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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7 비타민 편지 | 김아영
- 2015.03.17 괜찮아 by 장영희
비타민 편지 | 김아영
지난 5월, 어김없이 오빠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동안 오빠 생일에 축하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오빠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용돈을 받으면 바로 다 써 버리는 나쁜 습관 때문에 돈이 만 원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생일 선물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뭘 살까 고민하며 나가봤지만 역시 그 돈으로 큰 선물을 사는 건 무리였다. 평소에 돈을 잘 모아 둘걸, 하는 생각만이 계속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오빠의 생일 선물로 고른 것은 비타민 편지와 볼 펜 두 자루였다. 비타민 편지는 알약처럼 생긴 캡슐을 열면 작은 쪽지가 있는데 거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빠도 즐거워하며 볼 거라 생각하고 그것을 샀다. 집에 돌아와 비타민 편지통에 담긴 20개쯤 되는 캡슐을 열고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간지러운 응원의 말들을 적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ㅠㅠ 힘내! ^^" 라든가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되니까! 그때까지 파이팅!" 같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로 알약 20여 개를 다 채웠다. 약통에 "힘들 때마다 한 알씩" 이라는 말을 적어 펜과 함께 오빠한테 줬더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오빠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맙다고 했다.
얼마 지난 뒤 오빠 방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꽉 차 있는 비타민 편지통이었다. 하나도 안 봤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펼쳐 보고 다시 넣어 두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금방 잊어버렸다. 시험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며칠 전, 오랜만에 오빠의 방에 들어가 보니 비타민 편지통이 반쯤 비어 있었다. 시험이 점점 다가오자 힘이 든 오빠가 편지를 한 알씩 꺼내 읽으며 힘을 냈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오빠의 행동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타민 편지를 입안으로 털어 놓고 물과 함께 넘기는 모습을........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까 오빠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갑자기 그런 오빠가 무척 귀여워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당황한 오빠가 자꾸 왜냐고 물어봤지만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오빠에게 사실을 말해 주자 오빠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그냥 오랫동안 웃었다.
이제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빠는 부쩍 긴장하는 것 같다. 가끔은 저녁에 내 방으로 와서 내가 적은 쪽지를 보이며 비웃고 장난도 치지만 시험에 대한 압박감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은 비타민은 몇 개 안 되지만 오빠가 그거라도 보고 힘을 내서 시험을 잘 치르면 좋겠다.
비타민 캡슐 편지로 생긴 재미난 오해와 수험생 오빠에 대한 응원을 담은 학생 수필로, "청소년 문학" 2010년 겨울 호(나라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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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여섯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 집에 아이가 네댓은 되었으므로 골목길 안에만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줄잡아 열 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은 시끌벅적,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방과 후 골목길에 아이들이 모일 때쯤이면 대문 앞 계단에 작은 방석을 깔고 나를 거기에 앉히셨다.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딱히 놀이 기구가 없던 그때,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하고 놀았지만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그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골목 안 친구들은 나를 위해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내게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겼다. 그뿐인가. 술래잡기를 할 때는 한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답답해할까 봐 어디에 숨을지 미리 말해 주고 숨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은 골목에서 중앙이 아니라 모퉁이 쪽에 있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이 늘 친구들의 놀이 무대였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난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친구들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 골목길에서의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반이 좀 일찍 끝나서 나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던 깨엿 장수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가위를 쩔렁이며, 목발을 옆에 두고 대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흘낏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더니 리어카를 두고 다시 돌아와 내게 깨엿 두 개를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 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전의 학교 친구를 찾아 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한번은 어떤 가수가 나와서 초등학교 때 친구를 찾았는데,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허리가 36인치일 정도로 뚱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뚱뚱해서 잘 뛰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끼워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나서서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 얜 골키퍼를 시키면 우리 함께 놀 수 있잖아!"
그래서 그 친구는 골키퍼를 맡아 함께 축구를 했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가수의 따뜻한 말과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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