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이 달리기 경기장 출발선 앞에 서있습니다. 신호탄이 울리자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트랙 위에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초등 1학년, 2학년, 3학년.... 초등 4학년 지점을 지나는 순간 남자아이 하나가 그만 넘어지고 맙니다. 그새 다른 아이들은 저만치 앞서 달려갑니다. 남자아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앞서가는 친구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런 문구가 떠오릅니다.

 

"초등 4학년, 기초가 중요한 때입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학습지 TV 광고의 한 장면입니다. 초등학생때부터 기초를 탄탄히 쌓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이 담긴 광고였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뒤처지게 된다. 저는 이것을 '공부기초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공부기초 이론은 저학년 기초가 약하면 고학년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더하기 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는 아이는 곱하기 나누기를 제대로 배울 수 없고, 곱하기 나누기가 서툰 학생은 인수분해를 손도 못 댄다는 논리입니다.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아래 벽돌을 튼튼하게 쌓지 않고 무슨 수로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 논리가 우리 사회의 무수한 교육 풍경을 만듭니다. 초등 저학년 자녀를 두신 부모님 중 올백 점에 연연하는 분이 많은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올백 점을 못 맞으면 고학년이 되었을 때 성적이 얼마나 많이 떨어질까?' 하고 불안해하시는 거죠. 완벽한 기초를 쌓아 고학년 때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초를 튼튼히 쌓았음에도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반대로 기초는 형편없는데 고학년이 되어 성적이 오르는 준우 같은 아이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초를 극복하는 것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어능력이 높고 의지만 굳건하다면 교과 공부에 필요한 기초 지식은 짧은 시간 안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초등 1학년은 1년 내내 더하기 빼기를 배웁니다. 더하기 빼기라는 연산 논리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1학년 아이의 평균 사고력, 그러니까 언어능력이 그 정도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수학에 관한 지식만 모두 잊어버려서 더하기 빼기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 학생이 더하기 빼기를 완벽하게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될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의 언어 수준에서 더하기 빼기는 쉬워도 너무 쉬운 연산이기 때문입니다. 초등 1학년에게는 1년간 갈고 닦아야 하는 교과 학습량이 고등 1학년에게는 10분이면 습득할 수 있는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모든 과목이 이런 식의 기초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등 6학년 과학 지식이 없다고 해서 중등 1학년 과학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수학 외의 과목들은 기초가 부족해도 교과서만 충실히 이해하면 얼마든지 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준우 같은 아이들이 이런 사실을 증명합니다. 중학교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능력만 갖추어도 얼마든지 부족한 기초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기초는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 글을 읽고 이해하는 언어능력입니다.

 

뛰어난 독서가이지만 독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학교 공부에 의욕이 없고, 목적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로는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스티브 잡스의 초등학교 성적표에 적힌 평가입니다. 잡스는 초등 3학년 때까지 상습적으로 학교를 빼먹는 문제아였습니다. 당연히 성적도 나빴죠. 교과 지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잡스는 형편없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잡스가 달라진 것은 초등 4학년 때였습니다. 담임이었던 힐 선생님의 배려와 관심이 잡스의 마음을 움직인 덕분입니다. 잡스는 힐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우등생으로 변신했습니다. 잡스의 학습능력에 깜짝 놀란 힐 선생님은 잡스에게 '수학능력(학문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평가'를 받게 했습니다. 잡스의 수학능력은 고등 2학년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초등 4학년이었던 잡스는 고등 2학년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가졌던 겁니다. 고등 2학년 학생이 초등 4학년 교실에 앉아있었던 셈이니 다른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잡스는 '사기 캐럭터'였던 거죠. 잡스가 이런 수준의 언어능력을 갖게 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독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덕분입니다. 독서만큼 언어능력을 확실하게 끌어올려 주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드실 겁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언어능력 평가를 해보면 그런 아이들은 독서 여부와 상관없이 백이면 백 언어능력이 높습니다. 평생 가야 책 한 권 읽지 않았다는 중등 2학년 학생이 수능 국어영역 80점을 넘긴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언어능력이 높은 것은 지능보다는 기질적인 요인이 큽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대충 넘어가지 못하는 집요한 성격,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품는 사고 패턴 덕분에 일상생활이나 학교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언어능력이 저절로 성장합니다. 한마디로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아이죠. 이런 아이가 책을 읽지 않고 명문대에 들어갔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통탄할 일입니다. 이런 기질의 아이는 독서 효과도 매우 크게 나타납니다. 엄청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의 잠재력이 독서를 하지 않음으로써 묻혀버린 셈입니다.

 

초등학교 때 몇 점을 받느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아이가 또래 연령 대비 어느 정도의 언어능력을 갖추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언어능력이 높아도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는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능력이 낮은데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언어능력이 낮은 아이는 1차 급변동 구간에서 무조건 성적이 떨어집니다. 논술 강사 생활 12년 동안 단 한 번의 예외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어능력이 바로 학습능력입니다.

 

공부머리 독서법_ 최승필

by 미스터신 2019. 7. 6.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