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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3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호흡, 체온 등 생명 유지를 담당하는 뇌간이 1층에, 희로애락의 감정과 욕구를 담당하는 변연계가 2층에 자리 잡고, 마지막으로 3층에는 생각하고 판단하며 충동을 조절하는 대뇌피질이 있습니다.

 

어미 몸에서 나오기 전에 생명의 1층을 지은 아이는 15~20년 동안 감정의 2층을 짓습니다. 1층과 2층이 튼튼하게 지어진 다음에야 지성의 3층이 견고하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1층과 2층을 부실하게 짓거나 아예 짓지도 않고 성급하게 3층만 거대하게 쌓으려고 하니, 어느 순간 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적 자극을 들어붓는 것은 플라스틱 골조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빙자해 우리 아이들을 바닥없는 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내 아이가 100세까지 행복하려면 정서의 튼튼한 기둥을 세워야 하는 어린 시절 10년을 정말 잘 보내야 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 경우는 시작이 90%입니다. 20%의 사람들이 80%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파레토 법칙을 양육에 적용하면, 어린 시절 10년이 이후 90년의 성공과 행복을 좌우합니다. 여기서 10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절대로 지적 자극 얘기가 아닙니다. 정서적 안정이 최우선 입니다. 아니, 정서적 안정이 전부입니다. 열 살까지는 스스로 책을 읽고 싶도록 해주는 환경을 만드는 것 외에 공부를 지나치게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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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설명했듯이 아기의 뇌는 태어난 후 3년에 걸쳐 완성된다. 왜 아기는 엄마 배 속에서 뇌를 완성해서 태어나지 않을까. 완전한 상태로 태어나려면 뇌가 너무 커져서 엄마의 좁은 자궁을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구조와 기능만 갖추어 태어난 아기의 뇌는 태어난 후 환경에 맞게 재정렬하면서 급성장한다. 그 집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뇌를 맞춘다. 엄마를 엄마로 알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가 어떤 집안의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정체감을 갖추기까지 최소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태어나서 3년, 출산은 계속된다.

 

이 시기에 아기가 부모와 세상에 뇌를 맞추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위하고 보호해주는 대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린이집 같은 공동 양육시설에 3세 이전 아이를 너무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공동 양육 시설은 내 아이에게만 사랑을 주는 곳이 아니라 많은 아이에게 평균적인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보육교사가 내 아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은 고작 8분이라니 즉 572분 동안 아이는 혼자다. 밤 10시까지 시설에 맡겨진 3세 이하 아이는 천천히 병에 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이를 대상으로 한 시간 투자에는 한 가지 불가피한 속성이 있다. 반드시 그때, 즉 아이가 어렸을 때 제공해야지 나중이 되어서는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결정적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부모의 시간을 제대로 투자받은 아이가 온전하게 자란다. 결정적 시기에 만난 사람들은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는데, 아이에게 엄마는 첫사랑이 되고 엄마에게 아이는 이상형이 된다. 발달심리학자 로렌츠가 발견한 각인이 이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로렌츠는 오리가 갓 태어났을 때 어미 오리 대신 자신이 곁에 있었더니 아기 오리들이 자신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이 시기에 양육자에 대한 단단한 심리적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각인은 세상과의 첫 연결 고리로, 벌거숭이로 태어난 아이가 세상과 처음 접속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각인이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아이를 안정되게 키울 수 있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생후 3년 동안 충분한 시간을 투자받지 못해 부모를 각인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20년 동안 임상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에 찬 주장이다.

 

그렇다면 뇌를 제대로 발달시키기 위해 누워 있어야 하는 인간 아기는 엄마에게 어떻게 각인할까? 생후3~4개월이 지나야 시각이나 청각으로 엄마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데 말이다. 걸을 수 없는 아기가 엄마에게 각인하는 비밀은 바로 엄마 냄새이다. 냄새는 곧 지금 이곳이 안전하다는 신호가 된다. 안전해야 밥을 먹고 안전해야 응가를 볼 것이며 안전해야 책을 읽고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그 안전감의 토대가 되는 것이 바로 냄새와 온도이다.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 안에는 부모의 온기와 냄새가 가득 차 있다. 성인이 된 우리는 부모님의 온도와 냄새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매 배 속 일정한 온도의 양수 속에서 보호받던 아이는 태어난 후에도 엄마 냄새와 일정한 온도를 통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계속 가져야 한다. 인간의 태생은 태어난 뒤에도 3년 정도 더 계속 되기 때문이다.

 

호르몬 분비는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몸에서는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거나 억제된다. 친부모가 범죄자라면 더욱더 무관심하고 불친절할 것이며,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또 다른 이유이다. 다시 말해 부모의 냄새를 충분히 맡지 못하거나, 부모가 있어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나쁜 냄새를 맡은 아이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랑의 냄새를 충분히 맡게 해주어야 한다. 그 냄새는 당연히 엄마, 아빠 것이어야 한다. 할머니 냄새는 아이와 50% 적합성을 보인다. 100%의 엄마 냄새로 감정적 안정을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린다면 50%의 냄새로는 몇 년이 걸릴까?

 

분명히 6년이라는 답을 얻겠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할머니의 심성과 아이와의 조화로움에 따라 4년이 되기도 하고 8년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근연도가 전혀 없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냄새는 갓난아이에게 총체적 불안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아기는 그 냄새를 저장하고 기억하며 안정을 취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문제가 커지는 것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3개월, 6개월마다 바뀔 때이다. 아기는 서서히 등대를 놓치고 바다를 표류한다. 매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쯤 되면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근연도가 50%라도 할머니가 일관되게 키운 아이는 당연히 안정적으로 자란다. 하지만 대부분 할머니가 엄마보다 먼저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거나 같이 살지 못하면 그동안 마음을 맡겼던 대상을 잃으면서 아이는 불안감과 혼란에 빠진다. 대부분 이런 혼란감은 일시적이지만 때로는 심각한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명우의 모든 일은 단 4개월 사이에 일어났다. 엄마는직장을 계속 나가고, 명우가 태어난 후 13년 동안 평화로웠던 집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사실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근연도 50%의 할머니 냄새는 아이의 욕구를 100% 충족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50%의 냄새만으로도 최상의 적응을 해왔지만 그 냄새마저 사라진 뒤 깊이 내재되어 있던 결핍감이 치솟은 것이다. 당연히 결핍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는 이 불편한 감정이 싫어 그것을 무조건 없애려 애쓰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보였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라면을 끓여 먹고 오토바이를 훔치는 동안에는 외로움과 결핍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명우를 낳기 전부터 이를 악물고 다닌 19년의 직장 생활은 하루아침에 사직서를 냈다. 그나마 아이가 몽니를 부리는 것은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신호이다. 이것조차 받아주지 않고 거부하면 아이들의 분노로 집 안에는 곧 쓰나미가 몰려온다.

 

결정적인 시기에 할머니에게 각인된 아이는 이후 엄마 곁에 왔을 때 그 냄새가 낯설어 이상하게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엄마도 결정적인 시기에 아이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는다. 때마침 둘째를 낳아 엄마가 집에 들어앉으면 둘째에게는 첫째보다 훨씬 더 애정을 갖게 된다. 엄마는 그래도 둘째의 마음을 얻었지만 첫째는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이유 없이 동생과 비교당한다. 상황을 바꿔보자. 첫째 아이는 엄마가 키웠는데 둘째를 떼어놓았다. 엄마에게는 첫째라도 남았지만 둘째는 결핍감 때문에 평생 피해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엄마가 아이들을 모두 할머니 손에 맡겼다면? 엄마는 돈 말고는 남는 것이 없으며 아이들은 서로에게 '왜 태어났니' 하며 노래를 불러준다. 가정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모 없는 아이는 그럼 죽으란 말이냐?'

불행하게도 친부모가 이 세상에 없다면 아기는 말끔하게 그 냄새를 정리하고 자기가 적응해야 할 새로운 사람의 냄새를 정한다. 동물적 본능으로 세상에 없는 냄새는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자식을 먼저 보내고 손주를 키우는 할머님, 할어버지는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부모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는데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이는 그 냄새를 찾기 위해 평생을 허비한다. 갓난아기 때 입양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친부모를 찾는 이유이다. 일단 찾아서 냄새를 맡아보고 나서야 다음 단계를 결정한다. 이 냄새를 계속 맡을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엄마는 양육의 333법칙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하루 3시간 이상 아이와 같이 있어주어야 하고,

* 발달의 결정적 시기에 해당하는 3세 이전에는 반드시 그래야 하며,

*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떨어져 있다 해도 3일 밤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부모가 너무 바빠서 하루, 이틀 밤 정도는 건너뛰어도 아이는 그동안 비축해놓은 사랑의 배터리 잔량으로 버틸 수 있다. 하지만 3일 밤이 넘어가면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부모에게 더욱 달라붙는다. 하루 3시간은 아이를 온전하게 자라도록 하는 매직타임이며, 3년은 엄마의 냄새와 온도를 제공해야 하는 최소한의 역치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3년 동안 제대로 투자했다면 4년, 5년 투자한 것과 아주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3년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때는 하늘과 땅 차이로 결과가 달라진다. 3년과 4년의 차이는 정서적 안정성이 좀 더 견고한가 약한가의 차이로 끝난다. 하지만 3년을 채웠는가 채우지 못했는가의 차이는 아이가 정상적인 발달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커진다.

 

매직타임도 아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좋다. 처음에는 엄마 사랑의 대체물이었던 게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힘을 지니며 중독으로 이끈다.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의 뇌는 마약을 하는 사람의 뇌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뇌가 그렇게 변해버리면 엄마 사랑의 약발은 떨어진다. 마약 중독자에게도 엄마가 있다. 눈물로 호소하며 자식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만 그들에게는 엄마의 눈물이 너무 늦어버렸다. 아이에게 밥을 주듯 엄마의 3시간을 반드시 주어야 한다. 시간 맞춰 밥을 주듯이 3시간도 제때 제대로 주어야 한다. 엄마가 편한 시간이 아닌, 아이가 절실하게 원하는 시간에 주어야 한다.

 

애착이란 아기와 양육자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말한다. 아기가 따뜻하고 친근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만족과 즐거움을 느낄 때 형성된다. 애착이 안정되게 형성된 아기는 '나는 보살핌을 받을 만한 사람이야, 엄마는 좋구나. 내가 필요할 때 언제나 엄마가 있네. 세상은 살 만한 곳이네'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낄 때 아기의 마음은 세상에 뿌리를 내린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보살핌을 잘 받은 아이는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는 내적 개념으로 자리 잡아 청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영향을 미친다. 평생 동안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지, 하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지가 이미 3세 무렵이면 결정된다.

 

생후3년 동안 엄마에게 안정적인 애착이 된 아이는 이후 서슴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살다가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3세 이전에 준비해둔 마음의 종잣돈으로 잘 헤쳐 나간다. 이제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엄마는 1시간 동안 외출할 수 있고 아이는 3시간 동안 어린이집에 있을 수 있다. 점점 익숙해지면 아침에 학교에 가서 오후3시까지 중간에 엄마를 찾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다가 올 수 있다. 그렇게 3일 정도 수련회에 가고 일중일 동안 캠프에 가고 한 달 이상 배낭여행을 가며 2년 동안 군대에 다녀올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엄마 곁을 떠나 결혼을 한다. 이제는 두 사람의 심리학에서 대상을 바꿔 엄마에게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해도 전혀 불안하지 않을 만큼 독립하는 것이다.

 

애착이 불안정한 아이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쉽게 흥분하고 좌절하고 울고 보채며 자주 아프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독립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결혼시키기 어렵고 엄친아 이야기를 했다가는 명절 때 얼굴 보기도 힘들며 이혼당한 후 제 자식 키워달라고 이제 좀 조용히 살아가려는 부모의 인생 항로에 끼어들기도 한다. 어렸을 때 3년의 투자를 아꼈다가 30년동안 뒤치다꺼리를 할 수도 있다.

애착이 심하게 불안정하거나 아예 애착이 형성되지 않으면 마음이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해 건강한 줄기를 뻗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격과 정서에 문제가 생겨 삶이 위태로워진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의미 있는 삶에 대해 평생 연구해온 프랑클의 제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따뜻한 눈으로 상대를 봐주는 일, 특히 약한 아이를 봐주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은 이상 우리는 이미 무상으로 로고테라피를 받는 셈이다.

 

이런저런 일로 상심해 드러누웠던 엄마들이 심리 치료를 받지 않고도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벌떡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것은 절대로 변명이나 합리화가 아니다. 비겁한 것은 더욱 아니다. 주체성이 없다는 것은 현학자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자식 때문에 사는 당신은 지구에서 몇 안 되는 진실하고 순수한 의미 중 하나를 찾아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것은 실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식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되려면 자식이 어렸을 때는 우리가 그들의 의미가 되어주어야 한다. 엄마만 있으면 안심되고 엄마만 있으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엄마만 있으면 뽀송뽀송한 이불에서 잘 수 있어서 엄마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야 한다. 즉 엄마는 한때 자식의 삶의 의미이다. 물론 자식이 스무 살쯤 되면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예전보다 거리를 두어도 된다. 이때는 오히려 자식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거나 자식의 유일한 의미가 엄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경우는 자식을 향한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므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부모와 안정적으로 애착을 맺은 아이는 세상을 신뢰하고, 마음의 뿌리에서 세상 밖으로 줄기를 뻗는다. 반대로 신뢰감이 형성되지 않으면 아이는 이 사람에게 자신의 뇌를 맞출지 망설인다. 그 결과 선천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아 발달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산만한 형태로 발달된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면 계속 경로를 재탐색해야 하듯이. 생활이 안정되고 아이가 불안함을 느끼지 않고 자란다면 그만큼 좋은 심성을 갖기 쉽다. 정서와 성격은 쌍둥이 같다.

 

에디슨이 알을 품고 있을 때 엄마가 야단쳤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심지어 학교에서 자퇴를 권유했을 때조차도 아이를 믿으며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엄마의 이런 태도가 에디슨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더 나아가 세상에 무한한 신뢰를 느끼고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에디슨은 자신을 퇴학시킨 학교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좋은 머리를 나쁜 방향으로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늘도 하루 종일 전구 밑에서 보낸 우리는 에디슨을 낙관적인 사람으로 키워낸 그의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잘못된 연결 고리는 부모에게서 찾을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눈을 오랫동안 맞춰주지 않기 때문에 시선이 분산되고, 시선이 분산되니 주의도 분산된다. 부모의 눈이 금방 돌아가니 아이의 눈도 돌아간다. 우리의 생활에서 진득하게,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아이는 주의를 빨리빨리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뇌를 발달시킨다.  나는 아이의 주의 산만은 부모가 만든 병 중 하나라고 말한다. 부모의 일정한 온도와 냄새, 일관되고 긍정적인 목소리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대변을 볼 때도 이리저리 주변을 살필 것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 산속에서 볼일을 볼 때처럼 말이다. 어디에서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기에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눈을 계속 굴린다. 부모가 바쁜 집은 부모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에게 장시간의 텔레비전 시청이나 인터넷 사용을 허용한다. 리모컨과 마우스 덕분에 눈앞의 화면은 1분에 서너 번도 더 바뀐다. 학원도 요기조기 많이 다닌다. 옆집 아이가 성적이 올랐다면 바로 다음 날에 그 아이의 학원으로 옮긴다. 집집마다 인형은 5개가 넘고 자동차, 블록 등의 장난감도 10개를 넘는다. 읽지도 않은 책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자극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집중하기 어렵다. 얼마 후면 모든 학교에 태블릿 피시가 보급되어 교과서가 없어질 것이라는데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아이들의 주의력은 더 산만해지며 시력도 더 나빠질 것이다. 대인관계는 더욱 메말라갈 것이다. 3세만 되면 대한민국 어린이의 70%가 모이는 어린이집에서는 이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진다. 앞에서 말했듯 어린이집 교사가 한 아이에게 눈을 맞추는 시간이 하루에 평균8분이다. 주의 산만을 유발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8분 후 자기를 보고 있던 대상의 눈이 돌아가면 아이의 눈도, 뇌도 돌아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 만3세가 넘으면 교사가 자신을 보든 말든 자신만의 주의력을 지탱할 수 있지만 누워만 있는 아이들에게는 몹시 걱정되는 환경이다.

 

할머니에게 맞춰 살다가 2~3년 후 또 부모에게 맞춰야 하는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직장에서 2명의 상사를 모시는 것과 같다. 이 시기에는 무조건 아이에게 일관된 양육을 해줄 방법을 짜내야 한다. 이 시기에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아이에게 집중할수록 아이는 더 안정되고, 아이가 안정적으로 자라면 부모는 훨씬 더 안정적으로 더 길게 직장에 다닐 수 있다.

 

지금까지 아이가 하루에 부모의 냄새를 맡아야 하는 시간은 최소한 3시간 이상이라고 계속 말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하루에 3시간은 현실의 답이다. 내 마음속에는 진실의 답이 하나 더 있는데 '생후 3년까지는 하루 종일'이다. 이렇게 용기 없고 무식하기까지 했던 내 모습을 변명하고자, 최소한의 시간만 주어도 망가지지 않고 잘 크는 나와 형제의 아이들, 친구와 이웃의 아이들을 방패 삼아 하루 최소 3시간이라는 최소공배수를 뽑아냈을 뿐이다. 즉 3시간은 답이 아니라 현실 상황을 고려한 자기 합리화의 시간이며 합의점일 뿐이다.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아이는 하루 종일 세상을 탐험하며 즐겁게 지낸다. 좀 더 다양한 자극과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있는 자연에서 놀게 하면 금상첨화이다. 아이는 같은 곳에서도 하루하루 다른 즐거움을 찾아낸다. 하지만 어른들은 곧 지루해진다. 지루해진 어른을 위한 요령을 하나 알려주겠다. 바로 책 읽기다. 3시간 동안 줄곧 책만 읽을 수는 없다. 전 세계 200만 독자를 사로잡은 <하루 15분 책 읽어주기의 힘>의 저자 짐 트렐리즈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루 15분씩만 책을 읽어주어도 아이의 뇌를 깨운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책을 읽어준 아이들이 성적이 좋고 정서도 더 안정된다는 수많은 사례를 소개했다. 심지어 정신지체 아동이 정상 지능으로 회복되는 사례도 있다.

 

책을 읽어주면 먼저 아이의 정서가 안정된다. 책 속 이야기와 그림을 통한 심리적 이완 효과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좀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바로 책을 읽어주는 시간 동안 엄마의 냄새와 온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화가 많이 났을 때는 책을 읽어주기 힘들다.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엄마 마음이 안정된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 상태에서 전해지는 엄마의 나긋한 목소리, 익살스러운 동물 흉내, 따뜻한 숨결등이 아이를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한다. 다만 짐 트렐리즈가 책을 읽어줌으로써 지능을 발달시키는 면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나는 책을 읽어주는 동안 엄마 냄새와 온도가 제공되어 아이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보는 동화, 즉 영상 동화도 있다. 엄마와 함께 세련된 영상동화를 보다가 잠든다면 좋겠지만, 일부 광고에서처럼 직장 일로 힘든 엄마가 책 읽어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떼어놓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어떤 발명품도 엄마 냄새와 온도를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대체품은 없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짐 트렐리즈의 말처럼 책을 읽어주면 성적도 좋아진다는 말은 사실일까? 책을 읽어주면 당연히 문자 해독 능력과 이해력이 높아진다. 하지만 여기에도 중요한 요인이 있다. 기분이 좋고 정서가 안정된 엄마와 같이 있었던 것, 그 경험이 책과 연결된다. 책을 떠올리면 아이는 저절로 엄마와 함께 있다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감정은 학교 들어가서도 이어진다. 좋아하면 몰입하게 되고 좋은 성적을 낼 수밖에 없다. 아빠가 책을 읽어주면 더 좋다. 아빠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책 속의 남성적인 캐릭터까지 실감 나게 느껴져 정서 발달에도 좋다. 당연히 엄마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았던 책 읽기에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 덧붙여져 두뇌 활동도 활발해진다. 뇌는 기본적으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무척 좋아한다.

 

돌도 안 된 아이에게는 어떻게 책을 읽어줄까? 무릎에 앉혀놓고 그냥 읽어주면 된다. 그림을 보여주며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해주면 된다. 책이 없다면 신문도 좋고 광고지도 좋다. 광고지에 나오는 과일과 채소 그림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부모가 더 많은 수다를 떨어야 하니 좀 귀찮긴 하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해줘도 좋고 그것도 기억나지 않으면 수박이 2만 원이라는데 가당치도 않다, 이 돈이 다 농부 손에 들어갈까, 어쨌든 아빠가 수박 살 돈을 벌었으니 대단한 사람이다. 너도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한다 등등 구시렁구시렁 아무 얘기나 해도 된다. 무엇이든 눈으로 보는 글자는 나중에 모두 학습과 연결된다. 단, 컴퓨터 앞에서 보는 화면 속 글자는 안 된다. 컴퓨터 중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책을 읽어주라는 말을 조기교육을 시키라는 말로 오해하는 부모들이 있다. 책을 너무 빨리 읽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공부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저 부모가 함께 책을 읽어주며 자연스럽게 글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의 책은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교훈도 다시 음미해볼 수 있고, 다섯 살 이후로 변치 않았던 세상을 보는 관점도 새롭게 한다. 이러한 인지적 전환은 치매를 예방하는 데도 좋다. 장시간 드라마를 보게 하면서 뇌를 촬영하면 뇌 활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자극은 자극이 아니라 흔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지적인 사고를 하는 순간 우리 뇌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인다. 어차피 3시간을 주는 것, 아이도 즐겁고 엄마의 뇌도 좋아지고, 먼 훗날 아이가 공부를 즐겨 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갈 수 있도록 책을 읽어주자. 이야기는 힘이 세다. 셰에라자드는 왕에게 1000일 동안 이야기를 해주어 사형을 면제받았다. 책을 많이 읽어서 잘못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읽은 책은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뇌력을 만들어준다.

 

하루 3시간 엄마 냄새_ 이현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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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6. 12. 2. 16:37

 

돈 없어도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에 따르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의 차이는 밥상머리 횟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비록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책을 많이 읽지 못했더라도, 밥상에서 가족과 식사 시간을 많이 보낸 아이들은 언어 능력이 뛰어났다. 혼자서 식사한 아이들에 비해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한 아이는 학습 능력에서 차이가 많았다. 밥상머리에서 나눈 대화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 나타나는 대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어휘를 사용한 반면에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같은 또래와 나누는 대화에는 어휘가 극히 제한적이다. 단어나 어휘의 발전 없이 같은 단어에서 머무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차원이 높은 단어들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고차원적인 언어 공부가 이루어짐으로써 소통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부모가 책을 읽어줄 때 나온 어휘는 140여개 불과했다면 가족 식사 중에 나온 단어의 숫자는 무려 1000개였다. 이것은 기존에 책을 많이 읽고 또 읽어주는 독서에 집중한 공부법보다 8배정도 높다. 혼자서 책을 읽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어휘력이 높다는 점은 밥상머리가 미치는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가족이나 머리가 좋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함께 정기적으로 밥상머리에 모여 대화를 나눈다면 그 자체로 놀라운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비싼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가족밥상머리만 지속적으로 실천한다면 충분히 학습 능력과 언어력을 키울 수 있다. 얼마나 희망적인가? 돈 없이도 자기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길이 밥상머리에 있다.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가정에서 밥상머리 시간만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언어 능력을 키우는 방법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다. 언어가 곧 그 사람이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언어만 되면 공부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공부의 기초는 언어다. 그런데 언어는 읽기와 쓰기보다 말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는 언어력을 키우기 위해서 쓰기와 읽기를 어릴 때부터 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언어는 직접 이야기하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은 글을 몰라도, 읽고 쓸 줄 몰라도 말은 할 수 있다. 1살 때부터 아이들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시기 밥상머리에서 가족이 모여 함께 대화하는 자리에 아이를 참여시키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말하는 것을 통해 아이는 언어를 습득하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스스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이렇게 언어를 배우면 언어를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모국어나 외국어에도 동일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생활 속에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2~3시간 가족이 모여 식사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와 대화 및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 자리는 최고의 언어 학교다. 공부의 기초 실력을 다지는 시간이다. 모든 가정이 이런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진다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독일의 평범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보통 아이보다 미숙하므로 이웃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고 모든 것이 느리고 미숙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는 주로 부모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부모가 언어력을 키워 주었다. 5~6세 때 그가 구사한 어휘의 숫자는 3만 단어가 되었다. 이런 풍부한 언어 덕택으로 프랑스어를 1년 만에, 이탈리어를 6개월에, 라틴어는 3개월에 마스터했다. 그뿐 아니라 영어와 그리스어까지 배워 8세가 되는 해에는 어른도 읽기 어려운 호머와 키케로, 실러 등 어른도 어려워하는 고전과 철학책을 혼자서 독파했다. 그런 책들을 동화책 읽듯이 즐겁게 읽었다. 그 결과 13세 때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16세 때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았다. 바로 그 사람이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의 원조로 알려진 칼 비테 이다.

 

이는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터득한 언어가 얼마나 공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취지로 조사를 한 자료가 있다. 100개의 중, 고등학교 전교 1등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주중에 10회 이상 가족밥상머리를 한 사람이 40%였다. 밥상머리와 공부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명한 학교나 학원을 다니지 않더라도 누구나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밥상머리는 언어력을 높여주는 가장 좋은 장소다. 처음에는 긴 시간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30분 정도 대화 시간을 꾸준히 가진다면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때 나누는 대화는 평생을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고, 앞으로 학습 능력을 키우는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녀와 가족의 미래가 여기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서열풍이 불어서 가정마다, 학교마다 독서를 강조한다. 독서도 좋지만 언어를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은 밥상머리만큼 좋은 곳도 없다. 언어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밥상머리 대화를 시작하면 누구나 언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혹시 경제적 문제로, 혹은 여러 가지 환경적 제약으로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낙심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도 가족과 같이 밥상머리를 시작해 보자. 이런 저런 탓을 하지 말고 하늘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주신 언어적인 능력을 밥상머리를 통해 스스로 발휘해 보자.

 

유대인의 밥상머리 자녀교육법_ 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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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6. 7. 9. 10:38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 번째 나무가 자랑한다. "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 두 번째 나무는 "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며 으쓱한다. 세 번째 나무가 이에 질세라 뽐낸다. "나는 아주 향기로운 예쁜 꽃들을 많이 맺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한 그 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물'.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가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이때 성경책 북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그 접착제를 쓰겠다며 찾아온다. 자신이 개발 중인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강해 한 번 책장에 붙이면 뗄 때마다 종이가 찢어져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와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물병은 물을 충분히 담을 수 있고 또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꼭 맞는 조롱박만을 골라 물병을 만들었다. 어느 해, 엄청나게 큰 조롱박만 주렁주렁 열리자 고민에 빠진다.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조롱박을 잘라도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조롱박을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자 가게 밖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쓸어 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그 큰 조롱박 둘레에 그물을 씌운 다음, 그것을 허리에 동여매고 물에 띄었다. 조롱박이 커서 공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기에 둥둥 잘 떴다. 조롱박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바깥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의 또 다른 사례다.

 

장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물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과 입시생들의 면접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부모와 싸우고 온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순간 전쟁 시작이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 철학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너 그럼 굶어 죽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 공부해서 뭐 하려고 그래." 1973년에 연세대 철학과 원서를 쓸 때의 나도 그랬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인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쓸모없는 철학으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철학, 인문학의 그 쓸모없음에 쓸모 있음이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론들이 다음날이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 철학한다고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바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철학을 만나시길. 인문학을 만나시길. 그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철학의 힘_ 김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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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31. 13:50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식마다 다른 품성과 그릇으로 존재한다. 부모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은근히 비교하면서 아이를 멍들게 한다. 비교라는 방법으로는 부모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뀌기 힘들다.

 

우리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시적, 묵시적 경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는 한 가정 내에서도 형제자매끼리 비교하면서 좀 떨어지는 아이를 서슴없이 질책한다.

 

"너는 왜 언니처럼 못하니." "네 동생의 반이라도 닮아봐라." "형이 돼서 만날 그 모양이냐." 등등의 말로 어린 싹을 싹둑 잘라버린다. 자녀가 많지 않은 요즘에는 '엄친아' '엄친딸'과 비교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 아이가 받을 상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책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교를 당하는 아이가 부모의 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더 노력하길 기대할테지만 그것은 아이의 마음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런 아이 중에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 분발하고 노력하기보다 마음속 상처에 매몰되어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부모의 말처럼 언니나 형보다, 또는 다른 형제만큼이라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부모의 잦은 비교는 이내 아이를 지치게 하고 자존심을 잃고 좌절하게 한다. 결국에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았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고 무기력한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 아이를 치료해서 원상태로 돌리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부모는 비교하면서 채찍질하던 그때보다 더 큰 상실감을 안고 아이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아이는 일어설 수 없는 좌절의 늪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개별적인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식마다 다른 품성과 그릇으로 존재한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할 뿐이다.

 

부모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은근히 비교하면서 아이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아이는 격려와 칭찬을 받을 때는 더 잘하려고 애쓰고 자신감을 얻지만 비난이나 비교당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쉽게 포기해버리고 더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비교를 하더라도 열등한 아이에게 '너는 다른 사람보다 이런 것을 잘 하니까 열심히 하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와 같이 우등한 비교를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문제아의 절반은 줄어들 것이다. 열등한 비교를 해서 아이가 바뀐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보다는 거칠고 나쁜 방향으로 바뀌게 될 뿐 부모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뀌기는 힘들다.

 

실제로 부모의 비교 때문에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아이도 있었다. 매춘과의 전쟁 선포로 유명했던 한남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객원교수 김강자 씨가 종암경찰서장 시절에 만난 S양은 아버지가 개업의이고, 어머니는 유치원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S양과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언니와 오빠는 일류대를 다녔는데 S양은 어릴 때부터 줄곧 똑똑한 언니, 오빠와 비교당하며 자라왔다.

 

S양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받은 성적 때문에 본격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 성적을 보고 아버지는 "어쩌다가 우리 집에 너 같은 아이가 생겼냐? 네 언니, 오빠만큼만 해라. 그럼 내가 업고 다니겠다." 라는 말을 했고 S양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중의 한 남자아이와 성관계를 맺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간 S양은 예상대로 집 안에 갇혔고, 설상가상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임신의 두려움 때문에 다시 가출해서 그 남자아이를 찾아갔지만 남자아이는 자신이 아기의 아빠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며 발뺌했다.

 

S양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 모르게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고 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흥 업소를 찾아갔다. 그 업소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유흥가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들은 밤마다 늦게 들어오는 S양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춤추고 노래만 하던 S양은 처음 화대를 받고 속칭 2차라는 것을 나간 날 아예 집을 나와버렸다.

 

룸살롱과 단란주점을 전전하던 S양은 경찰의 일제 단속에 걸려 김강자 서장에게 붙들려 왔다. S양은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가족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김 서장은 부모에게 연락해 데리고 가도록 했다. 김 서장은 부모가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해 부모에게 모든 사실을 다 말했지만, 딸이 임신중절한 것을 안 아버지가 S양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고 S양은 그 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처음엔 부모도 그저 자극을 주려고 비교를 하기 시작했겠지만 점점 심해지는 비교는 급기야 자극이 아니라 깊은 칼이 되어 딸의 인생을 깊숙이 찌른 꼴이 되어버렸다. 성경에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 축에 껴들거나 견줄 생각은 하지 말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이 할 일의 범위는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니라 신이 정하는 것이고 우린 그 범위 안에서 행하는 것뿐이라는 의미다.

 

부모가 자꾸 비교하기 시작하면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기 시작한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이 어리석은 어른들처럼 우열의 잣대로 평가를 내린다는 게 무섭고 슬프게 다가온다.

 

유대인들은 아이에게 남보다 우월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남과 다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비교하는 대신 각자 다른 개성을 인정하고 길을 터주는 부모가 아이를 큰 사람으로 만든다.

 

차이는 증오를 낳는다_ 니체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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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1. 13:35

 

부모의 권위는 소리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뢰감을 자녀에게 확실히 심어줄 때 생긴다. 자녀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부모도 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아이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기준이 되는 사람의 서로 다른 말과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 행동할 것인가는 아이에게 너무 난해한 문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부모의 언행불일치는 곧바로 불신과 저항으로 이어진다.

 

부모의 권위는 소리침으로써 생기는 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뢰감을 자녀에게 확실히 심어줄 때 생긴다. 말이 많은 부모는 그 말들 중 대부분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로 자녀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고, 부모도 제시한 것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가 동영상 전쟁이다. 성에 눈을 뜬 아이들은 부모 몰래 또래끼리 포르노 동영상 같은 것을 구해서 보곤 한다. 아이가 늘 어린애인 줄만 알고 있다가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 부모는 당황하게 되고 일단은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공부나 할 일이지, 이런 것은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되는 건데 왜 보고 그래! 다신 보지 마!" 하고선 아이를 무안하게 만든 다음 휙 방으로 사라진다.

 

영화 <아메리칸 파이>를 보면 성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너한테 실망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빠도 너만 할 때 그랬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을 마치 아이들이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대하는 데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요즈음 아이들은 정신적인 성장보다 육체적인 성장이 훨씬 빠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대중화 등으로 인해 포르노 영상물을 쉽게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무조건 쉬쉬하면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성교육도 문제지만 일단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의 부모의 행동 또한 반성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환경을 자녀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녀의 행동이 걱정된다면 부모가 그런 것을 곁에 두지 않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너는 보면 안 돼, 나는 너 몰래 볼 거야.'라는 식의 태도는 몰래 보면 된다는 잘못된 기준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그 일을 계기로 부모가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는 불신을 가지게 한다. 그 이후로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자녀는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된다. 자녀에게 무조건 하지 말라고 말하기 이전에 부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행동을 학습하게 되어 규칙과 규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사람과의 약속도 잘 지키지 않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점차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잃는다. 그러면서 성취동기가 매우 낮아지고 매사에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거나 비도덕적 양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 자녀로 키우고 싶지 않다면 아이 앞에서는 말조심하자. 특히 행동은 더 조심해야 한다.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진지하게 그렇게 하고자 할 때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_ 카알 힐티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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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1. 13:11

 

뭐든지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과도한 기대를 자녀에게 품지만 그것은 대리만족일 뿐이다. 아이에게 자꾸만 잔소리하고 완벽하기를 강요하지 말라. 자녀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슈퍼맨은 아니다. 부모도 슈퍼맨이 아니다.

 

우리는 평소 '완벽'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 만큼 완벽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부모가 되면 자녀에게 완벽하기를 강요한다. 뭐든지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과도한 기대를 자녀에게 품지만 그것은 대리만족일 뿐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이 대신 이루게 하고 싶은데 자신의 시행착오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꾸만 잔소리하고 완벽하기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C양은 자식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부모에게 흡족한 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완벽'이라는 틀에 가두고 무엇이든지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시작했다. C양은 중학교 때까지는 1등을 놓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잘하는 아이로 손꼽혔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 자기보다 더 잘하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C양은 공부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아이보다 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늘 이겨야 한다는 긴장감을 극복하지 못해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성적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모든 것에 무기력해지고 나서야 C양은 상담실을 찾았다. C양은 부모와 더불어 완벽한 것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건강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오래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양파'라는 예명의 여고생 가수가 있었다. 수능시험 당일에도 각 방송국의 연예 프로그램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시험 도중 위경련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갔고 그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항상 1등을 한다는 사실에 이목이 집중되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괴롭힌 탓이었다.

 

완벽을 추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항상 아름답다. 그러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완벽을 기하다 보면 정작 필요한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고 만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옥석을 가리는 혜안과 함께 대소의 비중을 가늠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자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슈퍼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슈퍼맨이 아니다. 완벽을 지향하는 지나친 간섭과 압력보다는 애정 어린 보살핌이 아이에게 더 효과적이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거나 내버려두는 것은 피해야 할 교육법이다_ 루소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21. 12:57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는 의외로 많다. 그들은 아이를 낳기만 했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과잉보호나 자유방임도 문제지만 아이를 가장 황폐하게 만드는 부모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한 부모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는 의외로 많다. 부모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얻게 된 사람, 또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유형이다.

 

그들은 아이를 낳기만 했을 뿐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어 '부모'라고 부르기에도 안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라는 말로써 자식이 어떻게 자라든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출을 하건 비행에 가담을 하건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철저히 자녀를 방치한다. 이런 부모에게서 자라는 아이일수록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비행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왜 나를 낳았냐는 말로 반항하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영영 나쁜 길로 빠져 버리고 만다.

 

부모의 무관심은 아이의 가슴에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내며, 이 상처가 깊을수록 원망도 깊어 아이에게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자랄수록 상처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커진다면 아이는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기생하는 독버섯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L군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술로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음주와 폭언이 가정을 뒤덮고 있었고 그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에 묶여 한지붕 아래서 같이 살 뿐 '가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군의 삶에 부모는 중요한 존재로 내면화되어 있지 않았다. 삶의 기준이 되고 지도가 되어줄 부모가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의 외로움은 분노로 변하고, 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L군은 소년부 법정에서 1호 자원보호처분을 받고 전문 상담사에겟 맡겨졌지만, 폭력을 부른 근본적인 문제는 가정에 있었고, 그것을 해결해 줄 부모가 L군에게는 없었다는 게 상담의 큰 한계로 작용했다.

 

과잉보호나 자유방임도 문제지만 아이를 가장 황폐하게 만드는 유형의 부모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한 부모다.

 

사랑에는 사람의 개성 전체를 꽃피우게 하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른 것들은 그 일을 할 수 없다_ 투르게네프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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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1. 12:45

 

이런 부모는 아이를 방목하듯 키우는 것이 아이가 기죽지 않고 크는 비결이라는 왜곡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는 아이의 제멋대로인 성향 때문에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자기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게 된다.

 

지하철을 타면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가 한두 명은 꼭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런 아이를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고 있는 엄마가 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아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그럴 때 그 엄마의 얼굴이 얼마나 뻔뻔해 보이는지 모른다. 아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는 불편을 알 만한데도 모른 척하는 부모가 많다. 혹여 옆 사람이 한마디라도 하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부모는 아이를 어럽게 낳아서 기르는 사람이거나 부모로서의 자세를 채 갖추지 못한 젊은 부부인 경우가 많다. 자식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절도 있는 행동의 지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아이가 하는 대로 마냥 내버려둔 채 방목한다.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이 충고라도 하면 '내 아이 내 방식대로 키우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응하거나 '아이니까 그러지.' 라는 식으로 대충 넘기고 만다.

 

이런 부모는 자식을 방목하듯 키우는 것이 아이가 기죽지 않고 크는 비결이라는 왜곡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방임과 묵과 아래 크는 아이들은 행동에 절제가 없고 예의도 부족하며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훈련되지 않았으므로 집안에서도 당연히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어 부모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이는 물론 전적으로 부모의 탓이다. 나중에는 아이의 제멋대로인 성향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지만 그때 이미 늦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에서나 성인이 되어서도 나보다는 타인이 먼저 다가와야 겨우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나서서 관계를 열어가는 인격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조직생활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개는 자기밖에 모르는 독불장군으로 지내다가 그나마 형성된 인간관계도 유지하기 어려워 외톨이가 되고 만다.

 

중학교 3학년인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결혼 후 10여 년 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써 겨우 얻은 귀한 딸이었다. 어렵게 얻은 딸은 5살 때 심장병 수술까지 받았고 항상 몸이 약해 엄마를 걱정시켰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아무리 버릇없는 행동을 해도 그것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야단을 치면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는 친구를 사귀는 데도 미숙함을 보이고 자기 고집대로만 행동하다가 결국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친구 없이 혼자 지내던 딸아이는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가 없어 운동장을 배회한다고 했다. 이러한 딸이 안타까워 엄마가 딸을 데리고 상담실을 찾아온 것이다.

 

아직 늦지 않은 시기이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법을 먼저 배운다면 좋아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부모가 미처 세상과 화합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그런 귀하디 귀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을 함께 이루어나간다는 사실을 부모가 먼저 깨닫고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녀를 키우는 태도가 필요하다.

 

만일 누군가가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증명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내 생각과 행동을 고치리라_ 아우렐리우스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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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1. 12:33

가족이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서로 표현하지 못하는 관계가 된다면 남은 건 가족의 해체뿐이다. 독재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의 공격적 성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삶의 기술이라고는 반항밖에 없어 수많은 불행이 찾아온다.

 

독재자로 군림하는 부모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제도 속에서 남자의 권위를 세워주는 풍습을 오랫동안 유지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마치 한 왕국의 전제군주처럼 가정을 다스리려고 한다. 아내와 자식 모두 자신에게 순종적이어야 하며, 만약 자신의 말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간주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다.

 

이런 가정에서는 서로의 영혼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애정 기류가 형성되기 힘들다. 다만 군주의 엄격한 명령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부하의 절대복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족은 상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가장 1차적인 사회집단이라고 하지만 일반 사회집단에서 찾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이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아이가 세상의 거친 바람 속에서 용기를 잃고 방황할 때 안아줄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밖에 없다. 그리해야 할 가족이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서로 표현하지 못하는 관계가 된다면 결국 남은 건 가족의 해체뿐이다.

 

"아버지가 시키면 우린 한다."라고 말하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과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할까? 물론 아니다. 극약처방은 한두 번은 통해도 자주 처방하면 만성중독이 되어 서로 피곤해질 따름이다. 독재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의 공격적 성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때리면 때릴수록 탄력이 붙어 더 높이 튀어 오르는 공처럼 점점 거칠게 변해간다. 게다가 삶의 기술이라고는 반항밖에 없으므로 예기치 않은 불행이 많이 찾아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샤인>의 주인공을 잠시 떠올려 보자.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던 호주의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때문에 철저하게 삶이 파괴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유대인이었다. 데이비드의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못하게 한 것이 한이 되어 아들 데이비드를 피아니스트로 대성시키고자 했다. 어린 데이비드는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미국 최고의 음악 학교에서 유학 초청장을 받았지만 떠나지 못했다. 부모 형제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일념 하나로 데이비드의 유학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자신이 원한 음악적 성공이었지만 자신의 아집 때문에 자식의 장래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한 번 유학의 꿈이 꺾였지만 또 한 번의 영국 유학 제의가 들어오자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학의 길에 오른다. 런던 왕립학교에서 천재적 광기를 발산하면서 음악적 재능을 선보인 그는, 메이저 콘서트에서 악마의 교향곡이라 불리는 라흐마니호프 3번 피아노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음악적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그럴수록 더욱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0년이라는 세월을 격리당한 채 모든 노력과 재능이 산산이 부서진다. 나중에 연인 길리언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정신세계의 균형을 회복하고 자신을 속박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지만, 그를 구속했던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더 훌륭한 연주가로 성장했을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데이비드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독재적이었고, 이로 인해 가족과 단절된 데이비드를 방황하게 만든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적절할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평화롭게 유지되는 법이다.

 

부모의 위신은 약한 수준의 통제와 폭력에도 훼손된다_ 비고스키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5. 12. 21. 11:40

 

부모가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아이를 지나치게 과잉보호하게 되면, 물을 너무 많이 먹어 뿌리부터 썩는 나무처럼 이파리가 하나둘씩 떨어져 결국은 쓰러지고 만다. 부모의 적절한 보호가 아이를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부모는 손이 귀한 집에서 아이를 어럽게 얻었을 경우 등에 나타난다. 아들이 몇 대 독자라든가, 무남독녀 외딸이라든가, 딸만 내리 낳아 구박을 받다가 마침내 아들을 낳은 경우 등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부모와 아이는 필요 이상의 정신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과잉보호는 부모가 아이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다.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노심초사하고 자식이 하는 모든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가 내려야 할 결정을 부모가 대신한다.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인 양 품안에 싸서 키운다. 이 때문에 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늘 부모가 대신 결정을 해주어야 하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어떤 어머니는 시아버지와 함께 먹는 식탁에서조차 스무 살이 넘은 아들의 밥 위에 일일이 반찬을 얹어주기까지 한다. 이런 경우 아이가 스무 살이 아니라 서른 살이 되어도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 소위 마마보이는 이렇게 탄생한다. 결혼을 해서도 아내와 상의해서 한 가정을 꾸려나기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더 많이 상의하고 무엇이든지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순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은 다반사고, 일이 조금만 어려워도 헤쳐 나가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려 하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진아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즈음은 한 가정에 한두 명의 자녀만 낳다 보니 부모가 본의 아니게 과잉보호를 하게 되어 유약한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필자가 상담했던 P군은 중학교 때부터 소위 왕따를 당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해 대학생활에 많은 난관이 있었다. 거의 전 과목에서 낙제를 했고, 결국 재수의 길을 택하면서 상담실을 찾아왔다. 어린 시절 P군을 한 번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P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보고하게 했고, P군이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들을 철저히 보호해 왔다. 어렸을 때 아이를 잃어버린 기억이 자꾸 떠올라 아이를 다시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P군은 친구들이 어디를 가자고 해도, 무엇을 함께 하자고 해도 부모의 통제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결국 또래집단에서 어울리며 형성해야 할 관계들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격리되면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부모의 지나친 보호는 간섭의 형태로 드러난다. 엄마가 대학생인 자녀의 토익 학원을 골라주는가 하면, 아이의 출석 상황에 대해 학원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점검한다. 이뿐만 아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낮게 나온 이유를 따지기도 하고, 앞으로 로스쿨을 갈 건데 무슨 과목을 들어야 하냐고 묻기도 한다. 한 번은 강의실에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어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아파서 대리 출석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가 늘 지금처럼 곁에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부모는 마치 현재가 영원한 것처럼 자녀를 자기의 품 안에서만 기르려고 한다. 아이를 지나치게 과잉보호하게 되면 물을 너무 많이 먹어 뿌리부터 썩는 나무처럼 이파리가 하나둘씩 떨어져 쓰러지게 마련이다. 비바람과 가뭄을 견뎌내는 나무가 튼튼하게 잘 자라는 것처럼 부모의 적절한 보호가 아이를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할 수 있다.

 

당신이 인생의 전부라고 이해했던 무언가를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배움이다_ 도리스 레싱

 

지혜로운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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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5. 12. 21.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