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1년에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그후 2년간 연수생활을 거쳤다. 1992년에는 사법연수원 내에서 다양한 실무교육을 받았고 1993년에는 법원, 검찰청,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정 기간 수습 과정을 거쳤다.

당시 나는 연수과정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모두 공무원 출신이었기에 공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두 분이 항상 입버릇처럼 "우성이는 반드시 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사회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는 검사의 모습을 동경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1993년 1월부터 4월 말까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판사시보 생활을 마친 나는 1993년 5월부터 8월까지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시보 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지방검찰청에 출근하는 첫날 나는 앞으로 내가 몸담을 검찰에서의 생활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다는 설렘에 무척이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검사실에서 내가 할 일은 피의자들을 앞에 두고 경찰에서의 진술과정을 재확인한 다음 빠진 부분을 보완하여 수사기록을 완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사람은 이런 죄를 지은 것이 확실하니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검사시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므로 복잡한 사건보다 피의자가 이미 경찰에서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한 사건이나 피해가 크지 않은 사건들을 주로 배당받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사하는 과정에 큰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내가 검찰청에서 처음으로 배당받은 사건은 속히 '아리랑치기(절도죄)' 사건이었다.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아리랑치기라고 한다. 참고로 술에 취한 사람이 정신이 차리는 것을 보고 폭력을 행사하면 그때부터는 속칭 '퍽치기(강도죄)'가 성립된다.

 

'대학생인 김00은 1993년 4월 00일 23시 30분경 부산 북구 만덕동 000 주변에서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피해자 최00 의 양복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 5만 원을 절취했다'는 것이 범죄사실의 요지였다.

김 군은 범행 직후 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방범대원에게 적발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미 경찰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김 군에게서 범죄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들은 뒤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김 군의 사정이 참으로 딱했다.

 

김 군의 어머니는 신장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꽤 많은 수술비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밖에 없어서 현재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기에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날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발견하고 됐고 그 피해자가 몸을 뒤척일 때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한 것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일단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을 정리한 뒤 김 군의 딱한 사정을 상세하게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했다. 그리고 김 군이 현재 대학교에서 장학생이며 학교에서 봉사상을 받은 내역도 알아내어 피의자신문조서 내용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작성한 조서를 검사님께 보여드렸더니 검사님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 시보님, 이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 아랫부분은 전혀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모두 지우세요." 라고 말했다.

 

사실 검사님의 말이 옳았다. 형사 사법 시스템의 구성요소인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검사는 범죄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입증을 해야 하고 변호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정상참작 사유를 최대한 주장해야 하며,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검사의 입장에 있으면서 변호사로서의 주장을 한 셈이었다. 겸연쩍은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멀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사건을 맡았다. '직장인 박00는 1993년 4월 00일 21시 45분경 부산 중구 남포동 000번지 소재 포장마차에서 옆자리에 있던 피해자 길00(17세, 고등학생)와 시비를 가리던 중 격분하여 피해자를 주먹으로 가격하여 안면부 타박상 등 전치 3주에 이르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이 범죄 사실의 요지였다.

멀쩡한 직장인이 무슨 이유로 고등학생을 때렸을까. 솔직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박 씨에게 피의자를 폭행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물었다.

 

그날 박 씨는 친구와 같이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옆자리에서 아주 시끄럽게 떠들며 담배를 피고 있던 길 군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장교 출신인 박 씨는 고등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모습이 심히 거슬렸다.

그는 점잖게 "어이, 학생들. 좀 조용히 하지?"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길 군이 "거참, 제기랄. 아저씨는 아저씨 일에나 신경 쓰쇼!" 라면서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반응에 화가 난 박 씨는 벌떡 일어서며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학생 아냐?" 라고 소리쳤고, 길 군은 "학생이든 뭐든, 당신이 연필 한 자루라도 사줘봤어?" 라면서 대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밀치며 몸싸움을 하다 박 씨가 날린 주먹이 길 군의 뺨을 강타하고 말았다.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마 그 상황에 처했다면 나도 박 씨와 비슷하게 행동했으리라. 나는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범죄사실을 간단히 서술한 다음 당시 왜 박 씨가 길 군을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써내려갔다. 울분에 찬 눈빛으로 피의자신문조서의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나에게 검사님은 다시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허허, 조 시보님. 그럼 조 시보님 의견은 피의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겁니까? 검사가 그런 온정적인 입장을 취하면 도대체 법질서는 누가 지킵니까? 이 아랫부분은 피의자신문조서에서는 전혀 필요없는 부분이니 싹 지우십시오."

 

그렇게 나의 검사시보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나는 검사란 직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동기들 중에는 피의자가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그건 당신 사정이고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그 사정은 변호인에게 이야기하세요." 라면서 어렵지 않게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피의자의 범죄행위와 그 사람이 처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결국 4개월간의 검사시보 생활을 마치면서 내린 결론은 나의 진로가 검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성격을 갖고 검사로서 일을 한다면 나도 힘들 것이고, 조직에도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변호사의 길을 택했고 수습생활을 했던 법무법인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도울 우 祐' , '정성 성 誠' 으로 지어주시면서 당신 손주가 평생 남들을 돕는 마음으로 살 것을 바라셨다고 한다. 결국 이름을 따라가게 된 건지 변호사로서 보낸 지난 17년을 돌아봤을 때 내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점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을 고를 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게 되지만 부모님의 기대나 주위의 고려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검사가 아닌 변호사로 진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만약 내가 검사시보로서 수습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별다른 고민없이 부모님의 기대를 좇아 검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상당한 심적 고통이 따랐으리라. 직업을 선택할 때 적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이젠 너무 흔한 충고가 되어버렸지만 나로서는 수습 경험을 통한 적성의 발견이 인생의 큰 줄기를 바꿔놓았기에 이 말에 뼈저리게 공감한다.

 

모든 이에겐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으며 이를 거스르며 살다보면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는 법이다. 내게 맞는 운명의 옷을 입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이치가 아닐까.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_ 조우성 변호사

by 미스터신 2023. 9. 24. 20:30

사실 나는 운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 조금 민망할 정도로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운이 없다 정도를 떠나 운이 나빴던 경우가 더 많았다. 20~30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학, 취업, 결혼, 모두 남보다 늦었거나, 아직 하지 못했다.

 

공부를 못했던 내가 갈 수 있는 4년제 대학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2년제 전문대에 입학했고, 군대를 제대한 스물네 살에 다시 수능을 쳐 지방 사립대에 입학했다. 취업은 빨랐을까? 나는 세 번의 인턴십과 한 번의 계약직 일을 하는 1년 반의 시간을 거쳐 겨우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이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한 가지 '관점'과 한 가지 '판단'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한 가지 '관점'은 긍정과 부정 중 긍정을 선택하는 것이었고, 한 가지 '판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평생을 따라다닌 외모 콤플렉스도 극복했고 학벌 콤플렉스도 극복했다. 하지만 내 삶의 진짜 불운은 따로 있었다.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판단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불행할 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가족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 아버지는 괜찮은 대기업에 다니다가 마흔 살의 젊은 나이에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 후 할 일이 없어 몇 년을 그냥 놀다가 집에 돈이 떨어질 때쯤 할 수 없이 택시기사가 되었다. 한 달에 200만 원 정도의 돈을 벌기 위해 하루에 무려 열다섯 시간씩 운전했다. 2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해온 아버지에게 택시는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흥이나 취미가 아니었고, 말 그대로 생존의 수단이었다.

 

나의 유일한 형제인 형은 10년 넘게 우울증을 앓았고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을 바라본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어머니 또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불행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비극이었고, 결국 나 또한 그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게 됐다.

 

어두운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온갖 안 좋은 생각을 했다. 자살자의 유족은 일반인 대비 자살 위험이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실제 미국의사협회 학술지인 <정신의학>에 발표된 연구 결과가 있다. 피츠버그대학교 메디컬센터에서 우울증 등의 기분장애를 앓은 부모 334명과 그들의 자녀 700여 명을 조사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부모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는 경우 그 자녀가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없는 부모의 자녀에 비해 다섯 배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한마디로 부모의 자살 시도는 자녀의 자살에도 강력한 방아쇠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 역시 겁이 났다. 형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엄마가 같은 아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지독하고 끈질기게 엄마와 형을 괴롭혔던 우울이라는 놈이 나에게도 들러붙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이쯤 되면 불행의 늪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울증은 대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 기인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무기력해지고 병은 점점 더 깊어진다. 너무 깊은 고통이었기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지만, 그런데도 나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이 병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매일, 매 순간 고민했다. 그러자 조금씩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우울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연히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진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선 우리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걸 깨달았다. 긍정의 시야를 가지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의 우울증과 엄마의 죽음은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불행을 인정한 나는 나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부정의 늪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다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판단했다. 직업 특성상 불안정한 수입을 안정화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음의 불안과 우울에 갇히지 않도록 몰입할 대상을 찾는 일도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움직여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을 가장 경계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든 상황이 그대로면 우울증이라는 늪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약도 먹고, 심리 상담도 받았다. 그간은 집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일하기로 했고 매일매일 햇볕을 쬐며 산책을 했다.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무엇보다 완전히 새로운 일인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해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차도 바꿨고 집도 이사하기 위해 부동산에 문의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시간, 장소, 사람 등 무엇이든 다 바꿨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조차 이렇게 노력하는 환자는 처음봤다고 할 정도였지만, 그 정도로 나는 간절했지만,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울증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일 뿐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결국 이런 꾸준한 노력이 나를 조금씩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고,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도 조금 알게 되었다.

 

우울증의 바다에 처음 빠져본 나는 깜짝 놀라 허우적대기만 했다. 헤엄을 칠 줄 몰랐기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어떻게든 살려고 허우적댔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울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 우울증이 생겼다는 것은 대부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나처럼 비극적인 상황까지는 아닐지라도,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등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에 빠지다 보면 우울증이라는 놈이 파고들어 와 약해진 마음에 똬리를 트는 것이다.

 

이처럼 큰 불행이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쉽게 해결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상황과 감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지점까지는 함께 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뚝뚝 흐르던 피가 멎고, 딱지가 앉고,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희미해질 때까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인정하기 싫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무리하게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만큼 몸은 더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우울한 감정과 나의 불행을 받아들이면 조금씩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은 내버려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악착같이 찾아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몸에 힘을 빼고 차분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어느 순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물 위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살면서 힘든 일에 부딪힌다. 어렵게 꺼낸 내 이야기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긍정하고, 아니 긍정할 수 없을 땐 인정이라도 하고, 그 후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운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기에 너무 힘든 순간이란 걸 나는 잘 안다. 그렇기에 당신에게도 최악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런 노력을 할 수 있길, 어떤 순간에도 용기를 잃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럭키_ 김도윤

by 미스터신 2022. 7. 30. 18:49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은 대부분 강력계 형사이다. 일단 현장에서 범죄자를 추적하고 검거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극적이고 역동적인 영상을 담아내기에 좋다. 하지만 경찰이 하는 일은 의외로 많고, 또 다양한 분야가 있다. 사회의 일반 직업인이 가진 적성을 모두 반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분명 자기 성향에 맞는 부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경찰이 되겠다고 마음먹었거나 이미 준비하고 있더라도 자기 적성에 대해서는 꼭 한번 되짚어야 한다. 경찰시험에 합격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기 적성 찾기'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자신 같지만, 요즘 청년들은 학창 시절부터 학원공부, 시험공부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빼앗겨 정작 자기 적성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모른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경찰 업무 분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자

 

사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나는 경찰이야말로 자기 적성을 제대로 찾고 그 안에서 꿈과 열정을 가져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편한 공무원 생활과 안정적인 연금'을 바라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경찰공무원이 되어서까지 꿈과 열정을 가져야 하나?'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형사의 일은 범인을 잡아서 국민을 위한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곳도 결국에는 똑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그런 점에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자기 적성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적성을 위해서 가장 넓은 범주에서 '내근직' 이냐, '외근직' 이냐를 따져야 한다. 활발한 활동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은 사무실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몸이 근질거린다. 이런 경우에는 수사를 하거나 단속을 하는 외근직을 지원하면 좋다. 반대로 차분하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연 내근직일 것이다.

 

수사를 하는 형사라고 해서 무조건 몸으로만 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사실 형사는 치열한 두뇌 싸움에 능해야 한다. 그래서 머리 쓰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형사가 적성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남을 도우며 보살피는 일을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여성청소년계가 맞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아동, 여성, 미성년자를 조사하고 그들의 피해를 복구해 보듬어주는 일을 한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경찰 업무 중에 '경무계'라는 곳이 있다. 경찰활동을 홍보하고 이외에 재무, 기획, 인사, 교육, 행정 지원등을 한다. 꼼꼼하고 차분하게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경무계 업무를 추천한다. 적극적인 치안을 가능하게 하는 배후의 업무를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행사도 기획하기 때문에 행사 진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정보에 관심이 많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호기심이 있다면 정보과도 추천할 만하다. 과거에는 '사찰'이라는 불명예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부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보과에서 하는 일은 기자와 매우 비슷하다. 각종 단체와 기관 등의 사람들과 만나서 정보를 듣고 수집한다. 기자는 그 결과를 기사라는 형식으로 회사에 보내지만, 정보과 형사는 그 내용에 따라 정보, 견문, 범죄, 첩보 보고서라는 형식으로 상부에 보고한다.

 

외사과에서는 외국인을 많이 만나고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를 다룬다. 외국 문화나 외국인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적성에 맞는 업무일 것이다. 혹시 은퇴 후에 외국 이민이라도 갈 생각이라면, 현직에 있을 때 외사과에 근무하면서 해당 국가의 언어도 배우고 인맥도 쌓을 수 있다.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다면 보이스피싱팀에서 근무하는 것은 어떨까. 보이스피싱은 오로지 말로써 사람의 심리를 좌우하여 돈을 갈취하는 범죄이다. 날로 발전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을 파헤치고 범인을 검거하면서 사람의 심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을 정말로 '빡세지만 멋지게'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경찰특공대도 있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몸은 힘들어도 정말로 보람찬 생활을 할 수 있다. 폭발물을 해체하고 테러가 예상될 때 출동한다. 대통령이 특정 지역으로 이동할 때 보이지 않게 경호를 하기도 한다.

 

매일 꿈을 이뤄가는 경찰 생활

 

그런데 이렇게 적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머리로 자기 적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내가 과연 무엇을 잘할까?' 라고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실제 '체감'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체감이란 말 그대로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현장에 있는 내 생각, 마음, 감각이 하나가 되어 내가 진심으로 느끼는 일이다. 범인을 쫓을 때, 검거를 할 때, 주취자를 대할 때.....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진심으로 내가 나와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멋지게 포장되는 모습이 아니라, 현장에서 진짜 살아 있는 자신을 느껴봐야 한다.

 

아직 현장 경험을 많이 할 수 없다면 선배들과의 친분을 쌓아 간접경험이라도 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스스로 절실하게 적성을 찾고 그에 맞는 일을 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을 그만두는 상황도 생긴다. 어렵고 힘들게 시험 봐서 들어온 경찰을 왜 그만두느냐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이 왕왕 있다. 특히 일선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 술에 만취한 주취자를 대하는 일이 정말 힘들다고 하는 후배도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합리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을 설득하고 조사하려면 극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인다. 이런 현장 스트레스를 스스로 겪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적성에 달려 있다.

 

이렇게 자기 적성을 찾고, 승진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일은 경찰 생활에서 더 강한 열정을 가지도록 자극한다. '나도 언젠가는 수사팀을 지휘하는 형사과장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목표 설정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때로는 힘들기도 한 경찰 생활을 사회에 대한 정의감과 범죄자에 대한 분노만으로 버텨나갈 수는 없다. 사회를 위한 희생정신도 필요하겠지만, 스스로 성장하고 있으며 자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내적 자신감이 없다면 지속하기 어려운 생활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구체적인 적성을 찾고 꿈과 열정을 발휘한다면 경찰이라는 직업은 은퇴하는 그날까지 훌륭한 자기 성장의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경찰_ 이대우

by 미스터신 2021. 11. 28. 09:40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군 제대, 운전기사 3개월 후 때려치움, 염색 공장 영업사원 1개월 후 때려치움, 과일 노점상 1개월 후 때려치움... 이 삶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경찰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금도 경찰을 천직으로 안다니, 어쩌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불타는 정의감으로 경찰을 꿈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우연한 기회에 경찰이 되었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내 천직이 되었다. 당신은 어떤가? 경찰이 자기 천직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다. 지금 어떤 직업을 가질지 몹시 방황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으로 생활하다 보면 결국 자기 천직이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딱히 자랑할 것 없는 내 과거를 얘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도대체 뭐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내가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 육지의 끝, 강진의 해안가 시골이다. 당시에 시골에서 부유하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모님은 추운 겨울을 바닷물에 손을 담근 채 김을 뜯어내어 말린 다음 시장에 내다 팔거나, 논밭을 일구어 생산한 곡물을 수매하여 일곱 남매를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셨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조금이라도 그 고생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굳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강했고, 국비로 학교에 다니면 그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광주에 있는 광주기계공고 기계과를 지원해 합격했고, 3년간 혼자 자취방을 얻어 학교에 다녔다. 기술도 배우고 국가기술자격증도 땄지만, 막상 졸업할 즈음이 되니 이렇게 해서는 평생 기름 묻은 작업복 인생을 면할 수 없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 처음으로 실업계를 선택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어쩌랴, 지난 3년의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빨리 가자는 생각으로 입대를 선택했다. 그래도 군대 생활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고 약간 내성적인 나의 성격도 고치고 싶어서 특전사에 지원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위험한 군 생활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작은 아버지가 특수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특전사가 아닌 의무경찰로 군 생활을 마치게 됐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는 날이면 화염병과 짱돌을 피해 그들을 해산하거나, 시위가 없을 때는 관할 경찰서의 파출소나 우범지역에서 방범 순찰 활동을 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끝냈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에 갈 처지가 되지 못했다. 나중에 형사로 생활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를 졸업하기는 했는데, 당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아, 도대체 뭘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까!"

지금도 많은 청년이 이런 고민을 하지만, 나 역시 이런 고민 속에서 한숨을 쉬며 살던 때가 있었다.

 

무한 질주를 위한 마음속 에너지

 

그러던 중에 한 지인이 "정식 직업을 구하기 전에 개인 사업을 하는 사장님의 외제 차 운전기사나 하면 우선 어떻겠냐?"라고 제안했다. 나도 노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사장의 개인 운전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사장은 레커차 운전면허도 없는 나에게 '레커차를 타고 사고 현장에 가서 고장 난 차를 공업사로 끌어오면 수당을 주겠다'라며 부당한 일을 강요하기도 했고, 연예인들을 만나서 돈을 펑펑 쓰기도 했다. 천성이 누군가에게 굽신거리며 살기가 힘들어 결국 그 일은 3개월만에 끝냈다. 이후에 경기도 포천의 염색 공장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작은 의류 회사와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물량을 수주하는 일을 했지만, 역시 그에 대한 지식도 없고 적성에도 맞자 않아 1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또 한번은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지인의 치킨집 앞에서 과일 노점상을 했는데 역시나 그것마저 내게는 흥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일 저 일 모두 안되었기에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경찰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의무경찰로 지내면서 경찰을 가까이에서 봐왔고, 형사기동대 차량과 형사계장의 차량도 몰면서 형사들에 대해 잘 알게 됐을뿐더러 범죄 현장에 자주 가보게 됐다. 결국 경찰이 돼야겠다는 생각에 시험을 준비하다가 형사기동대 무도경찰 공채시험이 있다는 공고를 보고서 응시해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여러 직업을 돌아서 스물세 살에 운명처럼 경찰관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꿈꿔오던 직업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나처럼 운명처럼 직업을 찾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처럼' 다가올 수는 있어도 애초에 나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생활 속에서도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적성과 자질을 잊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천직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목표를 세우고 끝없이 질주하려는 마음의 에너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경찰을 목표로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도, 이미 경찰관이 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경찰에 임용됐다고 해서 자기 앞에 아우토반 같은 장밋빛 대로가 열리지는 않는다. 매번 다시 시작이고, 새롭게 가야 하는 길이다.

 

누구나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은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찾아가며 한다. 그럴 때는 슬슬 놀면서 일한다고 해도 몇 배의 능률이 오른다. 범죄자를 많이 잡아서 특진한 것은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어서 매번 즐거웠고 그때마다 기운이 솟았다. 그러다 보니 늘 새로운 길이 열렸고, 그 길로 나아가다 보니 바로 오늘의 내가 있었다. 오늘도 미래가 두렵고 자기 천직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지레 포기하는 청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기 적성을 찾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라했던 나의 과거에서 청년들이 배울 수 있는 하나의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경찰_ 이대우

by 미스터신 2021. 10. 30. 18:45

나 자신을 계발하는 것에 돈을 받는 직업

 

누군가 나에게 아나운서로서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뭐냐고 하면 나는 단연 이것을 말하고 싶다. 나 지신을 계발하는 것이 나의 일에 도움이 되는 직업, 그래서 나는 아나운서를 사랑한다.

 

영화를 보는 것, 책을 읽는 것, 인터넷을 서핑하는 것, 드라마를 보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사람들을 만나 대화 나누는 것,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관람하는 것 등등, 이런 모든 활동이 나와 내 방송에 도움이 된다.

 

방송은 기본적으로 사람들과의 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어서, 지금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콘텐츠들을 알아야 한다. 아니,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함께 느끼고 호흡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챙겨본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지금 누구를 선호하고 왜 그러한지 공감하려 애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나도 기본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즐겁다. 즐거우면서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니! 물론 때로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런 문화적 향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직업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의무적으로 공부하듯이 찾아보기도 한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한 문구가 기억나지 않지만 뉘앙스를 최대한 전달해본다. "글쓰기를 못하는 이유는 지식의 빈곤이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글쓰기나 말하기를 잘 못하겠다고 하면, 보통 우리는 글쓰기나 말하기의 기술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인풋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아웃풋이 없다는 신랄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아나운서는 기본적으로 하루에 많은 말과 글을 쏟아내야 하는 직업이다. 라디오에서 청취자 사연을 읽고 멘트를 하거나, 인터뷰에서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서로 나누거나, 아니면 잡지에 글을 싣거나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 말과 글로 내보내야 한다. 이때 만약 채워지는 것이 없다면? 금방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소진되고 말 것이다. 우물에 충분한 물이 있어야, 계속해서 퍼낼 것이 아닌가? 물이 다 떨어져가는 우물에서 쥐어짜내듯 퍼오는 말과 글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수준 이하일 것이다.

 

아나운서들에게 자기계발이란 필수불가결의 것이다. 그래서 늘 멈추지 않고 노력해야하는 직업이다. 이러한 직업적 숙명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만족스럽게 한다. 나의 좌우명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다. 다른 누구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늘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비교한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런데 아나운서는 억지로라도 나를 발전하게 한다. 그리고 심지어 내가 나를 계발하는 그 일에 돈까지 준다. 이렇게 멋진 직업이라니, 가끔 이 부분을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나운서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나운서 절대로 하지마라_ 유지수 백원경 이지민 서연미 채선아

by 미스터신 2021. 10. 9. 21:12

아주 작은 목표부터 시작한다

 

서정진은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방법을 제안했다.

 

"대학 전공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학은 앞으로 살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헤쳐나갈 기본 소양을 배우는 겁니다. 꿈은 변합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전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은 꿔본 적이 없어요. 직장생활을 하다가 회사가 망해서 백수가 되는 바람에 사업을 한 것이니까요. 전 의학, 생명공학 전공자도 아닌데 독학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의사들 앞에서 강의하고 약을 파는 사람이 됐습니다. 제가 바이오 회사 대표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세상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재능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것, 이를 테면 먹는 것이 재능이 되고 '먹방'으로 돈을 번다. 변하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그나마 본전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실패해도 덜 억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은 남들도 좋아할 테니 성공 확률이 낮다. 문제는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을 때다. 그럴 땐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었던 '옛날 사람' 서정진에게서 아날로그적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서정진은 "절박해지라"고 했다. 절박함이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는 것이다.

 

서정진은 외국어 학습을 예로 들었다. "터키어는 우리나라 말과 어순이 같습니다. 터키까지 비행기로 11시간이 걸리는데 직원들에게 기내에서 터키어 단어 50개를 외우라고 하고 공항에 도착하면 웬만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100개, 그리고 일주일에 500개 단어로 늘리면 조금 더 유창해집니다. 일주일 만에 4년 동안 공부한 것만큼 할 수 있게 돼요. 영어는 평생 공부해도 안되는데 일주일 만에 되는 건 당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는 바로 써먹을 일이 없으니 오래 걸리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2년간 있으면서 바이오 사업을 공부했습니다. 허구한 날 이게 무슨 사업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해야 할지 2년을 고민하다 보니 제 방에 전 세계 제약산업 지도가 다 있더라고요.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 노벨상을 받은 석학들하고 이야기했더니 저보고 자기들도 미처 생각 못 했던 걸 당신이 해냈다고 하더군요. 특별할 게 없는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박했던 것밖에 없습니다. 절박한 놈은 아무도 못 이겨요."

 

서정진과 같은 베이비붐세대의 꿈은 매우 단순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들의 부모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진로 고민은 사치였다. 요즘은 꿈이 없으면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기왕이면 크게 꾸라고 한다. 꿈이 꿈을 꾸지 못하게 옭아맨다. 서정진은 "꿈은 얼마든지 바꿔도 된다. 현재 꿈이 무엇인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꿈은 눈사람 같습니다. 처음부터 커다란 눈사람 모양을 만들려면 잘 안돼요. 작은 눈 뭉치를 만들어서 살살 굴려야 합니다. 작은 목표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크게 만드는 겁니다. 될 때까지 해보면 자신감도 점점 붙습니다. 그다음엔 계속 앞으로 가면 됩니다."

 

분위기 싸늘하게 만들기의 달인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뜨거운 박수가 행사장에 가득 찼다.

 

셀트리오니즘. 셀트리온은 어떻게 일하는가_ 전예진

by 미스터신 2021. 5. 28. 14:19

"20만 시간이요."

"네?"

"강수진 씨가 발레 연습한 시간이요. 대충 헤아려도 20만 시간이 훌쩍 넘어갑니다."

 

가까이 지내는 지인이 내게 해준 말이다. 30여 년 동안 발레 연습한 시간을 계산해보니 20만 시간이 넘는다는 것이다. "그런 걸 뭐하러 계산하셨어요" 라며 웃어넘겼지만, 내가 그렇게 발레를 오래 했나 하고 내심 놀랐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20만 시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발레에 매료된 이래 밤새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했던 모나코 유학 시절을 거쳐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입단해서도, 그 안에서 한 단계씩 올라서서도,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이후에도 나는 연습벌레였다.

 

이제는 은퇴를 했지만, 현역 시절엔 "이제 그렇게까지 연습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발레리나는 다른 예술가들보다 생명이 짧다. 몸을 극한으로 사용하는 예술이라, 몸이 조금이라도 노화되면 무대에 설 수 없다. 나이 들수록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몸은 반대로 굳어간다.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발레를 그만두며 아쉬워하는 무용수들도 많다. 마침내 내게 공이 와서 그 공을 딱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옆으로 스쳐 가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나 역시 발레가 매일매일 더 좋은데, 발레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는데, 관객과 더 많이 만나고 싶은데, 서른 초중반에 발레를 그만 두기에는 너무 아쉬었다. 발레를 오래오래 하려면 녹슬어가는 신체에 연습이라는 기름을 발라 젊음을 유지해야 했다. 나이로 인한 주름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크림을 바르듯, 나는 연습이라는 기름으로 신체 노화를 역행하려 했다.

 

그렇게 20만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연습에 매진한 것은 내가 발레를 찬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발레를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발레리나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장이 주는 그 중독적인 맛을 한번 보고 나면, 연습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어제 할 수 없었던 동작이 오늘 더 잘 되고, 어제 이해할 수 없었던 연기의 한 부분이 오늘 물이 오르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루하루 더 발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처럼 몸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연습을 하게 만든 것은 발레를 향한 사랑과 성장의 즐거움이었다. 내게 발레는 끝없는 인생공부이며, 발레 공연에는 내 인생이 담겨 있다. 점프를 한 번 더 해낸 기쁨, 파트너와 한 동작 한 동작 맞춰나간 시간, 낯선 나라에서 현지인 파트너들과 무대에 올라 이루어낸 하모니, 부상으로 인한 뼈가 깎이는 고통, 남편을 향한 사랑이 발레에 녹아 꽃으로 피어올랐다.

 

나에게 발레는 거대한 세상이고 사랑이다. 누구든 사랑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 같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_ 강수진

by 미스터신 2017. 12. 30. 17:34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청춘은 묻는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고. 표정을 보면 심각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고민하던 햄릿처럼 절박하게 고민한다. '잘하는 일이냐 좋아하는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C전무의 사례를 통해 답을 찾아보자.

외국계 회사 회계담당 임원으로 퇴작한 C전무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바로 취업한 회사에서 회계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일을 정말 잘했다. 계산은 늘 정확했고 자금의 흐름을 예리하게 읽어냈다. 승진도 빠르고 연봉도 껑충껑충 뛰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구보다 잘하는 그 일이 본인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하루 종일 들여다봐야 하는 엑셀 파일이 싫었습니다. 엑셀 파일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8포인트, 9포인트 크기의 숫자는 더 싫었지요. 언제부터인가 출근을 했는데 컴퓨터를 켜기가 싫어지더군요.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까만 모니터를 보며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엑셀 파일과 숫자와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걸 아니까 피하고 싶었던 거죠.

 

C전무는 30대까지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뿌듯함과 승진하는 쾌감, 돈 버는 재미에 일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정도 관심도 없이 그저 돈과 승진을 위해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은 C전무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회사도 일도 사람도 싫어졌다. 출근도 하기 싫고,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는 것마저도 싫은 사람이 맡은 일을 잘 해내기는 어렵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는 법.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C전무의 성과는 조금씩 나빠졌다. 몇 년 후 회사는 퇴사를 권유했다.

 

상담을 받기 위해 내 앞에 앉은 C전무는 담담했다. 남들은 퇴직해서 서운하지 않느냐고 걱정하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오래 버텼다고,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남은 인생은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일을 하든 힘든 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배운 점은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돈만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즐거움과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일을 통해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지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하는 이유가 마음의 울림과 끌림이 아니라, 돈이나 명성을 위한 게 전부라면 곤란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매일매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와중에 경쟁에서 이기고 성과도 내야 한다.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는가? 직업은 한 번 선택하면 1~2년 하고 끝나지 않는다. 도저히 못하겠다 싶으면 직업을 바꿀 수 있지만, 쉽지는 않다. '직장'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요즘에 '직업'을 바꾸는 건 더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움은 더하다. 시작이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관심 분야를 자꾸 들여다보고, 용기를 내어 기회를 만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잘하기 위해서 배우는 과정이 재미가 있고, 재미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실력이 늘어간다. 그래서 처음에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둘 다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실력은 좋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일을 선택하면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도 아니고 잘하는 일도 아닌 쪽으로 변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마음이 가지 않는 일을 오래도록 잘 하기는 어렵다. C전무가 그 예다.

 

중요한 출발을 앞두고 있는 당신은 부디 인생을 길게 보고 자신을 위하는 선택을 하기 바란다.

 

자신을 위한 시간과 기회를 마련하자

 

이제 마무리하자. 당신은 지금까지 해야 할 것,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라고 한 것은 많이 하고 살았다. 이제는 가슴이 이끄는 것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어릴 때부터 모아두었던 자료를 살펴보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끌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뒤져보자. 나를 제대로 알고 도전하고, 경험하고, 판단하자. 마음속 울림을 따르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전한 청춘 세 명의 이야기를 전한다.

 

혜민 : 나는 공부를 잘했다. 무서운 엄마에게 혼나기 싫어서 공부를 하고 등수를 올렸다. 나가기 싫은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다. 전공도 엄마가 선택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곳에 관심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허수아비처럼,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왔다. 요즘 꾸역꾸역 나를 들여다보았다. 내 인생인데 나는 없었다. 이제 달라지고 싶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말도 못 꺼내봤다. 이제 해봐야겠다. 내 인생 최초로 엄마에게 반기를 들어보려 한다. 나를 위해 살아보고 싶다. 앞으로는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감을 위해 살고 싶다.

 

승재 : 내 마음속 끌림을 따르고 싶다. 부모님의 기대와 권유, 학벌, 사회적 위치, 친구 관계 등 내 삶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뚫어보고 싶다. 성공하고 행복할 거라는 확신은 없다. 힘들 것 같아 걱정도 된다. 그래도 나만의 삶,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 벽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보겠다. 책임도 내가 진다.

 

희중 : '나에게 1년만 시간을 주자'. 나는 지금까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가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청춘이 다 지나가기 전에,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에 나에게 시간을 좀 주려고 한다. 인생을 크게 볼 때 청춘 시기에 마음속에서 끌리는 일을 찾고, 그 일을 경험해보는 데 1년을 투자하는 건 낭비가 아닐 것이다. 부모님과 상의해 1년간 휴학을 하기로 했다. 시야를 넓혀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는 시간으로 채워보겠다. 1년을 후회 없는 도전과 경험으로 채워보고 내 길을 결정하겠다.

 

나를 위한 선택은 내 안에서 나온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에게 시간과 기회를 좀 주자. 연구에 의하면 성과를 예측하는 힘은 능력보다 흥미가 더 강하다. 어릴 때부터 막대한 연습 시간을 쌓아야 한다든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피겨스케이트 선수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것이 아닌 이상, 좋아하는 일을 하는 편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고 경험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청춘이 아니면 누리기 힘들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몇 주, 아니 단 며칠이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자신에게 시간을 좀 주자. 마음속 끌림을 찾고 경험을 해보자. 인생에서 내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기에 가장 좋은 때가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청춘이 바로 그때다.

 

나를 모르는 나에게_ 하유진

 

 

by 미스터신 2017. 11. 9. 16:08

 

손을 드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손을 들어라! Raise your hands!

나는 수업 시간에 캠페인처럼 학생들에게 손 들기를 강조한다. 나의 수업은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에 팀을 구성하는데 팀장을 뽑으려고 손을 들라고 하면 학생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다. 손을 드는 학생들은 거의 미국, 프랑스, 독일, 스폐인 등 외국 학생들이다. 보다 못한 내가 한국 학생들을 지목하면 그제야 슬며시 손을 든다.

 

손을 들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이건 명명백백하다. 기회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나를 반겨 주지 않는다. 기회로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손을 들고 그것을 잡아야 그다음 순서로 나아갈 수 있다. 손을 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손을 드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자신이 나를 위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호이다.

 

수업을 예로 들면 손을 들어 팀장이 되는 학생들은 그 직책을 맡아야만 느낄 수 있는 조직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 구성원 간의 역학 관계, 개별 구성원의 특징 파악 등에 관한 것들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발표의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손을 들지 않고 그저 묻혀 있듯 지내다 보면 스쳐 지나가 기억에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학생들은 손을 들어 주목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주목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어쩌나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실수를 한다 해도, 그래서 친구에게 창피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인생에서 그렇게 의미 있을 큰 일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경험,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에 비하면 순간의 두려움은 먼지처럼 가볍고 보잘것없다.

 

자신을 드러내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알게 된다. 타인의 시선은 두 번째이다. 손을 들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무리 속의 한 명, 드러날 것도 주목받을 것도 없는 사람,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말 뿐이다.

 

내가 대학 강의를 통해 손 들기 운동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는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패배한 적 없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변명이다. 시도하면 실패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돌려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손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젊음을 보낸 이들은 거개가 실패한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실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실패가 기다리고 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나는 실패한 적은 없어. 왜? 손을 들지 않았으니까' 하는 자기변명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청춘이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부단히 손을 들며 도전을 했던 기억은 가슴 뻐근한 성취의 쾌감만이 아니라, 때로는 참담한 실패의 기억까지도 머지않은 미래의 비옥한 자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나를 진화하게 하는 동력이다.

 

손을 들어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 몰랐던 것을 알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역시 손을 들어야 알 수 있다. 손을 들어 기회를 잡았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못하는 일이라는 것도 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빨리 알 수 있다. 손을 드는 일은 그 순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원하는 방향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음 순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바로 손 들기이다. 그것으로 많은 일이 연결될 수 있다.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 내가 한번 이뤄 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성과가 있다. 자신이 맺은 유무형의 네트워크는 한 단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2014년 1월 17일, 북경 시내 캠핀스키 호텔에서 자그마한 행사가 열렸다. 쓰촨성 야안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의 청소년들이 선플 본부 홈페이지에 올린 1만여 개의 추모의 글이 담긴 추모집과 선플 음악회를 통해 마련한 2만 달러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행사가 끝난 후, 나는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공익 프로그램과 <나는 가수다>를 만든 MBC TV 김영희 국장이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이 20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한,중 양국의 네티즌이 상대 국가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동영상을 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옳다고 판단되면 실행에 바로 옮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추진하겠습니다"라고 선포했다. 만일 제작된다면 한,중 양국에서 최초로 이루어지는 일로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했던 영상물 제작자 심영인 사장에게 촬영을 의뢰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북경 천안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국 시민들을 만나 촬영을 했다. 심영인 사장은 영상 제작의 귀재이다. 그가 촬영하는 비디오는 모두 풍부한 감성이 담긴 뛰어난 예술적 영상으로 태어났다.

 

심 대표와 나는 귀국하자마자 광화문 광장에 나가 한국 시민들이 중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영상을 촬영했다. 나중에 이 영상은 한중 네티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영상으로 태어났다. 내가 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쉽게 할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두드려야만 이루어진다.

 

내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이 손 들기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생각을 다 알아주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한 뒤에 나를 그 자리에 앉히는 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어떤 사람이 평생 동안 기다렸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말하면 열어 드리려고 이곳에 줄곧 있었습니다."

 

문지기에게 열어 달라고 했으면 벌써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터인데, 단 한 번도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이다.

 

기회는 내가 만들어야 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면 내가 먼저 손짓을 해야 기회가 비로소 내게 미소를 보낸다.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맨 처음 시작은 바로 손 들기이다. 정말 쉬운 방법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_ 민병철

 

★ 구리시 인창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영재교실

by 미스터신 2016. 3. 31. 08:52

 

나는 오늘을 산다

 

나는 거의 나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 나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도 올해 몇 살이냐는 식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면 만난 대로 나이를 묻고, 나이를 묻지 않은 채로 친해지는 중이라면 또 그래서 나이를 묻는다.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이다.

 

지금도 일간지 등의 매체에서 이름 뒤 괄호 안에 나이를 밝히는, 마치 법칙 같은 관행이 남아 있기도 하다. 유명인의 결혼 기사가 나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전 국민이 모두의 나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중요하다. 나이를 알아야 친구를 할지, 존대를 할지, 아니면 슬쩍 말을 놓을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는 그 사람의 행동의 당위성을 고려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나잇값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나이를 기준 삼아 경험치의 다소를 정해 누군가는 가르치려 들고 또 누군가는 배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 이렇게 나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유교 사상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 중국, 일본도 나이에 관한 질문은 결례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글로벌 에티켓을 다룬 <어글리 코리언, 어글리 아메리칸>을 처음 쓴 것이 1993년이다. 그때부터 2014년까지 다섯 차례나 증보판을 내면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아 고쳐야 할 '어글리 코리언' 에티켓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친하지 않다면 묻지 말아야 질문들이란 나이, 결혼의 유무, 자녀의 유무, 연봉에 관한 것이다. 그중 가장 거리낌 없이 늘 묻는 것이 바로 '몇 살인가'이다. 나이가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할까? 나이는 업무를 하는 데에도, 친교를 나누는 데에도 별 의미가 없는 요소이다. 나이는 젊음이나 늙음을 우리끼리의 잣대에 맞춰 표현하려는 이른바 기호일 뿐이다.

 

나는 젊었을 때에도 나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생 때부터 파트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쳤는데 너무나 젊은 나이의 학생이 어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된 입장이어서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나이를 말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다만 오늘을 살고 있을 뿐, 내가 몇 살이 되려고 몇 살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사회자가 하는 멘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십니까?"이다.

 

지금 이 나이가 어때서?

 

나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방송에 나오는 오늘까지 계속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 있다. 과분하게도 국민 영어 선생님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보통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나이와 방송에 나온 나이를 얼추 계산해 보면 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이로 살지 않는다. 나이는 현재의 나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상관 요소가 없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목표가 자꾸만 생긴다. 내 컴퓨터에는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올해 88세의 이케아의 창업주가 좋은 예이다. 그는 경영권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 두었지만 여전히 회사의 고문으로서 많은 것을 관여하고 있다. 나이로만 보자면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나 흔들의자에서 무릎 담요나 덮고 있어야 어울리겠지만 아직도 열정적으로 이케아의 미래를 일구고 있다. 여전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비행기를 탈 때에는 이코노미 석에 앉는다는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농담 같은 진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죽을 시간도 없다."

 

그는 10분은 무척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88세의 나이에도 10분 간격으로 배치된 빡빡한 일정으로 하루를 보낸다. 여기에서도 나이에 집착하면 '88세의 할아버지가 무척 건강하시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이를 거둬들이고 생각하면 필생의 사업을 일구려는 집념에 찬 한 남자의 열정적인 성공기가 먼저 보일 것이다.

 

나이는 내가 태어나 몇 해째 되었는지 알게 하는 시간의 개념일 뿐이다. 우스갯소리로 생일날 케이크에 꽂을 초의 수를 정하려고 기억하는 숫자일 뿐이다. 외국에서는 이마저도 상관없이 꽂기도 한다. 나이가 나의 경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내 행동의 반경을 정해서도 안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위해 충실히 노력하면 그뿐이다. 나잇값을 고려할 것도, 나이에 걸맞은 행동인가 아닌가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공중도덕을 해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해도 될까요?"

"이 나이에 결혼도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이 나이에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어쩌죠?"

 

큰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라면 나이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원한다면 하면 된다. 몇 살의 당신이 아닌, 목표가 분명한 당신이 원하면 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_ 민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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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신 2016. 3. 3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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