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가 안 되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의 훈육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아이들은 어린 시절 자주 심하게 벌을 받았다. 심지어는 사소한 실수에도 부모로부터 뺨을 맞고, 주먹으로 맞고, 발로 채이고, 두들겨 맞고, 회초리로 맞았다. 그런데 이러한 훈육은 의미가 없다. 절제되지 않은 훈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훈육이 무의미한 이유는 부모 자신들이 자제가 안 돼 있어서 아이들에게 그런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하지 마라"고 하는 부모다. 그들은 아이들 앞에서 자주 술 취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위엄도 조심성도 분별도 없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되는 대로 살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할 것이다. 부모의 삶이 무질서하고 정신없으면서 자녀들에게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주기적으로 때리는 가정에서, 여동생을 때렸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아이를 때리면 아이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에게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 아이는 그 말이 이해가 될까? 어릴 때는 비교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린 눈에 비친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부모가 하루하루 자제하고 조심스럽고 품위 있게 행동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사는 방식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매일을 무질제하게 제멋대로 사는 부모를 보아도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때로 무질서하고 정신 사나운 가정에도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정에서는 절제할 줄 아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다. 의사, 변호사, 여성 사업가, 자선 사업가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절도 있고 단정하게 생활하는 부모이기 쉽다. 그러나 만약 사랑이 부족한 경우 그런 부모들은, 가난하고 무질서한 가정에서 자란 여느 아이들처럼 무절제하고 파괴적이고 정리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길러낸다.

 

결국 사랑이 전부다. 사랑의 신비함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책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위해 이 시점에서 사랑과 훈육과의 관계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간략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자동차와 사랑에 빠진 십대를 유심히 보라. 아이는 그 자동차를 홀린 듯 바라보고 광을 내고 수리하고 튜닝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혹은 사랑하는 장미 정원에 있는 노인을 보라. 그는 정원에서 가지를 쳐내고 뿌리를 다독여주고 거름을 주고 정원을 자상하게 살피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녀를 사랑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아이들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돌보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자녀에게 줄 시간이 없거나 시간을 들일 마음이 없으면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훈육의 필요성이 은근히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고 만다. 훈육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때도,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더 편하다는 생각에 이를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저 오늘은 아이들을 돌볼 에너지가 없을 뿐이야."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침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 짜증을 돋우면 어쩔 수 없이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 때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 문제에는 어떤 훈육이 가장 좋을지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도 않고, 교육적 의도에서라기보다는 화가 나서 가혹하게 훈육을 하게 된다.

 

아이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부모는 아이가 확실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를 훈육해야 할 미묘한 순간도 알아차리고 애정과 배려로 부드럽게 타이르거나 야단치거나 방법을 알려주거나 칭찬을 한다. 그러한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케이크를 먹고, 어떻게 공부를 하고, 어느 때 살짝 거짓말을 하는지, 어느 때 문제에 부딪치기보다는 문제에서 도망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답하고, 이럴 때는 약간 조이고, 저럴 때는 약간 풀어주고, 조금 가르치기도 하고, 이야기도 좀 들려주고, 살짝 안아서 뽀뽀도 해주고, 훈계도 좀 하고, 살짝 등을 두드리면서 시간을 들여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고쳐주고 바로잡아준다.

 

그러므로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훈육 방식은 사랑 없는 부모의 그것보다 질적으로 월등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는 아이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결정을 내릴 때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아이와 고통을 함께한다. 아이들은 맹인이 아니다. 부모가 자기와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당장 고마움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이들 역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받고 있으니 고통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거야. 나도 기꺼이 괴로움을 견뎌야지" 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자기 절제의 시작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는 부모는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서 아이에게 자주 사랑을 고백하고, 정말 친밀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한다. 아이들은 결코 이러한 공허한 말에 속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면서 의식적으로 그 말에 집착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부모의 말이 행동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와 반대로, 진정으로 사랑받는 아이들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무시당했다 주장하고 억지를 부릴지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러한 인식은 황금보다도 가치가 있다. 자신이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 다시 말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느낀다면,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이며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 그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믿음은 어린 시절에 획득해야만 한다. 성인이 돼서 그것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역으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어른이 되어 시련을 겪더라도 그러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 느낌은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돌보게 된다. 자기 절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계획을 세우고 일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을 이야기해왔으니 시간의 문제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만약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면 시간을 소중하게 느끼게 되고 시간이 소중하게 생각되면 시간을 잘 이용하고 싶어진다. 앞서 소개한, 일을 미루기 일쑤였던 재무분석가는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중하게 생각했더라면 하루의 대부분을 그렇게 비생산적이고 불행하게 보내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원했다면 완벽할 정도로 잘 돌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돈을 받고 아이를 돌보는 집으로 그녀를 보내버렸다.

 

부모는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하찮은 존재이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며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절제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지적이고 유능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절제에 관한 한 가장 기초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자기 가치와 자기 시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면, 시간을 절약하고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변함없는 사랑과 돌봄을 받은 운 좋은 아이들은 자기 가치를 마음속 깊이 인식할 뿐만 아니라 깊이 안정감을 느끼면서 성인으로 자란다. 모든 아이들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생후 6개월에 접어들 무렵, 즉 자신이 부모와는 분리된 개별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은 아주 무력하다는 것, 즉 모든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한 온갖 것들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것이 모두 부모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은 죽음과 같다. 아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 때는 상대적으로 무심하거나 냉담한 부모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는 본능적으로 민감하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해서 확신을 시켜준다.

 

"엄마 아빠가 너 혼자 내버려두고 가지 않는다는 것 알지?"

"당연히 엄마 아빠가 너를 데리러 올 거야."
"엄마 아빠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이러한 말들이 행동과 일치하면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될 때쯤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세상은 안전한 곳이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보호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언제나 안전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유롭게 이런 저런 즐거움을 뒤로 미룰 줄 알고, 즐거움을 위한 기회는 집과 부모처럼 언제나 거기에 있으며 필요하면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부모가 죽고 없거나 버림받거나 순전히 방치되거나 재무분석가의 경우처럼 단지 사랑이 결핍되거나 해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아이들은 실제로 상당히 많다. 그런데 사실 버림받지 않는 아이들도 부모에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은 받지 못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부모는 가능한 쉽고 빠르게 훈육하고 싶어서 노골적으로든 은근하게든 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부모가 아이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얼 말하는지 알겠지?"

 

물론 그것은 버림받음이고 죽음이다. 이러한 부모는 아이를 조정하고 지배할 필요 때문에 사랑을 희생한다. 그 대가로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버림받은 채, 세상은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뿌리 깊은 의식 없이 성인에 이른다. 그들은 반대로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으로 인식하고 미래에 더 큰 즐거움이나 안전을 보장받는다 해도 현재의 어떤 즐거움이나 안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참으로 미심쩍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 훈육할 줄 아는 역할 모델과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하고 존재의 안전함을 신뢰해야 한다. 이러한 '자산들'은 부모의 자기 절제와 순수하고 일관된 보살핌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부모에게서 이러한 선물을 받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획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획득 과정은 힘든 투쟁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평생 걸릴 수도 있고 그나마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0. 1. 20:06

 

http://www.ttimes.co.kr/index.html?no=2015083111097765059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8. 31. 19:21

 

국가적으로도 창조경제를 외치고 창의융합이니 창의인성이니 하면서 입만 열면 창의성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창의성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창의성이란 것이 창의성을 기르는 훈련을 하면 생겨나는 것인지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간단하게 '창의적인 생각이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다른 생각은 어떻게 나오게 될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열심히 잘 듣고 암기하려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머리에서 나올까? 일 년 내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적막이 감도는 엄숙한 교실에서 나올까?

 

다른 생각은 다르게 보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외국의 한 학교 - 아마 발도로프 계열의 학교일 것이다. - 에서는 예술 수업을 강조하는데 특히 미술 수업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교의 미술시간은 여러 가지 재미있고 특이한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물을 관찰하고 그리는 수업 장면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사물을 한 가운데에 두고 아이들이 뺑 둘러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었다. 그게 뭐 그리 특별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특별한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은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사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그리는 아이들의 그림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의 모습만을 그리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아이들이 보는 모습을 그릴 수 없다.

 

이런 수업이 왜 중요할까? 이 수업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전체로 투영되어서 모든 사물과 현상에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며 다른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각이 도움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 반드시 다른 시각이 있어야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수업이 놀라운 수업이라는 것이다. 교사는 미술 수업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라든지 협력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배우고 협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백 번의 말보다 교과서에 담긴 어떤 내용보다도 이런 자연스러운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이 더욱 강하게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창의적인 생각을 기르기 위해 다른 시각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당연한 것에도 의문을 갖는 것이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상식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전문가가 이미 결론을 내놓은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말이다.

 

우리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업적은 바로 이런 의문을 갖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면서도 실제로 자기 스스로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가? 무거운 것과 물은 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 지금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사실들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의심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해치는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우리의 학교에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고 독특한 호기심을 발하는 아이들이 문제아 취급을 받는 것처럼, 뛰어난 인물들도 그 시대에는 고난을 당하기도 했으니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이렇게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과 질문을 던지는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나온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학습방법으로는 길러지기 힘든 배움의 자세이다. 지식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일 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출발은 비판적인 사고에서 시작된다. 그럼 비판적 사고는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북돋아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는 세상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나온다. 부모나 선생님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 중에 하나가 "원래 그래." 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는 듯하다.

 

인간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햇빛이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에 흥분하지 않을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래." 라는 한 마디로 아이들의 사고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지적 폭력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아이들은 마침내 깨닫게 된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것을. 몇 번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 날아오는 것은 짜증 섞인 어른들의 반응뿐이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돌아오는 것은 문제아라는 낙인뿐이다. 이런 문화가 우리 아이들을 교실에서 질문이 없는 아이들로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만이 정답인 학교에서 다른 생각은 불이익을 가져올 뿐이다. 정작 교과서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사고의 단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사실 교과서란 모든 지식을 해체해서 뼈대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국가가 아이들을 교육할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만든 후 거기에 필요한 지식들을 제시하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교과서이다. 따라서 이것이 절대화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교과서 시대를 너무 오래 거친 탓에 교과서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교과서에 기초한다는 말이 교과서만 들입다 외우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식이란 교과서이든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것이든 그것을 기초로 다양한 자료와 내용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대단히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많아서 그것 자체가 진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에서조차 기존의 주장이 뒤집히는 기막힌 일들이 생기지 않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우롱해왔던 천동설이었고, 최근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심각한 도전에 빠지기도 했었다. 물론 오류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아인슈타인이라는 대물리학자의 권위에 의문을 갖고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그 탐구정신이 어쩌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를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지식과 업적에까지 도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온 것이다. 하물며 다양한 주장과 불완전한 사실을 다루는 교실이라면 더 많은 도전이 있어야 할 일이다. 더 많은 의문을 갖도록 부추기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제대로 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지식의 불완전성과 객관이라는 가치의 허약한 실체를 제대로 이해시킬 때 사물이나 현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양한 가치와 다른 시각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도, 지식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사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교실에서 멍하게 공상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깐족거리면서 "왜요?"를 반복하는 아이들에게 꿀밤과 고함을 안기기보다는 그 아이가 정말 훌륭한 아이가 될 것이라는 기대의 눈빛을 보내라고 이야기한다.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말썽피우지 않는 아이가 편하고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 따르는 아이가 예뻐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열망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일 수 있다. 주어진 질서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 일반적으로 사회와 학교 시스템이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아이들이 바로 이런 부류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다루기 힘들고 때로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자기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고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의문이 자신의 자제력을 이겨버리는 그런 아이들이 종종 더 대단한 성취를 거두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사례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으로 꼽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인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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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으로 유명한 케네디 가에서 촉망받던 아이는 전쟁 중 전사한 케네디의 맏형인 조셉이었다. 형 조셉과 함께 사립명문학교인 초트스쿨을 다녔지만 늘 말썽만 일삼던 케네디는 경쟁상대로 생각했던 형이 졸업하자마자 전혀 다른 학생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트스쿨 교장이 케네디의 아버지에게 보낸 다음 편지글은 케네디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잭(케네디 대통령의 애칭)은 명민하고 개성이 뚜렷한 개인주의 성향의 소유자입니다. 형인 조와 달리 마구를 채우기 힘든 야생마 같은 심성이 있습니다. 잭에게는 천부적으로 독자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또 기지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는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잭 같은 학생에게는 적응과 조정과 성장의 기간을 참작해야 합니다. 평범한 모범생의 심성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교사나 부모들의 골치를 썩이는 경우가 훨씬 적습니다만, 결국에는 잭 같은 아이가 더 흥미 있고 더 보람찬 성과를 얻게 되기 마련입니다."(최효찬, <세계명문가의 독서교육>)

 

꼴통 같은 녀석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겠지만 한 호흡만 가다듬고 그 내면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그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길 만한 엄청난 일들을 해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으로 파고들다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큰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행복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런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행복한 일이라면 그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하게 되고 그럴 때 놀라운 성과를 만들게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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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비유의 하나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페르마의 정리는 수백 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혀온 난제 중의 난제였다. 수많은 천재수학자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문제이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던진 페르마는 전문 수학자가 아니라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의원이자 지방 판사였다. 수백 년간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이 문제에 도전한 많은 수학자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학적 진전이 있었고 이것은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인류는 한 발씩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일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 위대한 수학자도 페르마가 남긴 세기의 난제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의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오일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낸 수많은 수학적 업적은 우리 인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수학자들의 도전에 발판이 되었고, 마침내 페르마의 정리는 임자를 만나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문제의 도전자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푼다고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느라 수년에서 수십 년을 바치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매달리게 했을까? 그것은 스스로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런 보상이나 대가가 없을 때 새로운 생각이나 진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류가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 교훈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그런 교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자신을 평가하는 척도로 생각한다. 그 평가라는 것이 자동차, 집, 연봉등으로 정의되는 능력인데, 이것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정작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가치 없는 일을 좇느라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 기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더 이상 돈이나 지위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게 된다. 돈이나 지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나 지위를 갖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위한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 돈과 자동차, 승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주는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는 것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충만한 에너지가 새로운 생각,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

 

세상과 사물의 한 면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새로운 생각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대가나 보상과 상관없이 집요하게 지식의 본질을 추구하고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 세가지 요소들이 바로 우리 아이들을 창의적인 인간으로 길러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신안산대학교 부교수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3. 21:14

 

그것은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가 혁신학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우리 학교는 너무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학교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은 모든 지식을 교사가 더 떠먹여준다. 교사가 아니라도 T나라, 아이스크림 등의 수업프로그램이 가만이 앉아 있기만 하면 다 머릿속에 집어넣다 못해 욱여넣어 주려고 노력한다. 시험 때가 되면 예상문제를 가르쳐주는 친절이 넘치는 선생님도 적지 않다. 학원에 가면 학원선생님이 기출문제니 요약집이니 해서 고농축 영양제처럼 압축해주니 쏙쏙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하거나 고민스러울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이들은 지식소비자이기만 하면 되니까.

 

이것이 옳은 교육일까? 답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아이들을 괴롭히자는 것이다. 숙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단순히 문제를 반복해서 풀거나 암기하는 숙제가 아니라는 전제하라면 말이다. 교실에서도 선생님이 모든 것을 다 알려주겠다는 부지런함과 의욕을 제발 버리라고 제안하고 싶다. 아이들이 하도록 남겨 두자. 스스로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얼마나 큰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의 생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괴롭히라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충분히 괴롭다. 괴로워도 너무 심하게 괴롭다.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어른들은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서 참으라고만 한다. 문제는 정작 괴로워야 할 일이 아니라 엉뚱한 일로 괴롭다는 점이다. 자신의 꿈과 상관없는 공부에 억눌리고 지나친 통제와 간섭으로 고통받고 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생각이나 마음속의 문제가 아닌 여전히 머리길이, 치마길이, 머리색으로 갈등한다. 복잡하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머릿속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언어와 비인격적 대우로 인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상처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괴롭다와 고통스럽다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행복이 깃들 리 없다.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아이들을 괴롭혀야 한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아이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면 아이들은 점점 더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든다. '마음은 따뜻하게 머리는 복잡하게'가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혁신학교에서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여유 속에서 괴로운 사고의 과정을 통한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학교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다고 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한다.

 

선생님이 일일이 친절하게 머릿속에 넣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찾아가는 힘든 길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학교,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생각이 커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학교. 그것이 혁신학교 제일의 목표이다.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것, 스스로 탐구하며 깨우치는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혁신학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기존의 좋은 학교의 개념이다.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배움이 일어나면 혁신학교에서 추구하는 가치로 오해하기 쉽지만, 혁신학교에는 치열한 자기 고민과 내적 갈등을 통해 깊은 탐구와 통찰이 핵심이 되는 배움의 과정이 있다. 그래서 학력이 혁신학교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혁신학교라 학력이 좀 낮아도 된다는 생각은 혁신학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혁신학교라 아이들이 좋아하기는 하는데 학력이 걱정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아이들 가운데 생겨나고 있는 생각의 크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이다. 제대로 된 혁신학교라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혁신학교가 아이들을 공부로만 내몰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들의 성장과 제대로 된 학력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도 EBS 문제집만 죽어라고 푸는 것으로도 얻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으로 깊이 있는 탐구와 통찰이 가능할 때 어떤 상황, 문제에도 먹히는 실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런 교육이 쉬울까? 혁신학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육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저마다 막연히 이런 좋은 교육이 있었으면 하는 교육의 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편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전망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혁신학교는 우리가 희망했던 교육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학교의 문화가 문제이다. 그래서 혁신학교는 특별한 사업이 아니라 학교의 총체적인 구조를 바꾸고 그것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교사의 자발성과 헌신성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바꾸는 것은 교사와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순간 아이들의 몰입도 창의성도 금방 사그라진다. 교사들의 뜨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사실은 성공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필요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은 분명했다. 누군가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고, 그것이 우리의 교육을 제대로 세우는 길이라는 신념은 바위보다 굳고 강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제 그 혁신학교의 속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보통 대안이다 혁신이다 연구다 시험학교다 해서 보면 학교공부보다는 진로나 정서적인 면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다 보면 기존의 공부는 마치 대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부정적인 관점을 갖기가 쉽다. 그 결과 학력이 저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기존 학교의 폐해들을 고쳐야 되겠지만, 숙제도 내주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서 열심히 사고하고 공부해야 학력이 높아지는 것이지, 많이 놀게 하고 즐겁게 한다고 학력이 좋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이런 실험학교는 그래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 / 이성대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22. 20:27

 

1921년 미국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창의력의 아이콘으로 잘 알려진 토마스 에디슨이 자신의 회사 - 이 회사가 나중에 미국에 거대기업인 GE가 된다. - 입사 지망생들을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입사 시험을 도입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한동안 전범처럼 활용했던 150가지 상식문제가 수록된 시험으로, 나중에 '에디슨 질문서'라 불리게 되었고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엉클 샘이 에바를 위해선 한 일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어떤 금속으로 만들어졌는가? 등 암기형 지식을 묻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마침 이 시기에 아인슈타인이 미국을 방문했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돌발질문을 던졌다. "음속의 값은 얼마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기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이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도 단순히 음속의 값뿐 아니라 파동의 특성과 양자역학적 특성까지 설명하는 해박한 물리학 강의가 뒤따라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두지는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기자는 에디슨의 입사시험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의견을 재차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정보의 습득은 교육의 본질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것, 교육의 본질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고하는 능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덧붙여 아인슈타인은 지능의 진정한 지표는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은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교육의 본질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진정한 교육의 목표는 사고하는 능력이지,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필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사고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개인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능력이 된 것이다.

 

혁신학교, 행복한 배움을 꿈꾸다_ 이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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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7. 22. 19:49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대학_ 예시바

 

아인슈타인, 에디슨, 프로이트,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등 세계적인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2013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12명 중 절반인 6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인구는 세계 인구의 0.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22퍼센트가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금융, 경제,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며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대인이 이처럼 세계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많은 분석을 내놓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뿌리다. 즉 수천 년 전부터 숱한 전쟁과 압제를 경험해 온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명석한 두뇌가 필수였을 것이란 설명이다. 다른 이유로는 어릴 적부터 받은 창의력 계발 교육이다.

 

노르웨이 출신으로 197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이바르 게이바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이유를 "항상 궁금증을 갖고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의 가정 교육이 유대인의 성공 비결이라는 것이다.

 

예시바 대학은 미국 뉴욕에 있는 유대인 명문 종합 대학이다. 각 언론사에서 매기는 대학 순위에서도 늘 상위를 차지한다. 2009년<US뉴스>가 발표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866년 초등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예시바 대학은 미국에 있는 유대인 계열 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이다. 동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와 영어를 가르치다가 1945년 지금의 종합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유서 깊은 대학답게 [탈무드]와 유대인의 가치를 연구하고 배운다.

 

예시바 대학의 도서관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도서관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시끄러운 소음이다.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흰 셔츠 복장을 한 남학생들이 책을 펴놓고 큰 소리로 떠든다. 책상위에는 참고 서적 몇 권과 음료수뿐이다. 서로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언뜻 보면 상대에게 화가 나서 따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시바 대학의 수업은 5명의 소수 정예 수업부터 70명의 대규모 수업까지 다양하다. 규모와 상관없이 수업은 학생들의 참여로 이뤄진다. 수업에 참여한다는 건 단순히 참석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 수업에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때로는 논쟁도 불사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위함이다.

 

유대인의 질문 공부법 '하브루타'

 

세계에 유례 없는 이 시끄러운 학습법을 '하브루타'라고 부른다. 하브루타는 '말하는 공부법'이다. 원래 '친구'라는 뜻으로, 친구(파트너)와 함께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는 교육 방식을 뜻한다. 하브루타는 2000년 전부터 유대인 전통으로 내려오는 오래된 교육 방식이다. '얌전한 사람은 배우지 못한다'라는 [탈무드]의 글이 말해 주듯이 공부는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래된 공부법이다.

 

유대인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이 하브루타이다. 예시바 대학 심리학 부교수로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는 하브루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전통적으로 볼 때 하브루타는 [탈무드]에서 '공부하는 파트너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면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교육도 그랬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는 자신의 어릴 적 가정환경을 이야기하면서 하브루타 교육을 설명했다. 그 성장 과정을 따라가보면 하브루타가 어떻게 인재를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교사였던 에드워드 호프만 교수의 부모님은 뉴욕에서 자란 유대인이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캔터이자, 미국에서 캔터들을 가르치는 유명한 교사이기도 했다.

 

호프만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온 지는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동유럽, 특히 폴란드와 러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떠났다. 호프만 교수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 수는 3백만 명이었다. 이후 1세대가 정착해 유대인 전통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며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민족으로 부상했다.

 

미국에 정착했다고 해도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을 따른다.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다. 하루 3번 기도를 하고, 음식은 코셔만 먹는다. 코셔는 히브리어로 '적절한'이라는 뜻으로, 육류와 유제품을 섞어 사용하지 않는 등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조리한 정결한 음식이다. 또한 전통 유대교의 의식 절차를 지켜 토요일에는 일하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하브루타 교육을 배운다. 아이가 글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면 가정에서는 [탈무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평균 열 살이 되면 일주일에 두세 번 부모와 함께 [탈무드]를 공부한다. 본격적인 토론은 열다섯 살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탈무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공부한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떠들썩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현재의 이슈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 대해 의견을 묻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아시아권에서는 식사를 할 때 얌전히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고 부모의 말씀에 아이가 질문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유대인 가족은 각자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가정에서부터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괜찮다'는 지지감을 심어주고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영어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호프만 교수에게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것을 절대로 창피해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학생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부터 "떠들지 말고 공부해" "조용히 해"라는 말을 듣는 한국의 가정과는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제작진이 찾아간 예배당과 유치원은 호프만 교수가 말한 분위기와 비슷했다. 토요일 저녁이면 아이들이 있는 곳은 아이들 말소리로 혼이 나갈 만큼 소란스럽다. 아버지와 아들이 짝을 지어 [탈무드]를 읽고 친구들끼리 마주보면서 큰소리로 열심히 외친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학교인 프로키오 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까지 마치는데, 유치원에서의 수업도 학교와 다를 바 없다. 수업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짝을 지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어릴 적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하브루타 교육을 자연스레 몸에 익힌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하브루타를 몸에 익히는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진짜다

 

왜 하브루타 교육일까?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을 예시바 대학생 케빈 포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다 보면 사고가 명확해지고 자신이 배우는 걸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혼자 생각할 때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막상 말로 표현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때가 많다는 뜻이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 논리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실제로 내가 아는 지식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경우 막상 남에게는 설명하지 못하기 쉬운데 사실상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브루타 방식은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좀더 명확히 생각하고 지식을 체계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다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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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7. 11. 08:2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헝가리 부대가 알프스 산맥에서 길을 잃었다. 모두가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절망에 빠졌으나 다행히 한 병사가 배낭에서 구겨진 지도를 발견해 알프스 산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지도는 알프스 산맥이 아닌 피레네 산맥 지도였다.

 

도대체 잘못된 지도가 무슨 역할을 했던 것일까? 바로 플라시보 효과처럼 지친 병사들에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이런 기대로 뇌가 자극을 받자 비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고, 훨씬 더 똑똑해진 병사들은 알프스 산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병사들은 모두 좌절과 절망으로 알프스 산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뇌의 무한 능력을 깨워라

 

무엇인가에 대해 기대한다는 것은 뇌에서 잠자고 있는 무한 능력을 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대의 위력을 가장 설득력 있게 실험한 사람은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이다.

 

그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한 후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한 반에서 20퍼센트 정도의 학생을 뽑았다. 그리고 그 학생들의 명단을 교사에게 주면서 '지적 능력이나 학업 성취의 향상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라고 믿게 했다. 교사들로 하여금 그 학생들에게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했던 것이다. 8개월 후 이전과 같은 지능검사를 다시 실시했는데, 그 결과 명단에 속한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 점수가 높게 나왔다. 뿐만 아니라 성적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명단에 오른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기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교사들은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격려하고 칭찬했으며, 그 행동은 학생들을 자극해 좋은 결과를 얻게 했다. 이후 이 실험은 군인, 사관생도, 기술자 등을 대상으로도 실시되었는데 모두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교사가 학생에게 거는 기대가 실제로 학생의 성적 향상에 효과를 미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런 효과를 로버트 로젠탈의 이름을 따 '로젠탈 효과'라고 부른다. 로젠탈 효과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교육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것으로, 타인의 기대와 관심으로 인해 높은 성과를 내는 현상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기대에 따른 효과는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했을 때도 똑같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암시 효과이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명명한 '자성예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성예언은 기대한 만큼 결과를 얻는다. 즉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하고 어떤 암시를 하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암시로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 박지성 선수를 꼽을 수 있다. "나는 최고의 선수다"라고 스스로 암시하고, 최고의 선수처럼 활약할 것을 기대하자 실제로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평범한 축구선수였다. 아무도 그를 비범한 선수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항상 축구 시합을 할 때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기대를 걸었다. "내가 이 운동장에서 최고의 선수다" 라는 기대는 뇌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실제로 비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뇌로 변신했던 것이다.

 

당신의 뇌를 경영하라, 김병완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7. 5. 13:30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종이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종이는 여전히 많이 쓰이고,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이 우세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모니터가 종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현재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성공 비결 중 하나가 노트에 메모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아날로그 방식이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일정 관리나 노트 기능을 갖춘 유용한 앱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온다. 언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를 한곳으로 모아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앱은 깜빡 잊고 놓치기 쉬운 일정도 챙겨주고, 복잡한 삶을 정리하기에도 좋다.

 

그러나 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손을 많이 쓸수록 두뇌 발달에 좋다고 말한다. 특히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필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필기는 컴퓨터 자판이나 스마트폰 패드를 두드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독서 고수들도 독서 노트를 작성하라고 충고한다. 책의 핵심 내용이나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문장을 손으로 직접 쓰면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실제로 행동에 옮길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뇌는 게으르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들이 편리함을 빌미로 뇌를 더욱 게으르고 단순하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지털 기기는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 하나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드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여전히 많은 CEO들이 수첩을 애용하고, 자녀들에게 연필과 공책을 사주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아날로그다. 손으로 쓰고, 선을 긋고, 그림도 그리고, 도표를 만들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진짜 내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질문을 할 때에도 펜과 노트를 준비해야 한다. 펜과 노트는 생각을 정리하는 최고의 도구다. 질문하고 답변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꾹꾹 눌러써보자.

 

질문하는 힘, 권귀헌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6. 29. 12:25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아직도 권장도서 목록에서 그의 책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플라톤이라는 후학의 덕이 크지만, 그의 독특한 교수법 때문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산파가 아이를 낳을 때 산모를 돕듯, 스승은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게끔 산파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은 산모이고 산파는 보조할 뿐이듯, 스승은 제자에게 정해진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산파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이던 소피스트들은 모호한 추측을 진리인 양 떠들고 다녔고 궤변으로 대중을 혼란시켰다. 그렇다면 소피스트의 궤변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소피스트 당신은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제자

소피스트 왜 노을이 아름답지요?

제자 정열적인 붉은색과 변화무쌍함 때문이지요.

소피스트 정열적인 붉은색과 변화무쌍함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친 사람이 흘리는 피는 붉지만 끔찍하잖아요. 게다가 노을이 지는 강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더 이상 노을이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 텐데요. 그런데도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제자 아니오.

 

이렇듯 소피스트는 대화를 전적으로 주도하며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에 수긍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 당신은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제자 네.

소크라테스 왜 노을이 아름답지요?

제자 정열적인 붉은색과 변화무쌍함 때문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정열적인 붉은색과 변화무쌍함이 왜 아름다울까요?

제자 붉은색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소크라테스 하지만 피의 붉은색은 기분 나쁘잖아요. 게다가 다친 사람이 흘리는 피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데요. 모순이지 않은가요?

제자 그렇다면 매번 볼 때마다 변화무쌍함이 지루하지 않아서요.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아름다운 명화는 볼 때마다 바뀌지 않지만 지루하지 않잖아요. 모순이지 않은가요?

제자 ......

소크라테스 정리해보면, 노을의 아름다움 자체는 분명히 느끼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한 거네요. 왜 노을의 정열적인 붉은색과 변화무쌍함이 아름다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어요?

 

이렇듯, 산파술은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말싸움에서 이기고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다만 상대방이 진리를 좀 더 명확히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산파술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답변을 끌어내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고 질문을 통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착각한 채, 그릇된 확신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하는 힘, 권귀헌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6. 28. 21:30

 

포가티의 교과 간 통합 유형을 살펴보면 거미줄 모형에서 사고력 계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거미줄 모형의 내용 중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학습 내용이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됨으로써,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광범위한 시야를 제공하며 풍부한 주제가 교육 과정 내용으로 조직된다.'

 

사고력 계발은 거미줄 모형처럼 지식과 지식을 서로 연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미줄에 맺혀 있는 물방울은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며 거미줄은 그 개념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거미줄 모형은 누가 보더라도 안정적이고 조직적으로 엮여 있다. 만약 새로운 문제가 발생되더라도 여러 개념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조직화하여 새로운 답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이렇게 개념을 중심으로 지식을 서로 연결하여 그 역량이 최상위가 된다면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된다. 개념을 이어 나가는 거미줄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연결된다.

 

수학은 본질적으로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취도를 이루기 어려운 학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으며 개념과 개념을 서로 연결하는 사이에 문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 교과형 수학 문제는 단순한 연계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래 그림처럼 교과형은 지식의 구성이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어 같은 개념, 유사한 개념이 아니면 서로 다른 지식을 구성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런 모형의 수학 학습은 KMO나 경시대회처럼 어떤 목적성을 갖고 매진하는 학습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다양한 개념들을 탐구하기보다는 시험에 최적화된 학습 유형이다. 이런 이유로 저학년 때 이런 학습을 한다는 것은 큰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정한 사고력 수학의 능력자는 서로 다른 개념의 문제가 있더라도 스스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해결 방법을 한 가지 이상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고력 수학의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영재 사고력 수학, 박종훈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6. 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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