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가 혁신학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우리 학교는 너무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학교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은 모든 지식을 교사가 더 떠먹여준다. 교사가 아니라도 T나라, 아이스크림 등의 수업프로그램이 가만이 앉아 있기만 하면 다 머릿속에 집어넣다 못해 욱여넣어 주려고 노력한다. 시험 때가 되면 예상문제를 가르쳐주는 친절이 넘치는 선생님도 적지 않다. 학원에 가면 학원선생님이 기출문제니 요약집이니 해서 고농축 영양제처럼 압축해주니 쏙쏙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하거나 고민스러울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이들은 지식소비자이기만 하면 되니까.

 

이것이 옳은 교육일까? 답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아이들을 괴롭히자는 것이다. 숙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단순히 문제를 반복해서 풀거나 암기하는 숙제가 아니라는 전제하라면 말이다. 교실에서도 선생님이 모든 것을 다 알려주겠다는 부지런함과 의욕을 제발 버리라고 제안하고 싶다. 아이들이 하도록 남겨 두자. 스스로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얼마나 큰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의 생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괴롭히라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충분히 괴롭다. 괴로워도 너무 심하게 괴롭다.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어른들은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서 참으라고만 한다. 문제는 정작 괴로워야 할 일이 아니라 엉뚱한 일로 괴롭다는 점이다. 자신의 꿈과 상관없는 공부에 억눌리고 지나친 통제와 간섭으로 고통받고 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생각이나 마음속의 문제가 아닌 여전히 머리길이, 치마길이, 머리색으로 갈등한다. 복잡하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머릿속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언어와 비인격적 대우로 인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상처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괴롭다와 고통스럽다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행복이 깃들 리 없다.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아이들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아이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면 아이들은 점점 더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든다. '마음은 따뜻하게 머리는 복잡하게'가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혁신학교에서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여유 속에서 괴로운 사고의 과정을 통한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학교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다고 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한다.

 

선생님이 일일이 친절하게 머릿속에 넣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찾아가는 힘든 길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학교,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생각이 커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학교. 그것이 혁신학교 제일의 목표이다.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것, 스스로 탐구하며 깨우치는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혁신학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기존의 좋은 학교의 개념이다.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배움이 일어나면 혁신학교에서 추구하는 가치로 오해하기 쉽지만, 혁신학교에는 치열한 자기 고민과 내적 갈등을 통해 깊은 탐구와 통찰이 핵심이 되는 배움의 과정이 있다. 그래서 학력이 혁신학교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혁신학교라 학력이 좀 낮아도 된다는 생각은 혁신학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혁신학교라 아이들이 좋아하기는 하는데 학력이 걱정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아이들 가운데 생겨나고 있는 생각의 크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이다. 제대로 된 혁신학교라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혁신학교가 아이들을 공부로만 내몰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들의 성장과 제대로 된 학력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도 EBS 문제집만 죽어라고 푸는 것으로도 얻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으로 깊이 있는 탐구와 통찰이 가능할 때 어떤 상황, 문제에도 먹히는 실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런 교육이 쉬울까? 혁신학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육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저마다 막연히 이런 좋은 교육이 있었으면 하는 교육의 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편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전망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혁신학교는 우리가 희망했던 교육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학교의 문화가 문제이다. 그래서 혁신학교는 특별한 사업이 아니라 학교의 총체적인 구조를 바꾸고 그것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교사의 자발성과 헌신성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바꾸는 것은 교사와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순간 아이들의 몰입도 창의성도 금방 사그라진다. 교사들의 뜨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사실은 성공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필요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은 분명했다. 누군가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고, 그것이 우리의 교육을 제대로 세우는 길이라는 신념은 바위보다 굳고 강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제 그 혁신학교의 속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보통 대안이다 혁신이다 연구다 시험학교다 해서 보면 학교공부보다는 진로나 정서적인 면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다 보면 기존의 공부는 마치 대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부정적인 관점을 갖기가 쉽다. 그 결과 학력이 저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기존 학교의 폐해들을 고쳐야 되겠지만, 숙제도 내주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서 열심히 사고하고 공부해야 학력이 높아지는 것이지, 많이 놀게 하고 즐겁게 한다고 학력이 좋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이런 실험학교는 그래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2. 20:27

 

1921년 미국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창의력의 아이콘으로 잘 알려진 토마스 에디슨이 자신의 회사 - 이 회사가 나중에 미국에 거대기업인 GE가 된다. - 입사 지망생들을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입사 시험을 도입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한동안 전범처럼 활용했던 150가지 상식문제가 수록된 시험으로, 나중에 '에디슨 질문서'라 불리게 되었고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엉클 샘이 에바를 위해선 한 일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어떤 금속으로 만들어졌는가? 등 암기형 지식을 묻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마침 이 시기에 아인슈타인이 미국을 방문했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돌발질문을 던졌다. "음속의 값은 얼마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기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이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도 단순히 음속의 값뿐 아니라 파동의 특성과 양자역학적 특성까지 설명하는 해박한 물리학 강의가 뒤따라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두지는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기자는 에디슨의 입사시험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의견을 재차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정보의 습득은 교육의 본질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것, 교육의 본질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고하는 능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덧붙여 아인슈타인은 지능의 진정한 지표는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은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교육의 본질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진정한 교육의 목표는 사고하는 능력이지,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필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사고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개인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능력이 된 것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_ 이성대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2. 19:49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전역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기아문제가 심각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해 하루 음식 섭취량의  결핍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는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있었다. 같은 빈민 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이라면 다 같이 영양실조에 걸려야 했는데, 한 집에서 의외로 건강한 아이가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똑같이 배급받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말이다. 기아 전문가들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영양 상태가 양호한 아이가 있는지 더 조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사원들은 베트남 가정을 집집마다 방문해서 그들의 일상 습관을 관찰했다. 조사원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영양 상태가 좋았던 아이들을 더 발견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습관이 있었다. 습관은 바로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을 때, 엄마가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긴 것'이다. 아이들이 개를 만지고 나서도 손을 씻게 했고, 슬리퍼나 운동화를 만진 뒤에도 손을 씻게 했다.

 

손을 깨끗이 씻는 습관에 대한 보고 외에도, 또 다른 습관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가정의 식사 시간을 관찰했을 때, 한꺼번에 밥을 몰아주는 아이보다 음식을 하루 세 번에 나눠줬던 가정의 아이가 훨씬 더 건강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각 가정에 손 씻기와 음식을 나눠 먹는 습관을 권유했고 아이들의 발육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치밀한 관찰력이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점차 호전시킨 것이다. 조사원들의 섬세한 관찰, 곧 '디테일의 힘', '관찰의 힘'이 베트남 아이들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실패하는 다수보다 성공하는 예외에 주목하는 관찰의 힘이 모두를 살려낸 것이다. 같은 악조건의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성공적인 예외를 찾아내 그 예외의 자원을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한 지혜다. 이처럼 성공한 하나의 실례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서 전체에 적용시켜 모두가 잘 되게 하는 것이 '긍정적 이탈'이다.

 

으로 상과 하다_ 최형만(랄랄라~)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0.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