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1년에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그후 2년간 연수생활을 거쳤다. 1992년에는 사법연수원 내에서 다양한 실무교육을 받았고 1993년에는 법원, 검찰청,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정 기간 수습 과정을 거쳤다.

당시 나는 연수과정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모두 공무원 출신이었기에 공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두 분이 항상 입버릇처럼 "우성이는 반드시 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사회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는 검사의 모습을 동경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1993년 1월부터 4월 말까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판사시보 생활을 마친 나는 1993년 5월부터 8월까지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시보 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지방검찰청에 출근하는 첫날 나는 앞으로 내가 몸담을 검찰에서의 생활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다는 설렘에 무척이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검사실에서 내가 할 일은 피의자들을 앞에 두고 경찰에서의 진술과정을 재확인한 다음 빠진 부분을 보완하여 수사기록을 완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사람은 이런 죄를 지은 것이 확실하니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검사시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므로 복잡한 사건보다 피의자가 이미 경찰에서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한 사건이나 피해가 크지 않은 사건들을 주로 배당받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사하는 과정에 큰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내가 검찰청에서 처음으로 배당받은 사건은 속히 '아리랑치기(절도죄)' 사건이었다.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아리랑치기라고 한다. 참고로 술에 취한 사람이 정신이 차리는 것을 보고 폭력을 행사하면 그때부터는 속칭 '퍽치기(강도죄)'가 성립된다.

 

'대학생인 김00은 1993년 4월 00일 23시 30분경 부산 북구 만덕동 000 주변에서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피해자 최00 의 양복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 5만 원을 절취했다'는 것이 범죄사실의 요지였다.

김 군은 범행 직후 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방범대원에게 적발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미 경찰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김 군에게서 범죄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들은 뒤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김 군의 사정이 참으로 딱했다.

 

김 군의 어머니는 신장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꽤 많은 수술비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밖에 없어서 현재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기에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날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발견하고 됐고 그 피해자가 몸을 뒤척일 때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한 것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일단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을 정리한 뒤 김 군의 딱한 사정을 상세하게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했다. 그리고 김 군이 현재 대학교에서 장학생이며 학교에서 봉사상을 받은 내역도 알아내어 피의자신문조서 내용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작성한 조서를 검사님께 보여드렸더니 검사님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 시보님, 이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 아랫부분은 전혀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모두 지우세요." 라고 말했다.

 

사실 검사님의 말이 옳았다. 형사 사법 시스템의 구성요소인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검사는 범죄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입증을 해야 하고 변호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정상참작 사유를 최대한 주장해야 하며,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검사의 입장에 있으면서 변호사로서의 주장을 한 셈이었다. 겸연쩍은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멀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사건을 맡았다. '직장인 박00는 1993년 4월 00일 21시 45분경 부산 중구 남포동 000번지 소재 포장마차에서 옆자리에 있던 피해자 길00(17세, 고등학생)와 시비를 가리던 중 격분하여 피해자를 주먹으로 가격하여 안면부 타박상 등 전치 3주에 이르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이 범죄 사실의 요지였다.

멀쩡한 직장인이 무슨 이유로 고등학생을 때렸을까. 솔직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박 씨에게 피의자를 폭행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물었다.

 

그날 박 씨는 친구와 같이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옆자리에서 아주 시끄럽게 떠들며 담배를 피고 있던 길 군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장교 출신인 박 씨는 고등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모습이 심히 거슬렸다.

그는 점잖게 "어이, 학생들. 좀 조용히 하지?"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길 군이 "거참, 제기랄. 아저씨는 아저씨 일에나 신경 쓰쇼!" 라면서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반응에 화가 난 박 씨는 벌떡 일어서며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학생 아냐?" 라고 소리쳤고, 길 군은 "학생이든 뭐든, 당신이 연필 한 자루라도 사줘봤어?" 라면서 대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밀치며 몸싸움을 하다 박 씨가 날린 주먹이 길 군의 뺨을 강타하고 말았다.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마 그 상황에 처했다면 나도 박 씨와 비슷하게 행동했으리라. 나는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범죄사실을 간단히 서술한 다음 당시 왜 박 씨가 길 군을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써내려갔다. 울분에 찬 눈빛으로 피의자신문조서의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나에게 검사님은 다시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허허, 조 시보님. 그럼 조 시보님 의견은 피의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겁니까? 검사가 그런 온정적인 입장을 취하면 도대체 법질서는 누가 지킵니까? 이 아랫부분은 피의자신문조서에서는 전혀 필요없는 부분이니 싹 지우십시오."

 

그렇게 나의 검사시보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나는 검사란 직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동기들 중에는 피의자가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그건 당신 사정이고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그 사정은 변호인에게 이야기하세요." 라면서 어렵지 않게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피의자의 범죄행위와 그 사람이 처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결국 4개월간의 검사시보 생활을 마치면서 내린 결론은 나의 진로가 검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성격을 갖고 검사로서 일을 한다면 나도 힘들 것이고, 조직에도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변호사의 길을 택했고 수습생활을 했던 법무법인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도울 우 祐' , '정성 성 誠' 으로 지어주시면서 당신 손주가 평생 남들을 돕는 마음으로 살 것을 바라셨다고 한다. 결국 이름을 따라가게 된 건지 변호사로서 보낸 지난 17년을 돌아봤을 때 내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점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을 고를 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게 되지만 부모님의 기대나 주위의 고려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검사가 아닌 변호사로 진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만약 내가 검사시보로서 수습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별다른 고민없이 부모님의 기대를 좇아 검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상당한 심적 고통이 따랐으리라. 직업을 선택할 때 적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이젠 너무 흔한 충고가 되어버렸지만 나로서는 수습 경험을 통한 적성의 발견이 인생의 큰 줄기를 바꿔놓았기에 이 말에 뼈저리게 공감한다.

 

모든 이에겐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으며 이를 거스르며 살다보면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는 법이다. 내게 맞는 운명의 옷을 입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이치가 아닐까.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_ 조우성 변호사

by 미스터신 2023. 9. 24.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