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시간이요."

"네?"

"강수진 씨가 발레 연습한 시간이요. 대충 헤아려도 20만 시간이 훌쩍 넘어갑니다."

 

가까이 지내는 지인이 내게 해준 말이다. 30여 년 동안 발레 연습한 시간을 계산해보니 20만 시간이 넘는다는 것이다. "그런 걸 뭐하러 계산하셨어요" 라며 웃어넘겼지만, 내가 그렇게 발레를 오래 했나 하고 내심 놀랐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20만 시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발레에 매료된 이래 밤새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했던 모나코 유학 시절을 거쳐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입단해서도, 그 안에서 한 단계씩 올라서서도,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이후에도 나는 연습벌레였다.

 

이제는 은퇴를 했지만, 현역 시절엔 "이제 그렇게까지 연습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발레리나는 다른 예술가들보다 생명이 짧다. 몸을 극한으로 사용하는 예술이라, 몸이 조금이라도 노화되면 무대에 설 수 없다. 나이 들수록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몸은 반대로 굳어간다.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발레를 그만두며 아쉬워하는 무용수들도 많다. 마침내 내게 공이 와서 그 공을 딱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옆으로 스쳐 가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나 역시 발레가 매일매일 더 좋은데, 발레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는데, 관객과 더 많이 만나고 싶은데, 서른 초중반에 발레를 그만 두기에는 너무 아쉬었다. 발레를 오래오래 하려면 녹슬어가는 신체에 연습이라는 기름을 발라 젊음을 유지해야 했다. 나이로 인한 주름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크림을 바르듯, 나는 연습이라는 기름으로 신체 노화를 역행하려 했다.

 

그렇게 20만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연습에 매진한 것은 내가 발레를 찬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발레를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발레리나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장이 주는 그 중독적인 맛을 한번 보고 나면, 연습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어제 할 수 없었던 동작이 오늘 더 잘 되고, 어제 이해할 수 없었던 연기의 한 부분이 오늘 물이 오르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루하루 더 발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처럼 몸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연습을 하게 만든 것은 발레를 향한 사랑과 성장의 즐거움이었다. 내게 발레는 끝없는 인생공부이며, 발레 공연에는 내 인생이 담겨 있다. 점프를 한 번 더 해낸 기쁨, 파트너와 한 동작 한 동작 맞춰나간 시간, 낯선 나라에서 현지인 파트너들과 무대에 올라 이루어낸 하모니, 부상으로 인한 뼈가 깎이는 고통, 남편을 향한 사랑이 발레에 녹아 꽃으로 피어올랐다.

 

나에게 발레는 거대한 세상이고 사랑이다. 누구든 사랑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 같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_ 강수진

by 미스터신 2017. 12. 30.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