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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바둑 대국은 참으로 길었다. 지금은 2~3시간 안에 끝나는 바둑이 대부분이라 아무리 길어도 4~7시간이면 끝나지만 20년 전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5시간이라서 초읽기까지 합하면 총 대국 소요시간이 11시간이 넘기 일쑤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1993년 이창호와 두었던 기성전 결승대국. 보통 밤 9시~10시면 대국이 끝나는데 그때의 대국은 7판이 전부 밤 11시를 넘겼다. 아마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늦게 끝난 대국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다. 일본은 지금도 오래 두는 바둑으로 유명하다. 기성, 명인, 본인방전의 '빅3'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8시간이다. 둘이 합하면 16시간에 이르니 하루에는 다 소화할 수 없어서 이틀을 잡고 진행한다. 너무 길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굉장히 짧아진 것이다. 1930년대에는 제한시간이 각 40시간에 이르는 바둑도 있었고, 1940년대까지만 해도 제한시간이 각자 13시간이어서 3일에 걸쳐 대국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지금처럼 이틀로 줄인 것도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노력한 결과다.
바둑에서 제한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제한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수읽기가 깊어진다. 내가 어떤 수를 두면 그로 인해 전개될 앞으로의 판세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따라서 제한시간이 넉넉하면 더욱 효율적이고 함축적인 수가 나오게 된다. 바둑을 예술로 생각하는 일본은 긴 수읽기를 통해 보다 완벽하고 능률적인 수를 생각해내는 걸 바둑의 '도'이자 '미'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 바둑은 지금 같은 광속의 시대에도 8시간의 장고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로 제한시간이 짧아지는 속기바둑은 깊은 수읽기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여 둘 수밖에 없다. 바둑 기사에게는 이 역시 중요한 훈련이지만 아무래도 실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만큼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
속기 바둑과 장고 바둑 중에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을 수 밖에.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형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 장고를 하여 최고의 실력을 겨루는 것도 의미가 있고, 빠르게 감각을 대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프로 기사라면 두 가지 다 훈련이 되어야 한다.
바둑은 감각만으로 둘 수도 없고 실력만으로 둘 수도 없다. 나는 초중급자들에겐 오히려 빨리 두라고 말한다. 그 시절에는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꼭 좋은 수가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때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수를 놓아서 만족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자신만의 바둑 감각을 쌓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서서히 수읽기가 되기 시작한다. 또 수읽기를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덩달아 감각도 좋아진다.
이처럼 속기와 장고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의 경향은 빠른 쪽으로만 흘러간다. 요즘 국내 대회는 제한시간이 각자 1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5분, 10분, 20분짜리 초속기 대회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2시간, 3시간의 장고 바둑은 두세 대회 정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장고 바둑이 80퍼센트의 점유율을 이루고 속기 바둑이 20퍼센트 정도 비율이었다면 지금은 역전되어 속기 바둑이 80퍼센트, 장고 바둑이 20퍼센트가 됐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건 인정한다.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의 아찔한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대여섯 시간이 넘는 긴 바둑을 지켜보는 건 고역일 터다. 그렇지 않아도 바둑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긴 호흡의 바둑만 고수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속기 바둑은 일단 빠지면 컴퓨터 게임을 능가하는 박진감과 스릴이 있기 때문에 젊은 팬을 끌어들이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바둑의 질적 측면을 본다면 지나치게 속기전으로 흐르는 건 위험하다. 이건 그만큼 프로기사들이 한 수 한 수 깊게 생각해볼 기회가 줄어드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얕고 빠른 잔머리 회전만 발달시키고 깊은 사유의 능력은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쓰지 않는 능력은 퇴화하게 마련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둑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깊은 사유를 통해 발달해왔다. 현대 바둑의 틀과 수준을 진일보시킨 우칭위안의 바둑이나 신포석을 창안한 기타니 미노루의 바둑, 처절하고 지독한 수로 점철되는 조치훈의 바둑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이창호의 견고한 바둑 등 모든 위대한 기풍은 오랜 사유를 통해 탄생했다. 그런 사유가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기에 최고의 기사들은 제한시간을 막론하고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속기 바둑에만 길들여진 젊은 프로들은 장고 바둑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길게 오랫동안 고민해본 적이 없기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기원 소속의 배태일 박사가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발표한 자료가 있다. 물리학자인 그는 속기와 장고 바둑 사이에 진짜 바둑 실력의 함수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조사를 통해 그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는 젊은 프로 기사들을 '속기에 강한 그룹'과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으로 나누어 랭킹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속기에 강한 기사들은 20~22세 때 실력이 최고조에 이른 이후로는 별로 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장고 바둑에 강한 그룹은 20대 초반에는 부진하지만 오히려 25세 이후로 실력이 늘어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태일 박사는 한국 바둑이 최근 들어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국제대회도 시대에 맞춰 1시간짜리 속기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잉창지배나 춘란배, 삼성화재배 같은 권위있는 대회는 2~3시간 장고 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활약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대회는 한국 기사들이 우승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중국 기사들이 우승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 기사들도 대단한 활약을 한다. 바둑의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것이 너무 빠른 것만 추구하다가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라고 생각한다. 빠른 것은 쾌감을 준다. 재미있고 짜릿하다. 하지만 그것만 쫓다 보면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하여 결정해야 하는 때에 경솔한 판단을 하게 된다.
바둑 밖에서도 똑같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매사에 너무 즉흥적이다. 이들은 이성보다도 감정을 앞세우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좋은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솔한 행동, 후회할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른다. 바둑으로 표현하자면 눈앞의 몇 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잘못된 수를 놓는 것이다. 상사의 꾸지람에 즉흥적으로 사표를 냈다가 후회한다거나, 친구나 가족에게 모진 말을 퍼부어 상처를 준다거나, 실수나 잘못을 거짓말로 둘러댔다가 들통이 나는 일이 반복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우리는 그럴수록 진지하고 신중한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다. 논문 표절로 고위 공직자 후보에서 낙마하는 사람이나 한마디 실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유명인 등 장기적인 면에서 깊게 생각하지 않은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은 단 하나의 수를 결정하기 위해 제한시간 8시간 중 무려 5시간 7분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5시간 7분 동안 그는 정말 진지한 얼굴로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장면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둑알 하나 놓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5시간이 넘게 고민을 한 것일까?
하지만 그 한 수의 차이는 실로 지대한다. 당장은 그저 돌 하나의 위치일 뿐이지만 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승부에 결정적 차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잘못 놓은 돌 하나가 훗날 내 목을 조이거나 내 등을 치는 약점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어떤 바둑을 하겠다는 다케미야 9단의 선택이기도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그날 치를 대국이 영토 분쟁이 될 수도 있고 대마싸움이 될 수도 있다. 바둑의 미학을 중시했던 다케미야 9단은 그 5시간 7분 동안에 머릿속에서 수백 판의 바둑을 두고 허물고 두고 허물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놓은 결정의 한 수,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바둑을 펼쳐보겠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선언이었다. 결국 이 바둑에서 다케미야 9단은 승리했다. 나는 이것이 생각의 승리이자 실력의 승리라고 믿는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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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른 창의적인 수는 어떻게 생각해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프로 바둑 기사들은 아마도 다들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수가 떠오른다고. 즉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고서 창의적인 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번쩍 새로운 수가 떠오르는 것이다. 프로 기사들이 초읽기에 몰린 순간에도 기발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평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창의성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끈질긴 탐구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적인 두뇌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호기심과 탐구심이 없다면 창의성은 발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창의적인 생각을 창의성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 유명 미술가나 음악가 같은 사람만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은 꼭 뭔가를 발명한다거나 새로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창의성은 도처에 있다. 나는 우리 아내가 나를 위해 해주는 요리에서도 창의성을 느낀다. 똑같은 음식을 해도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든 식혜는 맛도 좋지만 마신 후 속이 편하다. 강정이나 엿 속에서는 다른 데서 느낄 수 없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뭘 넣었냐고 물어보니 식혜에는 생강을 살짝 넣었고 강정에는 귤껍질을 채로 썰어서 넣었다고 한다.
나는 창의성은 넓은 의미가 '남과 다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생각'은 그냥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아내가 똑같은 음식을 남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더 맛있게, 더 건강하게 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즉 가족들에게 식혜를 먹이고 싶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식혜의 찬 성질 때문에 배가 아플 테니까 이걸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따뜻한 성질의 생강을 넣는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강정이나 엿은 텁텁해서 금방 물리기에 개운함을 주는 귤껍질을 넣는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창의적인 생각의 과정은 어느 분야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바로 문제의식과 질문이다. 이 문제를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상식과 지식을 동원하여 추측을 한 후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창의성의 과정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끊임없이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질문해야 한다.
창의성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문제나 결핍 등에 예민한 사람이 한다. 즉 문제가 눈에 보이면 해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의 실체는 창의적인 능력이 아니라 뭐든 의문이 생기면 '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에 있는지도 모른다.
바둑 고수들을 보아도 그렇다. 바둑에 관한 한 우리는 절대로 궁금한 것을 못 참는다. 풀지 못하는 수를 만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길을 걸으면서도 볼일을 보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그 생각뿐이다. 과감하게 동료 기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는 경우도 많다. 머리를 맞대면 훨씬 빠르게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국기원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루이나이웨이 9단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다가와 그림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이 정석에서 돌의 수순을 이렇게 바꿀 경우 다음 전개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바둑 기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고바야시 정석'이었다. 정석은 오랜 시간 검증을 거쳐 가장 모범적이라고 인정된 것이기에 좀처럼 의심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루이9단은 뭔가 석연치 않은 모양이었다. 돌 하나를 바꿈으로써 우리가 믿어온 고바야시 정석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루이 9단은 중국의 여류 바둑 기사로 1988년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9단에 오른 인물이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녀의 바둑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중국기원과의 불화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조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을 떠돌며 무려 10년 동안 바둑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국기원과 이야기가 잘 되어 1999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여기서 13년을 살았는데, 그 사이에 놀라운 기록을 많이 세웠다. 여류기전 우승을 26번이나 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 최초로 물론 세계 최초로 남자를 꺾고 왕위에 올랐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수전이었고 아프게도 그때 꺾인 남자 상대가 바로 나였다. 루이나이웨이는 우리나라 바둑사에 최초의 여성국수이자 유일무이한 외국인 국수로 기록되어 있다.
루이 9단의 질문은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곧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후에 이창호를 비롯하여 여러 후배 기사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어서 그때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이건 루이 9단이 질문한 건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는 바둑판도 없고 그림도 없었지만 신나게 토론을 벌였다. 처음에는 정말 루이 9단의 의심처럼 정석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더 토론을 해보니 역시 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구나 그걸 증명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이창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를 발견해냈다.
만약 루이 9단이 고바야시 정식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것 때문에 골치 아플 일도 없었겠지만 새로운 발견을 해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의문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 함께 고민을 했다. 덕분에 창의적인 새로운 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발견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이런 거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시작되지 않는다.
바둑 기사들은 상대방의 한 수 한 수를 절대로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왜 거기에 두었을까?', '이 수에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비록 주어진 시간은 짧지만 우리는 무섭도록 집중하여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어 다음 수를 결정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도 바둑처럼 이렇게 한 수 한 수 깊게 생각하여 놓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막연한 느낌으로 결정하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압력이나 강요에 의해서, 혹은 시간에 쫓겨서 아무렇게나 결정한 일들은 반드시 후회를 낳는다.
따라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장 답을 찾기 힘들다고 회피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는 왜 이런 걸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까?', '무엇이 옳은가?', '어떤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답을 구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사유체계가 바둑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일, 인간관계, 자기관리 등에 두루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암기하는 지식은 오래가지 않지만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해한 지식은 내 것이 된다. 단지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만으로 실력과 능률이 향상되며 인격적으로 더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고민하여 얻은 답이 늘 최선의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후회도 적고 책임질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야말로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때다.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집중하여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며 반드시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게 재미없고 골치 아플 수도 있다. 당장 대답이 떠오르지도 않고 오히려 혼란만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 답을 찾아냈을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답을 찾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본인만의 체계가 완성되면 보다 빠르게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바둑 고수들이 가만히 앉아서 수십 수를 내다보는 것도 수많은 훈련을 한 덕분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성격에도 변화가 와서 훨씬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해결하는 사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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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는 '류'라는 것이 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나의 바둑은 제비처럼 빠르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모험을 무릅쓰는 격렬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창호는 무디고 평범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상대의 도발에도 무한정 인내하면 묵묵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봉수는 진흙탕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바둑으로 '잡초'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창혁은 두텁고 화려한 공격으로 '일지매'라 불린다. 이처럼 튼튼한 바둑 세계를 구축한 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류'가 있다. 이러한 '류'는 절대적으로 강한 것이 없다. 서로 맞서 싸웠을 때 어느 류에는 강하게 작용하고 어느 류에는 약하게 작용하는 면이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류가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보완하고 발전하면서 끝없이 진화한다.
바둑 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 바둑에서 새로운 류를 발견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신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보면, 참 잘 두긴 한다. 그런데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바둑이다. 누군가의 기보, 누군가가 창안한 정석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쯤 해서 창의적인 수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빤한 수만 나온다. 요즘 바둑이 왜 이렇게 재미없냐는 애호가들의 불평이 쏟아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바둑 교육은 학원식이다. 학원식은 선생이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빠른 결과를 내어 학생과 부모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상상의 자유를 주기보다는 공식을 외우게 한다. 생각하면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식대로 두도록 가르친다. 그 결과 아이들의 바둑 시합은 생각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정보를 넣어두었나를 겨루는 시험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식의 바둑 교육으로는 자기만의 '류'가 나올 수가 없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가 교과서 밖의 지식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틀에 박힌 교육은 틀에 박힌 사고, 그리고 틀에 박힌 자아를 만든다. 생각이 한정되면 자아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은 나의 자아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준 좋은 스승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는 우리나라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선생님은 평생 딱 세 명의 제자만 받으셨다. 세계 바둑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우칭위안과 관서기원의 창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다. 우칭위안은 1930~1950년대 일본 정상급 바둑 기사들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조리 상대의 치수를 고쳐 '기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고, 하시모토는 1940~1970년대에 걸쳐 본인방전, 왕좌전, 십단전, 기성전을 무려 아홉 번이나 우승한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세계 최초의 바둑 올림픽인 잉창지배에서 우승하여 챔피언이 되었으니 선생님은 제자 세 명을 모두 세계 1인자로 길러내신 셈이다.
나는 열한 살 때 선생님의 생애 마지막 내제자가 되어 9년을 함께 살았다. 아담한 크기의 일본식 목조주택에 여든이 넘은 선생님과 열살배기 나, 그리고 선생님의 며느님인 마마짱과 나중에 같이 살게 된 아키다 강아지 벵케이, 이렇게 넷이 살았다. 그런데 그 9년 동안 선생님에게 바둑을 배운 적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선생님은 지도 대국에 인색하셨다. 아주 가끔 복기를 해보라고 하는 것 외에는 거의 말씀도 잘 안 하셨다.
어린 마음에 서운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연세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어두워진 건 아닐까, 나를 왜 불러들였는지 잊으신 게 아닐까 걱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흐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 식사때 선생님이 내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보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답이 없는 게 바둑인데 어떻게 너에게 답을 주겠느냐. 그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
정말로 9년 동안 함께 살면서 세고에 선생님은 나에게 바둑을 어떻게 두라든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두라는 식의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내가 밖에 나가서 누구와 어떤 바둑을 두고 돌아다니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야말로 아무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바둑을 배웠다.
선생이 헤매는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건 아주 쉬운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학생은 그 답을 받아먹을 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고에 선생님은 바둑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스승은 그저 방향만 제시할 뿐, 혼자 공부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올바른 바둑 교육이었다. 선생님의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에 나는 단 하나의 묘수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끙끙거리며 황금 같은 10대를 보낼 수 있었다.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바둑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나는 언제나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바둑을 두었다. 그것이 나중에 나만의 공격형 바둑으로 자라서 '제비행마', '마술사', '화염방사기'라는 독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생각의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개성이 강해지고 자아가 단단해진다. 인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갈 자신감과 확실한 인성이 형성될 수 있다.
생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 답을 알려주는 도구다.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일상의 작은 선택마저도 남들의 생각을 물으며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래야 할 지, 저래야 할 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도움을 구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고민을 상담해주는 인생 멘토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혼자 힘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는 그만큼 불안한 자아를 가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사람들은 행복이 돈이나 명예, 성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진짜 행복은 단단한 자아에서 온다고 믿는다. 자아는 자존감이다. 자아가 단단하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한다.
물론 이러한 자아는 거저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과 자기 성찰,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디 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고 신념대로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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