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철수 의원이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중의 하나인 '학문의 즐거움'.
천재들과 공부하면서 보통의 머리를 가진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보다 두 세배 더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었고 결국 그렇게 끈기 있게 매달려 문제를 풀어내고,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드상까지 받게 된 점은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머니가 일깨워 준 생각하는 기쁨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렇지만 나도 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다섯 살 때라고 기억되는데 목욕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물 속에서는 왜 손이 가벼워지지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소위 말하는 인텔리와는 거리가 먼 분이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학문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로서는 나의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지식이 없었다.
"목소리는 어디서 어떻게 나오지요?"
"코로 어떻게 냄새를 맡지요?"
"작은 눈으로 어떻게큰 집이나 경치를 볼 수 있지요?"
나의 여러 가지 질문에 어머니는 명확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모르겠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 "그런 시시한 것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면서 화를 내는 일도 없으셨다.
"글쎄 왜 그럴까?"
어머니가 머리를 갸우뚱하시면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커서 공부하면 알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같이 생각해 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답이 안 나올 때는 어머니는 동네에 있는 신사의 관리인에게 데려가거나 친분이 있는 의사에게 찾아가기도 했다. 신주나 의사는 그 당시 시골 동네에서는 흔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어머니가 그들을 찾아가서 "이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하는데 좀 설명해 주세요." 하고 부탁하신 덕분에 나는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일단은 답을 얻곤 했다.
이러한 경험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생각하는 기쁨을 체험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것은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 되었다.
왜 배워야 하는가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얻은 지식을 대학에 들어가서 잊어버리거나, 대학에서 배운 것을 취직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경우 등일 것이다. 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힘들게 공부한 지식이 자격증을 따자마자 잊혀진다든가 하는 일도 망각의 단점으로 나타난 예이다. 여기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즉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많이 잊어버리고, 다시 많이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중략)
예를 들어 문과 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는 데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의 인수분해를 꼭 사용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그 동안 문과 공부만 해 왔기 때문에 인수분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든지 이과 친구에게 물어보든지 어떤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가 인수분해에 대해서 다시 공부하자마자 "아, 그렇군. 이런 거로군." 하면서 옛날에 배운 것이 생각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속에는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인수분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수분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그는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로 꺼내 쓸 수 없는 형태로 뇌에 축적된 지식은 영원히 끄집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수고와 기회를 제공하면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다. 인간의 두뇌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혜에는 이런 측면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지혜의 넓이'라고 부른다. 이 지혜의 넓이는 계속 공부하고 잊어버리는 사이에 두뇌 속에서 자연스레 키워진다.
(중략)
앞에서 나는 인생에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있고,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지혜의 깊이'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의 두뇌는 인간 특유의 폭넓은 사고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 즉 '지혜의 깊이'가 키워지지 않는다.
지혜에는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힘'이 있다. '지혜의 힘'이란 결단력을 말한다.
결단할 수 있는 힘, 어느 순간에 '얏!' 하고 비약할 수 있는 힘, 이러한 지혜의 힘은 인생과는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공부하는 가운데서 키워지는 것이다.
지혜에는 내가 말한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측면이 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끝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수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끈기'를 신조로 삼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까지에는 남보다 더 시간이 걸리지만 끝까지 관철하는 끈기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한 시간에 해치우는 것을 두 시간이 걸리거나, 또 다른 사람이 1년에 하는 일을 2년이 걸리더라도 결국 하고야 만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나의 신조이다.
이러한 신조가 몸에 베어서인지 나는 한 가지 문제를 택하면 처음부터 남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들일 각오로 시작한다.
인간은 1백40억 개나 되는 뇌세포 중에서 보통 10퍼센트, 많아야 20퍼센트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잠자고 있는 세포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두세 베의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이 보통 두뇌를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역경을 반가워하자
"사는 것은 배우는 것이며, 배움에는 기쁨이 있다. 사는 것은 또한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창조에는 배우는 단계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라고 나는 앞에서 말해 왔다. 이것은 누구의 인생에나 해당되는 것으로 학자의 입장에서는 특히 명심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표현해 보자.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배우고 창조하는 기쁨은 곧 생각하는 기쁨이다. 어떤 분야의 학문이든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여 창조하는 데 본래의 의의가 있다. '발견'과 '창조'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주고받음은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평가할 가치도 없다. 여러 가지 지식은 생각하기 위한 자료이며, 독서는 생각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식을 모으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 되고, 독서도 고생스럽지 않게 된다.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읽어서 생각한다. 생각한 후에는 들은 것이나 읽은 것은 잊어버려도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학문을 하기도 전에 지쳐 버리고 배우는 것 자체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학문이란 본래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가 있으며, 그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반세기에 걸친 내 인생에서 체험으로 얻은 결론은 이러한 것이다. 이제까지 이러한 나의 인생관과 학문에 대해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젊은 독자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창조를 만들어 내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창조의 배경에 있는 중요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이런 말이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 푸앵카레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란 머시룸(mushroom)과 같은 것이다." 머시룸이란 버섯의 일종이다. 버섯 하면 일본 사람인 나는 우선 송이버섯을 연상하게 되므로 푸앵카레의 말은 "송이 버섯과 같은 것이 창조다."라고도 할 수 있다.
송이버섯은 잘 알다시피 땅밑에 균근이라고 하는 뿌리를 갖고 있다. 이 뿌리는 조건이 좋아지면 점차 원형으로 퍼지면서 자란다. 그런데 이런 좋은 조건이 한없이 계속되면 뿌리만 발달하게 되어 버섯을 만들지 못하고 결국 노화해서 죽어 버린다. 놀랍게도 5백 년에 걸쳐서 뿌리만 발달하고 고사한 송이버섯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버섯은 어떻게 해야 생기는가? 어떤 시점에서 뿌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조건이 주어지면 된다. 예를 들면 계절 변화에 의한 온도의 상승 또는 하강과 같은 외부적 조건이나, 송진이나 산성물질등의 물리적 조건이다. 이런 방해에 부딪히면 뿌리는 포자라는 형태로 종자를 만들어 계속 발전해 나가려고 하며 그래서 송이버섯이 만들어지게 된다.
푸앵카레의 말을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창조에는 먼저 송이버섯처럼 땅밑에서 뿌리를 뻗어가는 축적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축적만 하고 있어서는 송이버섯이 버섯을 만들지 않고 고사해 버리는 것처럼 창조 없이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된다.
불교의 '인연'이라는 말을 창조성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인'이란 땅밑에서 발달해 온 송이버섯의 뿌리와 같이 사람이 부모에게서 이어받거나, 주변 사람으로부터 배웠거나, 혹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자기 속에 축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인'만 가지고 창조나 비약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시점에서 송이버섯의 뿌리가 주어지는 방해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 창조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축적을 표출시킬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연'이다.
불교에서는 '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순연'과 '역연'이다. 실생활에서는 가끔 역연이 표출 에너지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역연'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역경'이 될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벽촌 장사꾼의 열다섯 남매의 일곱 번째 아들. 유년학교 입시에서 보기좋게 물먹고, 한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던 곡절 많던 소년. 대학입시 일주일 전까지 밭에서 거름통을 들고, 대학 3학년이 돼서야 수학의 길을 택한 늦깎이 수학자.
끈기 하나를 유일한 밑천으로, 미국 하버드로 건너가 박사를 따내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까지 받은 사람. 골치 아픈 수학에서 깨달음을 얻은, 즐겁게 공부하다 인생에도 도통한 평범하고 희한한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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