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대비 최고의 효과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로 이어진다. 본래 철학은 '앎에 대한 학문'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이처럼 '앎' 전반에 걸쳐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내가 수많은 글로벌 인재들을 만나서 인상적으로 느낀 점 중 하나도 이 '안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놀라운 탐욕이다. 그냥 '안다'고 하면 추상적인 표현이 돼버리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안다 = 지식 x 철학적 사고

 

철학적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2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독서'와 '경험'이다.

우선 '독서', 즉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만난 글로벌 인재들을 보면 대부분 엄청난 독서가들이다. 특히 고전문학과 철학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의 토대가 굉장히 견고하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토대가 없으면 비록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도 독서를 무척 좋아해서 바쁜 와중에도 1년에 100권 이상은 읽고 있다. 애써 짬을 내서 서점에 들러 책 표지를 훑어보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 내용 확인도 없이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이라도 흥미롭다고 느껴지면 일단 사고 본다.

 

책과의 만남도 하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에 대한 투자는 아까지 않고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비용을 적게 들여 스스로를 성장시켜주는 것들 중 책 만큼 비용 대비 효과가 큰 것은 세상에 없다고 믿는다.

 

세계 1%의 철학수업_ 후쿠하라 마사히로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4. 9. 12:06

 

손을 드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손을 들어라! Raise your hands!

나는 수업 시간에 캠페인처럼 학생들에게 손 들기를 강조한다. 나의 수업은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에 팀을 구성하는데 팀장을 뽑으려고 손을 들라고 하면 학생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다. 손을 드는 학생들은 거의 미국, 프랑스, 독일, 스폐인 등 외국 학생들이다. 보다 못한 내가 한국 학생들을 지목하면 그제야 슬며시 손을 든다.

 

손을 들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이건 명명백백하다. 기회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나를 반겨 주지 않는다. 기회로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손을 들고 그것을 잡아야 그다음 순서로 나아갈 수 있다. 손을 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손을 드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자신이 나를 위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호이다.

 

수업을 예로 들면 손을 들어 팀장이 되는 학생들은 그 직책을 맡아야만 느낄 수 있는 조직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 구성원 간의 역학 관계, 개별 구성원의 특징 파악 등에 관한 것들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발표의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손을 들지 않고 그저 묻혀 있듯 지내다 보면 스쳐 지나가 기억에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학생들은 손을 들어 주목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주목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어쩌나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실수를 한다 해도, 그래서 친구에게 창피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인생에서 그렇게 의미 있을 큰 일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경험,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에 비하면 순간의 두려움은 먼지처럼 가볍고 보잘것없다.

 

자신을 드러내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알게 된다. 타인의 시선은 두 번째이다. 손을 들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무리 속의 한 명, 드러날 것도 주목받을 것도 없는 사람,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말 뿐이다.

 

내가 대학 강의를 통해 손 들기 운동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는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패배한 적 없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변명이다. 시도하면 실패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돌려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손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젊음을 보낸 이들은 거개가 실패한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실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실패가 기다리고 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나는 실패한 적은 없어. 왜? 손을 들지 않았으니까' 하는 자기변명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청춘이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부단히 손을 들며 도전을 했던 기억은 가슴 뻐근한 성취의 쾌감만이 아니라, 때로는 참담한 실패의 기억까지도 머지않은 미래의 비옥한 자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나를 진화하게 하는 동력이다.

 

손을 들어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 몰랐던 것을 알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역시 손을 들어야 알 수 있다. 손을 들어 기회를 잡았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못하는 일이라는 것도 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빨리 알 수 있다. 손을 드는 일은 그 순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원하는 방향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음 순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바로 손 들기이다. 그것으로 많은 일이 연결될 수 있다.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 내가 한번 이뤄 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성과가 있다. 자신이 맺은 유무형의 네트워크는 한 단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2014년 1월 17일, 북경 시내 캠핀스키 호텔에서 자그마한 행사가 열렸다. 쓰촨성 야안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의 청소년들이 선플 본부 홈페이지에 올린 1만여 개의 추모의 글이 담긴 추모집과 선플 음악회를 통해 마련한 2만 달러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행사가 끝난 후, 나는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공익 프로그램과 <나는 가수다>를 만든 MBC TV 김영희 국장이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이 20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한,중 양국의 네티즌이 상대 국가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동영상을 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옳다고 판단되면 실행에 바로 옮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추진하겠습니다"라고 선포했다. 만일 제작된다면 한,중 양국에서 최초로 이루어지는 일로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했던 영상물 제작자 심영인 사장에게 촬영을 의뢰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북경 천안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국 시민들을 만나 촬영을 했다. 심영인 사장은 영상 제작의 귀재이다. 그가 촬영하는 비디오는 모두 풍부한 감성이 담긴 뛰어난 예술적 영상으로 태어났다.

 

심 대표와 나는 귀국하자마자 광화문 광장에 나가 한국 시민들이 중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영상을 촬영했다. 나중에 이 영상은 한중 네티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영상으로 태어났다. 내가 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쉽게 할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두드려야만 이루어진다.

 

내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이 손 들기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생각을 다 알아주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한 뒤에 나를 그 자리에 앉히는 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어떤 사람이 평생 동안 기다렸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말하면 열어 드리려고 이곳에 줄곧 있었습니다."

 

문지기에게 열어 달라고 했으면 벌써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터인데, 단 한 번도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이다.

 

기회는 내가 만들어야 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면 내가 먼저 손짓을 해야 기회가 비로소 내게 미소를 보낸다.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맨 처음 시작은 바로 손 들기이다. 정말 쉬운 방법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_ 민병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3. 31. 08:52

 

나는 오늘을 산다

 

나는 거의 나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 나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도 올해 몇 살이냐는 식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면 만난 대로 나이를 묻고, 나이를 묻지 않은 채로 친해지는 중이라면 또 그래서 나이를 묻는다.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이다.

 

지금도 일간지 등의 매체에서 이름 뒤 괄호 안에 나이를 밝히는, 마치 법칙 같은 관행이 남아 있기도 하다. 유명인의 결혼 기사가 나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전 국민이 모두의 나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중요하다. 나이를 알아야 친구를 할지, 존대를 할지, 아니면 슬쩍 말을 놓을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는 그 사람의 행동의 당위성을 고려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나잇값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나이를 기준 삼아 경험치의 다소를 정해 누군가는 가르치려 들고 또 누군가는 배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 이렇게 나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유교 사상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 중국, 일본도 나이에 관한 질문은 결례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글로벌 에티켓을 다룬 <어글리 코리언, 어글리 아메리칸>을 처음 쓴 것이 1993년이다. 그때부터 2014년까지 다섯 차례나 증보판을 내면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아 고쳐야 할 '어글리 코리언' 에티켓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친하지 않다면 묻지 말아야 질문들이란 나이, 결혼의 유무, 자녀의 유무, 연봉에 관한 것이다. 그중 가장 거리낌 없이 늘 묻는 것이 바로 '몇 살인가'이다. 나이가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할까? 나이는 업무를 하는 데에도, 친교를 나누는 데에도 별 의미가 없는 요소이다. 나이는 젊음이나 늙음을 우리끼리의 잣대에 맞춰 표현하려는 이른바 기호일 뿐이다.

 

나는 젊었을 때에도 나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생 때부터 파트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쳤는데 너무나 젊은 나이의 학생이 어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된 입장이어서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나이를 말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다만 오늘을 살고 있을 뿐, 내가 몇 살이 되려고 몇 살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사회자가 하는 멘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십니까?"이다.

 

지금 이 나이가 어때서?

 

나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방송에 나오는 오늘까지 계속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 있다. 과분하게도 국민 영어 선생님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보통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나이와 방송에 나온 나이를 얼추 계산해 보면 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이로 살지 않는다. 나이는 현재의 나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상관 요소가 없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목표가 자꾸만 생긴다. 내 컴퓨터에는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올해 88세의 이케아의 창업주가 좋은 예이다. 그는 경영권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 두었지만 여전히 회사의 고문으로서 많은 것을 관여하고 있다. 나이로만 보자면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나 흔들의자에서 무릎 담요나 덮고 있어야 어울리겠지만 아직도 열정적으로 이케아의 미래를 일구고 있다. 여전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비행기를 탈 때에는 이코노미 석에 앉는다는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농담 같은 진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죽을 시간도 없다."

 

그는 10분은 무척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88세의 나이에도 10분 간격으로 배치된 빡빡한 일정으로 하루를 보낸다. 여기에서도 나이에 집착하면 '88세의 할아버지가 무척 건강하시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이를 거둬들이고 생각하면 필생의 사업을 일구려는 집념에 찬 한 남자의 열정적인 성공기가 먼저 보일 것이다.

 

나이는 내가 태어나 몇 해째 되었는지 알게 하는 시간의 개념일 뿐이다. 우스갯소리로 생일날 케이크에 꽂을 초의 수를 정하려고 기억하는 숫자일 뿐이다. 외국에서는 이마저도 상관없이 꽂기도 한다. 나이가 나의 경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내 행동의 반경을 정해서도 안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위해 충실히 노력하면 그뿐이다. 나잇값을 고려할 것도, 나이에 걸맞은 행동인가 아닌가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공중도덕을 해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해도 될까요?"

"이 나이에 결혼도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이 나이에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어쩌죠?"

 

큰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라면 나이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원한다면 하면 된다. 몇 살의 당신이 아닌, 목표가 분명한 당신이 원하면 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_ 민병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3. 31. 08:23

by 미스터신 2016. 3. 24. 12:40

 

앞서 언급한 메리 고든이라는 캐나다의 교육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치원 교사를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아기가 가진 힘'을 발견하고 지역에 사는 갓난아기를 초,중등학교에 초대해 아이들로 하여금 한 학년 동안 성장 과정을 지켜보도록 했다. 특히 초중등 아이들 사이의 폭력이나 공격성, 왕따 현상과 같은 문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대두된 때에 메리 고든의 '갓난아기 요법'은 특별한 마법의 힘을 발휘했다.

 

나는 이 '공감의 뿌리'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었기에 몇 년 전 연구를 위해 캐나다 토론토에 머물게 되었을 때, 하루 날 잡아 '공감의 뿌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운이 좋으면 메리 고든 선생도 직접 만나보고 생생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사무실은 토론토 시내로부터는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 주변은 대단히 조용하고 한가했다. 유리로 된 멋진 건물 5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메리 고든 선생은 토론토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밴쿠버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직원 한 분이 친절하게도 '공감의 뿌리'를 소개하는 책자를 골고루 챙겨 주었다.

그 속에는 앞의 사례처럼 유치원이나 초중등 학교 교실에서 운영되는 프로그램들이 자세히 안내되고 있었다.

 

'공감의 뿌리' 재단 대표인 메리 고든 선생은 말한다.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아기가 충동을 조절하는 법을 어떻게 배워나가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갓난아기'와의 만남이라는 체험학습을 통해 초등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공감의 뿌리'식의 교육성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일반 학교에서 정규과목으로 채택하는 학교가 꾸준히 늘어 지금까지 이 교육을 받은 학생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제는 캐나다는 물론 미국과 호주, 영국, 뉴질랜드 등으로 '공감의 뿌리' 학습법이 확산되면서 학교폭력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거나 줄이는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메리 고든은 이미 2010년에 한국에서 열린 '사회적 기업가 정신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공감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갈등을 해결하지도, 이타심을 발휘하지도, 평화를 추구하지도 못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해마다 10대 청소년 300명 내외가 자살하는 나라, 청소년 스트레스 지수가 세계 최고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라도 모두들 떠나버리고 싶어 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2014년 4월의 세월호 사고와 그 이후의 과정을 보더라도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떠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어디에 살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한국사회, 특히 언론 및 정치권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온 나라가 돈벌이에 혈안이 된 나머지 사회 전체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메리 고든의 '갓난아기 요법'은 앞서 살핀 바, 갓난아기와 어머니를 일반 학교에 정기적으로 초대해 1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갓난아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생들끼리 생각과 감정, 느낌을 공유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대체로 이 교육을 받은 학생 중 70% 이상은 봉사정신과 친사회적 행동이 증가했고, 프로그램 보급이 10년이 지나면서 캐나다 전역에서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현상이 90%나 줄어든 것으로 관찰됐다.

 

'공감의 뿌리', 과연 무엇이 어떻게 작용해서 마술 같은 효과를 내게 될까? 내가 보기엔 유치원생이건 초중등생이건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과 '갓난아기'와의 만남이 '뜻밖'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보인다. 유치원 아이나 초중등 아이들은 갓난아기를 보면 '뜻밖에' 자기 동생이 온 것처럼 보일 것이고,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런 아기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갓난아기의 특성이다. 갓난아기는 아직 사회적 편견이나 고정 관념에 노출되지 않았다. 아주 순수한 편이다. 이런 아기를 만나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감정을 재발견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곧, 갓난아기와의 '뜻밖의' 만남이 결국은 학생들 자신의 순수한 원래 모습과 접촉하게 함으로써, 사람마다 갖고 있는 '공감의 능력'을 발달시키게 되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강자 동일시'만 하는 게 아니라 '약자 동일시' 곧  '약자와의 공감'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의 고통이나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약자의 내면을 이해하고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나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역량,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게다가, 공감 능력의 발달과 함께 학습 능력도 향상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인이나 다른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은 집중력을 높이고 이해력을 높임과 동시에 창의성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이미 900년 전에 중국의 소동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대나무가 내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 손에 붓을 쥐고 눈으로 집중을 하면, 그림이 바로 내 앞에 떠오른다. 그럼 그림을 재빨리 잡아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냥꾼을 본 토끼처럼 그림이 잽싸게 사라진다."

 

로버트와 미셸 루트번스타인이 쓴 '생각의 탄생'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힘'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란 책에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는 긴 역사의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 고찰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앞으로 세계의 경제는 경쟁과 독점의 시대가 아니라 공감과 협력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망한다.

 

"인간 이해에 기초하고 분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협업의 경제 체제에 동승한 개인, 기업, 나라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렇다. 갈수록 석유 문명에 기초한 경제 성장의 신화는 종말로 치닫는다. 자본주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생산력을 발달시켰지만, 마치 '이카루스 역설'처럼, 그 과정 속에서는 우리는 자연이나 타자와의 공감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공감 능력마저 잃어버린 게 아닐까?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세 아이 모두 내가 직접 경작하는 텃밭에서 지렁이와 함께 놀던 때가 있었다. 보통 도시 아이들은 지렁이를 보면 기겁을 한다. 사실 어른인 나도 지렁이나 뱀을 보면 끔쩍끔쩍 놀란다. 그런데 지렁이는 사실 유기농 농사에서 엄청 중요한 일을 한다. 음식물 등 각종 유기물을 분해하여 마침내 퇴비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생태 순환형 살림살이 경제에 지렁이는 매우 소중한 존재다. 이런 걸 알고 난 뒤 나는 아이들에게 "지렁이가 없으면 맛있는 상추도 못 먹는다. 지렁이가 큰 일꾼이란다. 지렁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알려주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지렁이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행여 지렁이가 밭에서 기어 나와 길가에서 길을 잃고 있으면 아이들은 조심스레 지렁이를 손에 담아 밭으로 넣어주곤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죽임과 혼란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식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자란 아이들은 감성이 살아 있고 오감이 살아 있으며 자기 삶의 책임성 있는 주체로 잘 자란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공감, 소통, 연대)의 회복이야말로 메리 고든이나 제레미 리프킨의 메시지처럼, 나를 살리고 관계를 살리고 경제와 세상을 살리는 토대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 교육혁명_ 강수돌

 

by 미스터신 2016. 3. 14. 11:17

 

언젠가 대안교육 전문지 '민들레'에서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바로 이거다!"라고 느낀 적이 있고, 내가 쓴 책 '나부터 교육혁명'에도 그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옆집 아줌마'의 위력은 너무나 크다.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우선, 내가 여기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아줌마 또는 어머니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건 아니다. '옆집 아줌마' 이야기의 본질은, 아빠는 돈벌이 기계로 전락하고 동시에 엄마는 아이의 성적 관리자가 되어버린, 우리 모두의 뒤틀린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람직한 모습은, 엄마나 아빠가 일정한 사회경제적 활동을 하되 하루 중에 한 나절만 일하고 그 외 시간의 많은 부분을 자녀 교육이나 자녀와 함께 활동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지금처럼 엄마 아빠의 일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상태로, 그리하여 엄마가 아이 교육,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의 점수 올리기나 일류대 입시 준비를 전적으로 담당하다 보니 사실상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중노동을 수행한다. 잔업, 철야, 특근도 마다않고, 또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먹으며 자존감이 상하는 일도 겪어가며 돈 벌어다 주는 아빠나, 아이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엄마나 삶의 스트레스는 극한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시급히 바꿔야 할 현실이다.

 

이런 잘못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한 위에서 이제 '옆집 아줌마' 이야기를 다시 보자.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자녀 교육에 관한 좋은 강의를 듣고 아무리 좋은 교육 서적을 읽은 뒤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막상 다음 날 '옆집 아줌마'만 만나고 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옆집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는가?

 

옆집 아줌마가 먼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인성교육이고 자연교육이고 대안교육이고 말은 참 좋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앞으로 더 살벌해질 세상에서 과연 아이가 먹고살 수나 있을까?"

 

그렇다. 역시 생계 문제다. 생각해보니 지금 아빠도 바로 그 생계 전선에서 매일 힘겹게 살고 있지 않은가? 경쟁은 치열하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다리 질서에서 높은 등급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이도 나처럼 '뺑이치고' 살게 될 것 같다. 심하면 서울역 같은 데서 보는 노숙자처럼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돈다.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결론은 "그래, 사실 그 말도 맞네. 아이고, 이를 어쩌나? 혹시 좋은 학원이나 과외 선생 아는 데 있어요?" 로 끝난다.

 

이제 이 부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받는 가운데 과연 부모인 나는 행복하게 자라왔던가? 우리 스스로의 경험을 반추해보자는 얘기다. 만약 중3이나 고3을 다시 한 번 해보라 하면 기꺼이 할 것인가?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가? 만일 본인도 행복했고 아이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느낀다면 그렇게 계속 가면 된다. 사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도 '모두 행복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아이나 어른이나 지금의 모습이 행복하다면, 더욱 치열하게 경쟁적으로 공부하도록 하면 된다. 그것이 참 행복의 길로 느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 교실 붕괴를 촉진하는 아이들, 탈학교를 결심하는 아이들을 곰곰 생각해보면 결론은, 이 모든 일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들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너도 나도 자기 자식을 전쟁과 같은 입시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다른 말로, 보다 슬기로운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 식으로 경쟁 교육을 계속한 것이 지난 50년 정도의 대한민국 교육이었다. 대학 입시, 나아가 일류대 합격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고교로부터 중학을 거쳐 이제는 초등 수준까지 내려갔다.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아니면 태아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몇 년 전, 어떤 엄마가 세 살짜리 아이의 혀 밑 근육을 잘라 영어 발음을 원어민처럼 하게 만든다고 하는 바람에 해외 토픽감이 된 적도 있다. 다른 편에서는 많은 부모들이 초등 아이들을 억지로 부모 품으로부터 떼어내 '조기유학'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바람직한 결과를 얻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특히, 이른바 '기러기 아빠'들의 애환이나 자살 소식이 들릴 때면, 과연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미쳐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식으로 가면 과연 10년이나 20년 뒤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과연 더욱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난공불락의 엄청난 실력을 듬뿍 다지고 배움의 기쁨에 행복해하며 모두 멋진 실력자가 될까? 옆집 아줌마가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모두들 따라 갔을 때 이 세상은 과연 좋아지는 걸까, 아니면 갈수록 나빠지는 걸까? 우리가 길을 가도, 이게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셋째, 아이의 생계 문제는 굳이 부모가 일일이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가 머리가 커지면 스스로 고민하게 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모든 걸 마련해주는 것이 진정 행복할까 아니면 아이가 커서 독립해 숟가락 하나라도 스스로 장만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옛말에 "아이 먹을 것은 자기가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진정 걱정할 것은 아이의 생계가 아니라 꿈이다. 꿈을 키우는 아이, 그 꿈을 좇아 즐거운 마음으로 실력을 키우는 아이, 그 실력을 자기 행복만이 아니라 사회 행복을 위해 쓸 줄 아는 아이, 바로 이런 '일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행복한 세상이 된다.

 

그렇게 꿈을 키우고 실력을 키워 사회 헌신까지 하는 아이들은 생계 문제도 거뜬히 해결한다. 꿈을 좇아 정진하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실력을 인정받아 먹고살 길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호화판으로 살지는 못해도 소박한 살림살이는 탈 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편, 매일같이 생계 걱정만 하며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하니, 결론은 뻔하다. 늘 생계에 허덕거리며 살거나, 생계 해결을 한답시고 대부분 돈과 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이들은 삶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재테크 이야기만 하고 산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속물 사회 또는 물신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꿈과 소신에 따라 사는 이들의 인생은 향기가 나고 멋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멋진 사회, 행복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바로 그 옆집 아줌마조차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도록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교육혁명_ 강수돌

by 미스터신 2016. 3. 14. 08:04

 

나에게는 15학번인 아들이 있다. 며칠 전 아침을 같이 먹으며 혹시 올해에 입학하는 후배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들놈은 단호하게 한 마디로 표현했다. '기-승-전-공부'라는 것이다. 그럼 '니가 생각하는 공부란 어떤 것이냐' 하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또 한 마디로 대답한다. '현실 공부'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대학 1학년 동안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내린 결론이란다. 시간이 없어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그 날 하루 종일 아들이 말한 '현실공부'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아들이 한 말은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이 말엔 많은 학생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 대학 수업은 진짜 공부인가? 자기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를 결정하고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은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시험 성적에 따라 학과를 결정하며, 미리 진로를 생각한다 해도 대부분 사회적 평판이나 수입에 따른 결정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대학 강의실에서의 수업이라 해도 정말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목이 아닌 경우, 그저 시간을 때우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3월 개강 후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 풍경을 잠깐 그려보자. 조그만 흑백사진이 붙어있는 출석부를 펼치고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듯 한 사람씩 부른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면 처음의 긴장이 20분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가장 단기적인 시간이 20분이라 한다. 이 때쯤이면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학 입학 후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여행,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대답과 함께 미팅이나 소개팅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 다시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서부터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경험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상대인지 명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묻는다. 서로 질리지 않고 오래 만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하기 어렵다. 이제 학생들이 반문한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하면 될까?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공부해라' 학생들은 다시 말한다. '데이트 하는데 무슨 공부를 해요?' 그럼 나는 또 대답한다. 발전하지 않는 관계는 금방 질리고 끝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술관에 가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러간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런 준비 없이 둘이 같이 본 그림이나 유물들 혹은 영화에 대해서는 짧은 감탄사 이외의 느낌을 더 말하기 힘들다.

 

오직 입시 준비만을 해 온 학생들에게 모든 그림이나 영화는 내 인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먹고 마시며 일상적인 소비생활로 돌아간다. 단순하고도 지속적인 소비밖에 없다. 그런데 미리 공부를 하고 가면 어떨까? 간단하게라도 미술사에 대하여, 영화감독에 대하여, 장르적 특성에 대하여 실로 공부를 하자면 끝이 없다. 데이트를 하고 나온 이후에도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앞으로의 만남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대를 새롭게 보게 될 것이고 내가 얼마나 좋은 상대를 만나게 되었는가 감사해 할 것이다. 나는 어떤 데이트를 할 것인가?

 

모든 공부는 시험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공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더욱 알차게 만들어준다. 공부는 현실과 접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생들은 어떤 공부를 할 것인가? 살아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떻게 하면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것인가. 답은 한마디로 '기-승-전-공부'다.

 

_ 전승주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by 미스터신 2016. 3. 13. 20:46

 

엑설런스를 향해 가다 보면 위협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정도면 됐지 Good enough.'라는 생각이다. '이 정도'의 성과와 엑설런스의 성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천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이 정도면 됐으니 더 이상 올라갈 필요가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 버리는 행위다. "나는 야망도 없으며 더 발전할 필요도 없다." 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엑설런스는 그 말 자체에 '안주'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계속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엑설런스다.

엑설런스에 도달하는 데 너무나 큰 벽이 바로 '이 정도면 됐지.'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당신은 방금 이룩한 경지에서 다시금 내려오게 된다. 항상 "아직 더 잘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50%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cellence 전문가는 커다란 사고를 의미하는 'Big Head'를 갖고 해낸다.

 

엑설런스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해 보면 엑설런스한 이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직무에서 벗어나 그 이상을 해낸다. 이 사고를 '빅 헤드 접근법' 또는 '큰 사고'라고 한다. 이 개념은 이스라엘 산업, 군대에서도 중요시 여겨지는 가치다. 규칙만을 따라가는 대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직원들은 언제나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상사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잠재력은 항상 당신의 현재 능력보다 크다. 이 잠재력을 매일 실현하는 것이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엑설런스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사회는 급변하고, 새로운 과제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으며 하루하루 요구되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모험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 엄청난 모험의 한 부분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방관자가 되고 싶은가? 만약 이 모험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좋은 결과를 넘어서는, 엑설런트한 결과를 항상 추구해야 한다.

 

이매지노베이션_ 윤종록

by 미스터신 2016. 3. 13. 20:25

 

지금 시작하십시오

내 뜰에 꽃을 피우고 싶으면

지금 뜰로 나가 나무를 심으십시오

내 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상

당신은 언제나 꽃을 바라보는 사람일 뿐

꽃을 피우는 사람은 될 수 없으니까요

 

지금 시작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시작하십시오

지금 그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은 당신으로부터 날마다 멀어져

아무리 애써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지금 뿌리십시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지금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마음밭에 뿌리십시오

지금 뿌리지 않으면 내 마음밭에는 나쁜 생각의 잡초가 자라

나중에는 애써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려도 싹조차 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나의 전공은 성공입니다_ 이창형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2. 9. 19:25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 번째 나무가 자랑한다. "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 두 번째 나무는 "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며 으쓱한다. 세 번째 나무가 이에 질세라 뽐낸다. "나는 아주 향기로운 예쁜 꽃들을 많이 맺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한 그 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물'.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가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이때 성경책 북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그 접착제를 쓰겠다며 찾아온다. 자신이 개발 중인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강해 한 번 책장에 붙이면 뗄 때마다 종이가 찢어져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와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물병은 물을 충분히 담을 수 있고 또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꼭 맞는 조롱박만을 골라 물병을 만들었다. 어느 해, 엄청나게 큰 조롱박만 주렁주렁 열리자 고민에 빠진다.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조롱박을 잘라도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조롱박을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자 가게 밖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쓸어 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그 큰 조롱박 둘레에 그물을 씌운 다음, 그것을 허리에 동여매고 물에 띄었다. 조롱박이 커서 공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기에 둥둥 잘 떴다. 조롱박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바깥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의 또 다른 사례다.

 

장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물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과 입시생들의 면접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부모와 싸우고 온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순간 전쟁 시작이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너 그럼 굶어 죽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 공부해서 뭐 하려고 그래." 1973년에 연세대 철학과 원서를 쓸 때의 나도 그랬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인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쓸모없는 철학으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철학, 인문학의 그 쓸모없음에 쓸모 있음이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 철학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바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철학을 만나시길. 인문학을 만나시길. 그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철학의 힘_ 김형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3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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