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에 어린애들이 읽을 만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집에 있는 성경과 찬송가책을 제외하고는 마을에 거의 책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어 보지 못했다. 우리말로 된 아동문고쯤은 학교에 갖추어 두었음 직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14살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학교가 숭실전문학교와 같은 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전문학교를 위한 도서관이 있었다. 이층으로 된 도서관에는 많은 장서가 있었고 상급생들이 이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부분의 장서는 일본어로 된 책들이었고 전문학교 학생과 선교사들을 위한 영어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글 책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1930년대에는 우리글로 출판된 책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그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적지 않은 책들을 읽었다. 독서에 굶주려 있기도 했지만, 사실 독서를 하지 않고 학교 공부만 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기도 했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학교 공부보다 책 읽기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고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만일 좋은 스승이나 부모님이 나의 학업과 독서를 조화롭게 이끌어 주었다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나친 독서는 어린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물론 지금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습관이 나로 하여금 오늘의 사상과 문필을 육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종종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물론 내가 좋은 글을 쓰는 편은 못 되지만, 그때마다 나는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그러면 자연히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다독과 정독의 조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는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은 많이 읽을수록 좋다"고 대답한다. 전공 분야의 독서는 자연히 정독이 될 테니까.

 

또 어떤 이들은 "오늘날과 같은 각종 미디어와 정보사회에 살면서도 예전처럼 독서가 필요한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렇기에 독서는 더욱 필요하다"고 대답한다. 정보는 생활에 필요한 보도일 뿐 내 삶을 키워 주지는 못한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은 살아가는 데 상식을 제공할 수는 있느나 내 영혼을 살찌게 하고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역시 독서는 인간적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임을 의심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품고 반세기에 걸친 세월을 이어 오고 있을 무렵, 한 출판사에서 나의 독서 이야기를 정리해 주기를 청해 왔다.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도 못 되고 나의 독서 생활이 어떤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망설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살아 온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출판을 수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사회적으로 '책의 해'가 선포되었고 독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일이 사회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또한 그 즈음 '한우리 독서운동'에 작은 뜻이나마 모으고 있던 때여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7회에 걸쳐 연재된 내용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양의 원고가 되었다. 연재를 끝내고 이렇게 단행본으로 엮어 독자들 앞에 책으로 내놓게 되고 보니 독자들을 위해 체계적인 내용과 뜻있는 길잡이가 되는 글들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내가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읽었던 전문서적들은 일반 독자와 호흡이 맞지 않아 대부분 실을 수 없었던 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즐겨 읽는 책들을 취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 자신도 그중의 몇 권은 읽었고 지금도 계속 그런 책들을 손에 잡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나의 정신적 양식이 되어 인간적 성장에 크게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므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이다음에 어떤 필자가 나와 같은 독서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그럴 것 같다. 역시 독서란 고전적 의미가 있어 값진 것이며 지성적 교양을 갖춘 독자들과의 대화가 가능할 때 그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나도 신문에 연재되고 있거나 연재되었던 문학책 등을 여러 권 읽었지만, 그런 책들은 왜인지 재음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은 언제나 살아 있어서 객관적 생명력과 의의를 지니고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처음 쓴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늙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좀 지나친 표현인 것 같지만, 나는 책만 손에 잡으면 언제나 그 책의 주인공이 되고 책의 내용과 같은 삶을 호흡하게 된다. 20대의 연애 감정에 잠기거나 종교적 고뇌에 빠져 들기도 하며 철학적 사색의 심연에 머물기도 한다.

 

확실히 독서는 나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삶의 열정과 꿈을 안고 살도록 이끌어 준다. 독서가 영원한 삶을 살게 해준다면 과장이며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깊이 있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도록 이끌어 준다는 말은 결코 과장도, 거짓도 아니다. 지금도 그런 책에 도취되어 살며 어떤 연구 문제와 씨름하고 싶어 책을 들추는 때가 있다. 14살 때 독서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그 독서가 나에게 젊음과 꿈을 계속 안겨 주고 있다는 사실에 한없는 감회와 감사를 느낀다.

 

'독서의 길은 영원하다'는 말이 독자들의 고백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2021년 5월

 

김형석

 

김형석 교수를 만든 백년의 독서

by 미스터신 2021. 8. 8.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