 쌓을 수 없다.

 

교과서 외에 다른 과학책을 많이 읽어 보자. 서점에 나가 보면 과학에 관련된 책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나오는 어린이 전문 과학 잡지도 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 보자.

 

20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탐정 추리 소설을 통해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웠다고 한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탐정 추리 소설은 '셜록 홈즈'와 '루팡' 시리즈이다. 이러한 추리 소설을 통해 추리력과 논리력을 길러 두면 과학 공부를 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물론 과학을 잘 하는 능력이 과학 서적이나 추리 소설을 통해서만 길러지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여러 분야의 책을 모두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한다. 과학, 문학, 예술, 역사, 호기심, 리더십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말고 고루 읽어 보자.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과학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과학을 잘하려면 이밖에도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절대 과학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푸르넷 뉴스 2015학년 7월호, 금성출판사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1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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