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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6 지식도서 다독가
지식도서 다독가는 강제로 만들 수 없다
제대로 읽은 지식도서 한 권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책을 읽으며 습득하는 지식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방대한 분량의 지식을 이해하고, 상호 연결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머릿속에 지식 처리 전용 '광통신망'이 깔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광통신망은 성능이 매우 뛰어나서 일단 깔고 나면 지식 습득에 있어서 엄청난 성능을 발휘합니다.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이런데 10권, 100권을 읽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실 저는 이런 경우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감히 단언하자면 <코스모스> 수준의 지식도서를 10권 이상 제대로 읽은 학생은 전국을 탈탈 털어 0.01%도 안 될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례를 찾기는 아주 쉽습니다. 지적능력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룬 위인급 인물을 아무나 고른 후에 그 사람의 성장기를 살펴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도서 다독가들은 거기 죄다 모여있습니다.
지식도서 다독가들은 저처럼 아주 적은 수의 지식도서를 꼭꼭 씹어먹듯 읽는 경우와 전혀 다른 방식의 독서를 합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책을 한 번만 읽죠. 그런데도 여러 번 읽은 것처럼 책 속에 담긴 지식을 완벽에 가깝게 흡수해냅니다. 이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지식도서를 제대로, 많이 읽은 덕분입니다. 폭넓고 탄탄한 기초 지식,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 지식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 덕분에 어떤 지식도서든 훤히 꿰뚫어 보며 읽을 수 있습니다.
지식도서 다독가들은 거대한 고래가 바닷물을 집어삼키듯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집어삼킵니다. 그게 무엇이 됐든 매일 새로운 지식을 자양분으로 삼아야만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강한 '광통신망', 압도적인 지식,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얻습니다. 이쯤 되면 학교 공부는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닙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 대부분은 이미 다 아는데다 설사 모르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보잘것없을 만큼 쉽기 때문이죠. 학습에 있어서 이들은 초능력자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지식도서 다독가는, 어딘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견된 적은 없는 멸종 위기종 동물과 같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들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저 멀리 별천지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어리다면 이 장을 특별히 신경 써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지식도서 다독가에는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이 네 유형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1번 유형이 2, 3번 유형의 특징을 가질 수도 있고, 3, 4번 유형이 1번 유형의 특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유형 분석은 아이를 지식도서 다독가로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식도서 다독가로 성장하는 원리를 알면, 아이가 다독가의 자질을 보일 때 그 싹을 꺾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식도서 다독가는 강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강제로 시도했다가는 부작용만 낳을 뿐입니다.
유형 1. 활자중독형
활자중독형은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유형입니다. 쉽게 말하면 도서관 서가의 A열부터 Z열까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어버리는 식입니다. 발명완 에디슨,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연쇄 창업마라는 별칭을 가진 테슬라 CEO 엘론 머스크 등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도서관을 정복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때 퇴학을 당하는 바람에 시간과 열정을 얻을 수 있었고, 빌 게이츠는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책만 읽다가 아들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여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던 엘론 머스크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도 저 혼자 독서를 하는 기행을 일삼았습니다. 그 결과 청소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읽은 책의 권수가 만 권을 돌파했습니다. 경위야 어떻든 도서관 어린이실을 통째로 정복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독서를 하면 아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인재가 됩니다.
도서관 어린이실 서가는 어른들이 이용하는 문헌정보실 서가와 구조가 같습니다. 역사, 과학, 철학, 사회, 정치, 문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이 다채롭게 비치돼있죠. 다른 점은 책의 수준이 어린이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뿐입니다. 어린이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 유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 유치한 문학, 유치한 지식은 없습니다. 다만 어렵고 복잡한 것을 쉽게 친절하게 설명해놓았을 뿐이죠. 따라서 어린이실의 서가를 정복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종류의 지식을 머릿속에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어린이실에 비치된 역사책 전부를 제대로 읽는다고 가정해보죠. 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 읽는다는 것은 그 분야의 지식을 반복 확장해서 학습함을 의미합니다. 한국사 통사 책을 한 권 읽으면 아이는 한국사의 대략적 흐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한국사 통사 책만 수십 종 넘게 비치돼있습니다. 담고 있는 지식은 비슷하지만 책마다 조금 다른 관점, 조금 다른 강조점, 조금 다른 서술 방식을 갖고 있죠. 따라서 수십 종에 이르는 한국사 통사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사 통사 지식을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수십 번 반복 학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교과서를 달달 외워 습득한 지식과는 전혀 다른 입체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처음 통사 책을 읽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구나', '고구려라는 나라에는 광개토대왕이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접합니다. 이렇듯 처음 통사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사라는 새로운 지식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안녕. 반가워" 하고 인사를 하는 거죠.
두 번째 통사 책을 읽을 때는 다른 관점, 다른 서술 방식으로 같은 지식을 다시 습득합니다. 단군왕검이 다시 고조선을 세우고, 광개토대왕이 다시 북방을 정복하죠. 그러면서 아이는 첫 번째 통사책을 읽는 과정에서 획득했던 지식을 강화하고, 놓쳤던 지식을 새로이 머릿속에 입력하게 됩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것만 알았는데, 두 번째 읽을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가 조선 중기였고, 50년 후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는 식이죠. 한국사 지식이라는 커다란 퍼즐망이 서서히 채워집니다.
이렇게 6~7권의 한국사 통사 책을 읽고 나면 아이는 이제 다음장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훤히 알 정도로 한국사 지식에 능통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들 사이에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스무 권, 서른 권을 읽고 나면 사건들의 상호 관계까지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머릿속에 한국사 통사라는 지식 체계 하나가 완전한 형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는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 지식을 꺼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때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한국사 지식이 내면화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생각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이점이자 성장입니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다가 유람선을 봤다고 해보죠. 가뜩이나 도로가 막혀 심심했던 아이는 자연스레 거북선을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한강 위에 거북선을 띄워 유람선을 공격하는 상상 놀이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문득 거북선의 유별난 모습에 생각이 미칩니다. '거북선은 왜 등딱지 같은 덮개로 덮여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게 되는 거죠. 그리고 '거북선은 전쟁용 배니까 당연히 잘 싸우기 위해서겠지. 그런데 등딱지가 있는 게 왜 싸움에서 유리하지?' 하는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고대 해군의 전쟁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전쟁 방식을 알아야 등딱지가 왜 유리한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는 고대 해군의 전쟁 방식을 모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죠. 아이가 본 해상 전투라고는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 속 장면뿐입니다. 해적들은 유람선을 약탈할 때 사다리나 줄을 이용해 그 배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등딱지가 있으면 그렇게 건너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북선의 등딱지에는 무수히 많은 송곳이 박혀있습니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거북선의 등딱지는 적군이 우리 배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입니다. 여기서 생각이 더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등딱지로 왜군이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왜군이 그만큼 배 위에서 전투를 잘했다는 뜻입니다. '같은 군사인데 왜 왜군이 배 위에서 더 잘 싸울까?' 아이는 책에서 읽은 전투 지식을 머릿속에서 찾습니다. '중국의 주무기는 창, 한국의 주무기는 활, 일본의 주무기는 칼'이라는 내용을 떠올립니다. 아이는 다시 사고 실험을 합니다. 조선 배와 왜의 배가 만납니다. 조선 배가 주무기인 활을 쏩니다.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배의 나무 기둥이나 선실로 몸을 숨기면 화살을 맞지 않을 테니까요. 왜군이 배를 바짝 붙이고 조선 배로 넘어옵니다. 칼을 잘 쓰는 왜군이 조선군을 쉽게 이깁니다. 그런데 왜 창이 아니고 칼일까? 아이는 잠시 생각합니다. 배 위의 공간이 좁습니다. 긴 창을 휘두르면 이것저것 걸리적거리는 게 많을 겁니다. 짧은 칼이 훨씬 유리하겠죠.
머릿속에서 하나의 지식 체계를 완벽하게 입력해두면 이런 식으로 곱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곱씹는 과정에서 아이는 지식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흡수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와 완전히 일체화된, 살아있는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다른 유형의 역사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반복 학습됨과 동시에 세밀화됩니다. 아이는 시대 배경을 훤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 위인전을, 유물에 관한 책을 읽습니다. 지식이 상호 연결되며 강화됩니다. 어린이실의 역사 서가를 정복할 때쯤이면 아이는 준전문가급의 지식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 많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상호 연결해 복잡다단한 하나의 지식 체계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처리하는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향상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죠.
이런 식으로 문학, 과학, 사회, 정치, 철학 분야의 도서를 모조리 독파합니다. 아이가 쓸 수 있는 생각의 재료가 점점 늘어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역사의 지식 체계를 머릿속에 넣은 아이가 읽는 문학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읽는 문학과 전혀 다릅니다. 역사와 문학을 독파한 아이가 읽는 과학책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읽는 과학책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 분야가 머릿속에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그런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지식 네트워크를 이용해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의 과정을 통해 강화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통섭적 인재, 세상을 읽는 눈을 가진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교과서를 봅니다. 교과서는 자신의 지식 네트워크에 이미 구축된 내용을 앙상하게 추려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언어수준도 턱없이 낮습니다. 교과서를 한 번 읽으면 공부가 끝납니다. 따로 공부할 과목은 수학과 영어뿐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금세 끝납니다. 아이의 지식 처리 능력이 외국어의 지식 체계, 교과 수학의 연산 수준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을 통째로 읽어내는 사람은 천재입니다. 이들의 천재성은 뛰어난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칠 듯한 독서 욕구에 있습니다. 운동 중독자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온몸이 근질근질한 것처럼 잠시도 활자를 읽지 않으면 뇌가 근질거려 견디지 못하는 것, 그래서 항상 책을 손에 달고 다니고, 어쩌다 책이 없을 때는 하다못해 광고판이나 제품설명서라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바로 이것이 천재성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독서에 대한 강렬한 열망 말고 그 무엇도 이렇게 책을 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형 2. 탐구형
탐구형은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읽는 유형입니다. 활자중독형이 방사형 독서를 한다면 탐구형은 선형 독서를 합니다. 예를 들어 국내 최연소 박사인 송유근 씨는 어린 시절 바람을 무척 신기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바람을 다룬 책을 읽었습니다. 바람에 관한 책을 읽다 보니 이번엔 바람의 힘을 이용한 요트나 돛단배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요트나 돛단배를 다룬 책들을 읽었고, 항해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탐구형은 이런 식으로 호기심을 쫓아가며 책을 읽습니다. 독서를 통해 호기심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쌓이고, 지식이 쌓이는 과정에서 다시 호기심이 생기는 거죠. 독서 방식 자체가 '지식의 구조'와 꼭 닮아있습니다.
탐구형은 공격적인 독서를 합니다. 책을 읽는 원동력이 호기심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발생하는 사고의 양이 많고, 책 속의 지식도 깊이 흡수합니다. 책 한 권 한 권의 독서 효과가 클 수밖에 없죠. 또 탐구형은 종종 본인의 언어능력을 몇 단계 뛰어넘는 책을 읽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 기계 문명은 어떻게 시작됐을까?'라는 호기심이 들었다고 해보죠. 아이는 어린이책을 통해 '기계 문명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호기심이 풀리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제임스 와트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증기기관 발명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고,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을 테니까요. '그전에는 아무도 만들지 않았던 증기기관을 왜 하필 그때 여러 사람이 만들려고 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거죠. 이렇게 의문을 쫓다 보면 아이는 결국 어린이책의 경계선을 넘게 됩니다. 자신의 언어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책에 손을 대게 되는 거죠. 청소년용 도서, 심한 경우 성인용 도서까지 독서 지평을 넓힙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또래의 수준을 뛰어넘는 언어능력과 지식,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을 탑재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아이는 교과 학습 정도는 우습게 해치울 수 있는 능력자가 됩니다. 만약 아이의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면 아이는 결과적으로 활자중독형과 마찬가지로 전 분야의 지식을 폭넓고도 깊게 쌓게 될 겁니다.
사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독서 이력을 본다는 것은 탐구형 독서가의 선형 독서, 다시 말해 독서 목록을 통해 아이의 지적 호기심이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가를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고등학생 필독서 위주로 독서 이력을 작성하죠. 그래서 서울대학교 입학처장이 매년 추천도서를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학생의 지적 여정'을 보려는 거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형 3. 마니아형
활자중독형, 탐구형과 함께 지식도서 다독가의 3대 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마니아형입니다. 활자중독형이 팔방미인, 탐구형이 지식탐험가라면 마니아형은 한 우물만 파는 특정 분야 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마니아형이 될 기본 자질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이라면 누구나 흥미로워하는 분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는 로봇이나 비행기를 좋아하고, 또 어떤 아이는 공룡이나 화산을 좋아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관심사를 잃게 됩니다. 어른들이 아이의 관심사를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한 분야만 좋아하는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돈에 열광한다고 해보죠.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아이가 경제에 관한 책만 읽고, 투자나 창업, 주식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겁니다. 다른 책은 손도 안 대려 합니다. 이 경우 부모님은 자연히 걱정을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돈, 돈 하는 것도 마뜩잖고, 지금 돈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돈에 대해서도 이런데 만약 공륭이나 로봇, 패션 등에 열광한다면 정말 한숨만 나올 겁니다. "그런 책 읽을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나 외워"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죠.
어른의 눈에 아무리 한심해 보이는 분야라도 열광하는 관심사가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설사 그 지식이 실제로 쓸모없다 하더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그 강렬한 관심사가 지식도서를 읽는 힘이 되어주고 더 나아가 언어능력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로봇을 좋아해서 로봇 책만 읽는 아이가 있다고 해보죠. 원하는 대로 책을 공급해준다면 이 아이는 이내 시중에 나와있는 로봇 책을 모조리 독파하게 될 겁니다. 로봇에 대한 흥미도가 높아 멈추지 못한다면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기계 공학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거나 자기 연령대보다 높은 수준의 로봇 공학책을 읽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니아라면 독서의 지평이 양방향으로 확장될 겁니다. 기계 공학을 읽으면서 동시에 수준 높은 로봇 공학책도 읽는 거죠.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이야기책도 포함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청소년용 도서를 넘어 성인용 도서까지 정복한다면 아이는 또래를 압도하는 언어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로봇이라는 특정 분야의 지식 체계를 준전문가급으로 소화한 아이에게 고등학교 교과 공부는 그다지 어려울 게 없습니다.
마니아형에게는 또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마니아형의 강렬한 관심사는 강렬한 꿈을 낳습니다. 이것은 위인들의 또 다른 공통점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혁명가와 영웅들의 전기를 끼고 살았던 영웅 마니아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투자 전문가인 워런 버핏은 여덟 살 때부터 경제, 투자, 주식 책을 끼고 살았던 돈 마니아였고,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외계인 마니아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이가 열광하는 분야가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응원해주세요. 황당한 것이든, 돈이 안 되는 분야든 상관없습니다. 열정을 잃지 않는 한 아이는 스스로 발전할 것입니다. 입시 정도는 손쉽게 해결할 거고요.
유형 4. 활용형
활용형은 책을 일종의 사용설명서로 여기는 유형입니다. 무언가를 배울 목적으로 책을 읽죠. 바둑을 배우기로 했다면 바둑 이론서들을 먼저 읽고, 컴퓨터를 새로 샀다면 컴퓨터 이론서들을 섭렵하는 식입니다. 초등 저학년 때 그 특징이 드러나는 나머지 세 유형과 달리 활용형은 보통 청소년이 되어야 그 특징이 발현됩니다. 대부분의 실용 이론서가 성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세 유형과 마찬가지로 활용형도 언어능력이 높습니다. 실용적인 정보 위주의 독서를 하기 때문에 교과 관련 지식이 쌓인다거나, 세계관이 성장하는 효과는 거의 없지만 공부머리의 상승효과만큼은 큽니다. 독서의 목적상 책을 사용설명서 읽듯 꼼꼼하게, 구체적인 정보를 기억해가며 읽기 때문이죠.
활용형은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하기 위해 만전을 기합니다. 그래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부분은 표시해뒀다가 거듭해서 읽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따로 정리해서 외우기도 하죠. 활용형에게 독서는 책 속의 정보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파악하는 훈련인 셈입니다. 게다가 활용형들은 이렇게 정리하고 파악한 지식을 곧바로 실전에서 써봅니다. 바둑 이론서로 공부한 내용을 바둑을 배우며 써먹고, 컴퓨터 관련 서적으로 쌓은 지식을 컴퓨터를 다루며 쓰죠.
이 과정에서 활용형은 자신이 어떤 부분을 잘못 파악했는지, 어떤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는지를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추가 독서를 합니다. 글 속의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계속 업그레이드됩니다. 그 위력은 예상외로 커서 교과 학습에서 어마어마한 효율성을 발휘합니다.
지식도서 다독가의 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탐구형이 활자중독형의 특징을 가질 수도 있고, 마니아형이 활용형처럼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다양한 변용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변용에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도서 다독가는 자발성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고, 그 자발성의 근원은 호기심이라는 사실입니다. 활자중독형은 세상 모든 지식을 궁금해하고, 탐구형은 마음속에서 떠오른 호기심을 쫓습니다. 마니아형은 열광하는 분야에 대한 활화산 같은 호기심을 품고 있으며, 활용형은 자신이 새로이 발을 내딛는 분야를 알고 싶어합니다. 부모님께서 '이런 지식은 알아야 하니 읽어라'라고 말하는 순간, '이 전집은 네 나이 때 꼭 읽어야 해'라고 강제하는 순간, 호기심의 싹은 사그라지고 맙니다. 자발성은 호기심의 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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